고쿠가쿠

고쿠가쿠

다른 표기 언어 Kokugaku , 國學

요약 일본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1603~1867]의 주도적 학문이자 사상이었던 유학(儒學)에 대항해서 일본 고전의 연구에 입각하여 고대정신의 부흥을 목표로 문헌학적 방법론에 의거, 학술활동을 전개한 학파 및 그 국수주의적 학풍을 가리키는 말.

17세기의 게이추[契沖]를 선구로 하여 이른바 '고쿠가쿠의 사대인(四大人)'이라 불린 가다노 아즈마마로[荷田春滿], 가모노 마부치[賀茂眞淵], 모토오리 노부나가[本居宣長],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본래 '고쿠가쿠'는 일본 신도(神道)를 가리키는 용어였고 실제로 학자들 스스로도 '와가쿠'[和學], '고가쿠'[古學] 등의 호칭으로 자신들의 학풍을 불렀다. 그러던 것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후에 이들의 학풍이 일본 고전의 연구를 대표하고 그 고도론(古道論)이 국수주의적 특징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고쿠가쿠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후대에 이 용어가 일반화된 것이다.

고쿠가쿠는 중세 가가쿠[歌學]의 형식적 규범주의와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봉건체제의 유교적 합리주의에 대항한 가가쿠 혁신운동으로서 발생했다.

게이추(1640~1701)는 도덕적 규범에 제약받지 않는 자연스런 인간상을 고전 속에서 탐구했는데, 비정치적 주정주의(主情主義)와 낭만주의를 본질로 하는 그의 학풍은 크게 볼 때 문학적 주정주의, 문헌학적 방법론, 비합리적 신도론(神道論) 삼자를 축으로 삼았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는 미토 한[水戶藩]의 도쿠가와 미쓰쿠니[德川光國]의 지원하에 〈만요다이쇼키 万葉代匠記〉를 저술하여 실증적인 문헌학적 방법론을 확립하였으며, 문학에 역사적 가나표기법[歷史的假名表記法]을 도입하는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전 연구를 직접적으로 신도론과 결합시켜 정치적 색채를 띠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이러한 가가쿠 혁신운동을 이어 18세기에 고쿠가쿠로의 발전의 기초를 다진 것이 가다노 아즈마마로(1669~1736)였다. 그는 신관(神官) 출신으로 에도[江戶:지금의 도쿄]에서 활동하면서 유학에 대항해서 고쿠가쿠를 적극적으로 바쿠후 체제에 도입했다.

가다노는 〈니혼쇼키 日本書紀〉·〈만요슈 万葉集〉 등 고전·고어(古語) 연구에 입각하여 일본 고유의 고도(古道)를 규명하려 했다. 한편 그는 고쿠가쿠의 연구와 보급을 위해 학교 설립을 건의한 〈소가쿠코게이 創學校啓〉(1728)를 바쿠후에 제출하기도 했다.

그는 어의(語義) 해석을 고쿠가쿠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중시하면서도 문학 자체에 독자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신도를 전면에 부상시켜 고쿠가쿠에 도(道)의 학문으로서의 규범성을 부여했다.

즉 신도가 고전의 실증적 연구로부터 귀납적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신도 관념이 선행하고 이를 통해 고전을 설명하려는 경향이 농후했던 것이다. 가다노의 뒤를 이어 고쿠가쿠를 체계화한 인물이 가모노 마부치(1697~1769)이다. 그는 〈만요코 万葉考〉(1768) 등 〈만요슈〉 연구를 통해 고대 정신의 근원을 탐구하면서 이를 통해 고도론을 전개하였다.

그도 가다노와 같이 몰락한 신관 출신이었기 때문에 현실의 모순을 타개하려는 정치적·사회적 지향성이 강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시적·문학적 성격이 농후했으며, 고쿠가쿠의 학문적 측면과 사상적 측면을 통일시키는 데 기여했다.

고쿠가쿠를 대성시킨 인물은 가모노 마부치의 문하에 있었던 모토오리 노리나가(1730~1801)였다. 그는 〈고지키 古史記〉 연구를 통해 게이추의 고어 연구를 기반으로 가모노의 〈만요슈〉 연구를 계승하면서 복고주의적 사상체계를 완성시켰다.

그의 연구는 고전주석·고도론·문학론·어학 등 다방면에 걸쳐 있으며 저술도 91종 266책에 이른다. 대표적 연구인 〈고지키덴 古事記傳〉(44권, 1798)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고지키〉 속에 유학과 불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일본정신이 담겨 있다고 보았다.

〈겐지 모노가타리 源氏物語〉를 연구하여 그 본질이 이른바 '모노노아와레'[物のぁゎれ:적막하고 쓸쓸하여 마음에 깊이 생각하고 느끼는 감동]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문학을 도덕적 해석의 틀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일본 문학평론사상 획기적인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모토오리의 저작을 읽고 모토오리 사후에 문인이 된 히라타 아쓰타네(1776~1843)는 봉건체제의 위기가 심화되던 당시 상황을 반영하여 고쿠가쿠의 정치·사상적 측면을 강화시켰다.

즉 그는 〈古史傳〉·〈古史徵〉 등의 저술을 통해 유학·불교·란가쿠[蘭學]를 전면적으로 배격하는 종교적 국수주의의 경향을 강화함으로써 기존 고쿠가쿠의 문헌학적 측면을 배제하고 고쿠가쿠의 신도적 성격을 부각시켜 가모노와 모토오리의 복고사상을 신도로 대성시켰다.

이를 복고신도(復古神道)라고 한다.

따라서 현존 규범과 질서에 대한 비판적 정신을 고양시키고 바쿠후의 압박을 받으면서도 실천운동으로서 전개되어 도쿠가와 시대 말기 존왕양이운동(尊王攘夷運動)의 유력한 이론적 지주가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고쿠가쿠는 일본 덴노제 국가의 지도이념으로서 대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