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장

이홍장

다른 표기 언어 Li Hungchang , 李鴻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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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23. 2. 15, 중국 안후이 성[安徽省] 허페이[合肥]
사망 1901. 11. 7
국적 청(淸), 중국

요약 1870년 중국의 직례총독에 임명되어 이 직책을 25년간 맡았다. 이 기간에 여러 상공업 근대화계획을 추진했고, 오랜 기간에 걸쳐 서구 열강을 상대로 외교문제를 담당했다. 1870년 이래 그는 서구인에게 가장 잘 알려진 중국측 협상자가 되었다. 25년의 재임 기간 동안 이홍장은 여러 가지 중요한 근대화사업을 일으켰다.
톈진에 무기제조공장을 설립했으며, 축성술을 향상시켰고, 신기술 습득을 위해 중국학생들을 미국에 유학보냈다. 청대말(19세기)의 근대화운동은 청조와 그 유교전통을 지키기 위해 시작되었으나, 제도적 반발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혔다. 이홍장의 전례 없는 정치역정은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와 경력
  3. 직례총독 시절
  4. 해외로의 여행
이홍장(李鴻章)
이홍장(李鴻章)

개요

자는 소전(少荃), 호는 의수(儀叟). 중국 근대화에 기여했다.

1870년 직례총독(直隸總督)에 임명되어 이 직책을 25년간 맡았다. 이 기간에 여러 상공업 근대화계획을 추진했고, 오랜 기간에 걸쳐 서구 열강을 상대로 외교문제를 담당했다.

초기생애와 경력

이홍장의 아버지는 나중에 이홍장의 후견인이 된 증국번(曾國藩)과 같은 해에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했다.

이홍장은 1844년부터 증국번의 지도 아래 베이징[北京]에서 관리생활을 시작했고 1847년 진사가 되었다. 1850년에 일어난 대규모 종교적·정치적 봉기인 태평천국운동은 청조를 위협했는데, 이홍장과 그의 아버지는 고향인 안후이 성이 위협을 받자 지방 민병대를 구성했다. 이홍장은 진압작전에 몰두한 나머지 1855년 아버지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거상기간(居喪期間)을 지키지 못하고 비공식적으로 진압업무를 계속 수행해나갔다.

1856년 판관(判官)이 되었다. 1860년 양강(兩江:장시 성[江西省]·장쑤 성[江蘇省], 안후이 성)지방의 총독인 증국번이 태평천국 토벌을 위한 비정규 군대인 상군(湘軍)을 조직했는데, 이홍장은 나중에 그의 막료가 되었다. 1862년 장쑤 성의 총독대리가 되어 자신의 군대인 회군(淮軍)을 인솔, 증기선을 빌려타고 상하이[上海]로 갔다. 그당시 서구 열강들은 중국과 벌인 2차례의 전쟁(1839~42, 1856~60)에서 증기선을 이용하여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 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불평등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고, 그결과 관세자치·치외법권 등의 특권을 내주게 되었다. 이홍장은 40세도 채 안 되어 고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독립된 군대를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유는 태평천국운동의 난세 동안에 이를 진압하는 입장에 있어 빠른 승진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62년 이후 몇 년 동안 상하이 주변의 태평군을 토벌하면서 외국인 용병과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이 외국인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찰스 조지 고든이라는 당시 30세 된 영국군 장교로 상승군(常勝軍)을 이끌고 있었다. 이 외국인 용병군대는 나중에 이홍장 휘하에 편입되었다. 서구 사람들은 태평천국운동의 진압을 외국 용병의 공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으나, 실제 진압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장본인은 증국번과 그 휘하 이홍장 등의 막료들이었다.

1864년 태평천국운동기의 수도인 난징[南京]을 함락시키기 위해 토벌군이 파견되었을 때 그 현지 사령관은 증국번의 아우였는데, 이홍장은 그 토벌작전에 참가하라는 증국번의 지시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왜냐하면 나중에 전공(戰功)을 놓고 시기심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인품이 대단히 사려깊음을 보여준다. 1865~70년 이홍장은 중국의 중부·북부·서부 지역에서 여러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중책을 맡아 잘 수행해냈다. 그는 자신이 난징과 상하이에 세운 서구식 무기제조공장에 꾸준한 관심을 보였다.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여 중국을 부강하게 만들고자 노력했고, 특히 1860년대 후반 근대화에 성공을 거둔 일본의 사례에 크게 고무되었다.

직례총독 시절

1870년 이홍장은 수도 베이징이 있는 직례성의 총독 및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로 임명되었다.

또한 북부지방 무역독판(貿易督辦)이 되어 양쯔 강[揚子江] 이북의 조약항(條約港)에서 행해지는 서구와의 무역을 관리하게 되었다. 서방세계와의 외교문제를 전담하는 총리아문(總理衙門)이라는 공식기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구인에게 가장 잘 알려진 중국측 협상자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중앙·지방 정부에 명실공히 영향력을 행사했고 자신의 군대를 휘하에 두었으며, 해외에서의 명성도 높아져갔다. 그결과 직례총독을 25년이나 역임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이 오랜 기간 동안 이홍장은 여러 가지 중요한 근대화사업을 일으켰다. 톈진[天津]에 또다른 무기제조공장을 설립했으며, 축성술(築城術)을 향상시켰고, 신기술 습득을 위해 중국학생들을 미국에 유학보냈다. 상업증기선·탄광·철도·통신선·군관학교, 면방직 공장, 서구식 전함(戰艦), 근대적인 조폐창(造幣廠), 2개의 근대적인 해군기지 등을 설치했다. 또한 시대착오적인 유교식 과거시험제도의 개혁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그러나 이같은 개혁에 관심을 나타내는 중국관리들은 별로 없었다.

이 기간 동안 이홍장은 일본·영국·프랑스 및 기타 조약국가들과의 협상에 자주 참여했다.

그의 외교적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중국의 국력이 점차 쇠약해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 자신도 이 점을 잘 깨닫고 '자강'(自强)의 노력을 끊임없이 펴나갔다. 1876년 중국은 한 영국 관리의 피살사건과 관련하여 영국에 사죄하기 위한 사절단을 파견했다. 같은 해 일본은 중국을 무시하고 조선과 조약을 맺었다. 그뒤 조선과 미국 간에 통상수호조약이 맺어질 때에도 이홍장은 미국으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받지 못했다.

1879년 중국은 류큐 열도에 대한 종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 이홍장은 베트남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을 프랑스가 인정해주기를 바랐으나 결과적으로는 청·프전쟁(1883~85)으로 인해 종주권이 프랑스로 넘어가버렸다. 조선에서 중국의 위신을 지키려던 그의 노력은 일본에 의해 저지당했고 1885년 그와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이에 한반도를 공동보호령으로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1894년 일본은 조선문제로 중국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청일전쟁(1894~95)에서는 이홍장의 북양(北洋) 해군이 대부분의 전역(戰役)을 담당했고, 중국에 있던 2개의 다른 현대식 해군부대는 거의 지원을 하지 않았다.

중국은 해전으로 결판이 난 청일전쟁에서 패하여 타이완을 일본에게 할양했다. 또 랴오둥 반도[遼東半島]의 조차권과 막대한 규모의 전쟁 보상금을 일본에게 주고, 서구 열강들이 불평등조약에 의해 누렸던 모든 특권을 일본에게도 제공하며, 조선의 독립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홍장은 이 전쟁을 피해보려고 했는데 그러한 회피적 태도 때문에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줄었다.

1895년 3월 친히 일본으로 가서 강화회담에 참석했던 그는 한 일본인 애국청년의 피습으로 부상당했다. 이 사태로 일본인들의 동정을 자아내게 되어 가혹한 강화조건을 다소나마 완화시킬 수 있었다. 러시아를 포함한 서구 열강들이 일본에게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라고 압력을 가하여 일본은 할 수 없이 이를 돌려주었고, 1898년 러시아가 랴오둥 반도를 실제적으로 조차했다.

해외로의 여행

많은 서구인들에게 이홍장은 일급 정치가임에 틀림없었다.

1896년 그는 러시아 체류중 양국간에 비밀동맹조약을 맺었는데, 이것은 근대 중국이 첫번째로 맺은 평등조약이었다. 비록 국빈의 자격으로 유럽을 여행했고 또 미국 워싱턴에서는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의 영접을 받았지만, 막상 그가 귀국했을 때 중국에서의 반응은 냉담했다. 서태후(西太后)가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를 보호했다고 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이같은 보호를 얻기 위해 서태후에게 막대한 돈을 뇌물로 내놓았다고 한다. 귀국 후에도 여전히 무역독판직을 유지했고, 1899년에는 양광(兩廣:광둥 성[廣東省], 광시 성[廣西省])의 총독대리가 되었다.

또한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대단하여 1900년 의화단(義和團) 사건이 벌어진 뒤에 이에 분노한 서구열강을 상대할 협상대표로 선임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국치(國恥)의 현장에 나서게 되었다.

이홍장은 유교적 미덕을 모두 갖춘 사람은 아니었다. 증국번처럼 금전문제에 깨끗하다는 명성도 없었고, 그가 벌인 대부분의 근대화사업도 사리사욕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중국의 유교적 국가체제가 몰락한 것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와 그의 몇몇 동료들은 옛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중국의 일부를 근대화시켰지만, 독특한 가치관과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체제하에서는 막상 근대적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충분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는 이같은 모순을 어렴풋이 인식했다. 그래서 과거제도를 개혁하면 과학적 제도를 도입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으나,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러한 제안을 내놓는 사람도 거의 없고 이홍장뿐이었다. 또한 중국학생의 해외유학을 지지했으나 궁정의 보수파들이 그것이 유교교리를 해치는 일이라고 매도하고 나서자, 그는 정치생명을 걸면서까지 해외유학제도를 지지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결과 1881년 학생들의 해외유학은 중단되었다. 그는 청의 체제를 능숙하게 관리해나갔고, 그 체제에 충성을 바쳤다. 청대말(19세기)의 근대화운동은 청조와 그 유교전통을 지키기 위해 시작되었으나, 제도적 반발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혔다. 이홍장의 전례 없는 정치역정은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