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요호 사건

운요호 사건

다른 표기 언어 雲揚號事件 동의어 운양호사건

요약 운양호사건이라고도 한다. 대원군이 실각하고 1873년 12월부터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조선 침략의 기회를 엿보던 일본은 1875년 운요호와 제이정묘호를 부산에 입항시키고 조선의 항의를 무시하고 무력적 포함시위를 단행했다. 9월 20일 운요호는 강화도 초지진으로 침입했으며, 강화해협을 방어하던 조선수비병은 일본군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이에 운요호는 초지진과 영종진에 포격을 가하며 상륙작전을 벌였는데, 조선수비병은 일본군에 패했다. 일본군은 영종진에서 방화·살육·약탈을 자행한 뒤 퇴각했다.
이후 일본은 운요호사건에 대한 사죄, 조선영해의 자유항행, 강화부근 지점의 개항 등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결국 1876년 2월 27일 불평등조약인 조일수호조약을 체결하였고, 일본은 조선식민지화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국내외 정세
  3. 경과
  4. 역사적 의의
운요호 사건
운요호 사건

개요

운양호사건이라고도 한다.

국내외 정세

1873년경부터 일본에서는 조선문제를 둘러싸고 정한론(征韓論)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것은 대외적으로는 '탈아외교'(脫亞外交)의 일환이었던 서구열강과의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한 노력이 실패하면서 오는 실망과 좌절감에서, 대내적으로는 당시 일본 전국에 충만하고 있던 유신과 개혁에 대한 불평·불만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이끄는 정한론자들은 이와쿠라[岩倉]·오쿠보[大久保] 등 내치(內治)의 우선을 주장하는 점진적 정한론자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대규모 정치분쟁 이후 정부에서 총퇴진했다.

이후 메이지[明治] 정부는 사이고 다카모리 퇴진으로 야기된 무사계급과 국민의 감정을 무마하고 그 관심을 해외로 돌리기 위해 1874년 타이완 침략을 단행했다. 한편 이 시기 조선에서도 강경한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대원군이 실각하고 1873년 12월부터 고종의 친정과 이어 민씨척족정권의 집정이 시작되는 등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한반도에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일본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더구나 조선정부는 1874년 청(淸)나라로부터 일본이 장차 타이완을 침략한 것과 같이 한국을 침략할 것이라는 경고가 담긴 자문(咨文)을 받고, 대원군의 심복으로 대일교섭을 담당한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 등을 처벌하고 양국간의 관계개선을 위해 우호적인 태도를 일본 측에 전달했다. 한편 교섭재개를 위하여 이미 부산에 파견되었던 모리야마[森山茂]는 이러한 조선의 우호적 태도가 대원군의 실각에 수반한 정국의 혼란과 정부의 약화에서 유래했다고 파악하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조선에 대하여 약간의 힘과 압력을 가하는 것'이라고 외무성에 보고했다.

또한 그는 1875년 부산에 거듭 파견되어, 4월 15일 강경한 대한포함외교(對韓砲艦外交)를 주장하는 건의서를 일본정부에 제출했다. 결국 이러한 모리야마의 강경책은 일본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마침내 군함을 파견하기로 결정되었다.

경과

군함파견 결정에 의해 운요호와 제이정묘호(第二丁卯號)가 각각 5월 25일, 6월 12일에 부산에 입항했다.

그들은 조선의 항의를 무시하고 연안을 탐측하면서 무력적 포함시위를 단행했고, 6월 14일에는 부산훈도(釜山訓導) 현석운(玄昔運) 등 조선관리가 관람차 승선하자 불시에 발포연습을 감행함으로써 일본의 대한포함외교정책을 강행할 것임을 과시했다. 이후 남해안과 동해안을 탐측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이던 운요호는 9월 20일 강화도 동남쪽 난지도(蘭芝島)에 정박했고, 함장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이하 수십 명의 해병은 보트에 나누어 타고 초지진(草芝鎭)으로 침입했다.

강화해협을 방어하던 조선수비병은 침입해오는 일본 보트에 포격을 가했고, 이에 이노우에는 운요호로 철수하여 즉각 초지진에 대대적인 포격을 가했다. 이어 제물포 해안의 영종진(永宗鎭)에 포격을 가하며 상륙작전을 벌여 일대 격전이 벌어졌는데, 조선수비병은 근대식 무기를 휴대한 일본군을 대적할 수 없어서 첨사 이민덕(李敏德) 이하 400~500명이 패주했다. 일본군은 무기를 약탈하고 영종진에 대해 방화·살륙·약탈을 자행한 뒤 나가사키[長崎]로 돌아갔다.

역사적 의의

이 사건으로 조선은 일본의 무력 앞에 무기력하다는 것이 드러났고, 일본에서는 다시 정한론이 대두하여 운요호사건에 대한 조선정부의 사죄, 조선 영해의 자유항행, 강화부근 지점의 개항 등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곧이어 일본정부는 6척의 군함과 800명의 군대에 호위된 전권(全權)대표단을 파견하고 1876년 2월 27일 강화도에서 조선과 전문 12조로 된 한일수호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일본의 강압적 위협에 의하여 맺어진 불평등조약이었다. 결국 운요호사건은 일본의 한반도침략의 일환으로 계획되었으며, 일본은 불평등조약 체결을 계기로 조선식민지화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