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단운동

의화단운동

다른 표기 언어 Boxer Rebellion , 義和團運動 동의어 의화단의 난, 경자교난

요약 중국 청대(淸代) 말기에 일어난 배외적(排外的) 민중봉기(1900).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

의화단은 원래 의화권(義和拳)으로 알려진 중국의 비밀결사로, 이들의 본래 목표는 중국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던 서구 열강과 만주족 왕조인 청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의화단원들은 자신들이 독특한 권법과 봉술의 연마로 초자연적인 힘을 얻어 총알에 맞아도 다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단체는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에 걸쳐 청에 대한 반란을 조장했던 대도회(大刀會)의 분파이다. 대도회는 청대 말기 장쑤 성[江蘇省], 허난 성[河南省], 안후이 성[安徽省], 산둥 성[山東省]의 4성의 경계지역에서 일어난 백련교 계통의 비밀결사이다.

그당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열강이 침투한 화북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진출하고 외국제품이 나돌았다. 또한 중국에 대한 일본의 군사행동이 시작되자 각 지역에서는 무장한 자위대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이중 하나인 대도회는 반(反)그리스도교 운동을 벌여 독일인 선교사 2명을 살해했는데, 독일은 이를 계기로 자오저우 만[膠州灣]을 침략·조차(租借)했다.

이러한 상황은 서구 열강에 대한 중국인의 감정을 더욱 자극했다.

서구 열강이 대거 침입하기 시작한 19세기말 중국 북부지역에는 연이은 천재지변과 경제적 어려움이 닥쳤다. 황허 강[黃河]의 범람과 잇따른 가뭄으로 유민이 생겨났고, 이런 유민·빈민·실업자 들로 구성된 의화권 조직은 점차 세력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1898년 반외세 보수파가 조정을 장악한 뒤 의화권에게 청에 대한 저항을 중지하고 힘을 합쳐 외세를 몰아내자고 제의함에 따라 의화권은 '부청멸양'(扶淸滅洋:청조를 돕고 외국을 멸한다)을 기치로 내걸었다.

산시 성[陝西省] 총독은 의화권이라는 이름을 공식 단체처럼 보이도록 '의화단'으로 바꾸게 하고, 그들을 지방군으로 채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많은 청의 관리들은 의화권의 비법을 익혀 총에 맞아도 다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으며,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서태후(西太后)는 서구열강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의화단을 계속 지원했다.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의 행동은 의화단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중국인들은 중국의 전통의례와 가족관계를 무시했다. 또한 선교사들은 지방 관리들로 하여금 그 지역에서 벌어지는 소송과 소유권 분쟁에서 주로 하층계급 출신인 그리스도교 개종자들의 편에 서도록 압력을 가했다. 1899년말 이후에는 의화단원들이 중국인 그리스도교도들과 서양인 선교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900년 의화단 주력부대는 직례(直隷) 의화단과 합류하여 2~6월 톈진[天津]을 점령했고, 직례에 있는 교회를 불지르고 외국의 중국 주재 기관을 파괴했다.

이에 대해 영국·프랑스·미국·독일의 4개국 공사는 청나라에 2개월 내에 의화단을 진압할 것과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4개국이 직접 군대를 파견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900년 5월 의화단원들은 수도 베이징[北京] 주변의 농촌지역으로 모였고, 마침내 6월초 위의 4개국과 일본·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는 2,100명의 군대를 조직하여 북부 톈진 항에서 베이징으로 급파시켰다.

6월 13일 서태후는 관군에게 외국 군대의 진입을 저지하라고 명했고, 소규모의 구원군은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의화단원들은 베이징에서 교회와 외국인 거류지들을 불태웠다. 외국 열강은 톈진에서 베이징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확보하기 위하여 해안에 위치한 다구[大沽] 포대를 점령했다. 다음날 서태후는 모든 외국인을 살해하라고 명했다. 이로 인해 독일인 선교사가 살해되었으며, 다른 외국인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 및 공사관 요원들은 수백 명의 중국인 신자들과 함께 베이징에 있는 공사관 구역과 대성당 안에 포위되었다.

1900년 8월 14일 연합군은 베이징을 장악하여 6월 20일부터 그곳에 갇혀 있던 외국인들과 그리스도교도들을 구조했다.

외국 군대가 수도에 주둔하고 있는 동안 서태후와 조정의 관리들은 협상을 추진하기 위한 몇몇의 대신들만을 남겨둔 채 시안[西安]으로 달아났다. 베이징에서의 전투가 끝난 뒤에도 의화단은 각 지역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특히 러시아군이 침입한 동북 각지에서는 의화단이 교회를 부수고 철도를 파괴했다. 연합군은 의화단원들을 학살하고 약탈·파괴를 자행했다. 그러나 의화단은 각지로 흩어져 소규모 전투를 벌였다.

서태후가 열강에 대한 공격을 명령한 뒤 영국·미국·프랑스와 장지동(張之洞) 등은 동남호보장정(東南互保章程)을 체결했다.

이는 제국주의 열강과 관료들이 함께 의화단의 남하를 막고 중국에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의화단은 중국의 관료들과 서구열강에 맞서 최후까지 싸웠다. 한편 당재상(唐才常)은 일본으로 망명한 캉유웨이[康有爲]와 연락하여 '근왕'(勤王:왕실을 위하여 충성을 바침)을 목표로 봉기를 계획했고, 흥중회의 쑨원[孫文]과도 만났다. 그러나 이러한 봉기계획은 무산되었고, 1900년 10월 전권대표 이홍장(李鴻章) 등과 11개국 대표 사이에 강화교섭이 시작되었다. 여러 논의 끝에 1901년 9월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외국열강에게 배상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의 신축조약(辛丑條約)이 조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