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운동

오순절운동

다른 표기 언어 Pentecostalism , 五旬節運動

요약 19~20세기에 미국의 많은 개신교 교회들에서 일어난 은사(恩賜)운동.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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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오순절운동이 호소력을 갖게 된 배경
  3. 현대의 기원
오순절운동(Pentecostalism)
오순절운동(Pentecostalism)

개요

이 운동의 특징은 '성령 세례'라는 회개 후의 신앙 체험을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이 추구해야 한다는 믿음에 있다.

이 체험은 〈사도행전〉 1장 12절~2장 4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인 그리스도의 12제자들에게 성령이 최초로 강림한 사건과 동일하며, 이 체험에는 방언(→방언은사)이라는 동일한 표적이 따른다고 믿는다. 오순절교회들은 또한 성령세례를 받은 신자는 예언·병고침, 방언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 등 초대 교회에 존재했던 초자연적 은사들 가운데 적어도 1가지는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순절교회들은 19세기 미국에서 성서의 문자적 해석, 회개, 엄격한 도덕생활을 강조하며 일어난 개신교의 근본주의 분파나 성결교 분파의 신앙과 의식 형태들도 반영한다(→성결운동). 오순절교회들은 성령세례·방언·병고침 등 특정 교리에서 공통된 신앙을 갖고 있음에도 단일 교단으로 연합하지 못했다.

오순절운동이 호소력을 갖게 된 배경

초기 오순절운동이 20세기 처음 몇 십 년 동안 성공을 거두었고 그뒤에도 계속 폭넓은 호소력을 유지한 이유는 남북전쟁 이후의 시대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기는 성서적 신앙에 대한 무관심이 점차 증대해가던 시기였다. 감정에 바탕을 둔 신앙 표현들, 즉 열정적인 찬송, 즉흥적인 간증, 통성기도, 평신도 설교자들이 간단한 성서 주제들을 가지고 하던 즉흥 설교 대신에 설교학으로 훈련받고, 고등성서비평에 영향을 받은 '목사들'이 인도하는 질서와 형식을 갖춘 예배의식이 자리를 잡았다. 야외 집회장소들과 엉성한 천막들 대신 시설을 갖춘 예배당들이 들어섰다.

감리교, 침례교, 그리스도의 제자교회 등 한때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로 알려졌던 대교단들이 중상층 교회로 변해, 가난한 사람들은 더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들은 신앙 확신에 대한 갈망을 만족시켜줄 뿐만 아니라 감정적·심리적·육체적 욕구를 채워줄 '가슴의 종교'로 되돌아가게 되기를 열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등장한 성결운동과 오순절운동은 수많은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주었다(신앙치유).

오순절교회들은 특정한 확신을 발산했다.

이 교회들에는 역사가 오래된 대교단들의 신앙 양태인 모호함이 없었다. 더욱이 산업사회의 폐단이 나타나던 시기에 이 교회들은 경제와 문화에서 무시당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계층에 대해 꾸준한 사역을 펼쳤다. 오순절운동이 호소력을 가졌던 또하나의 원천은 병고침 교리를 강조한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순절부흥운동의 시초부터 그 전도자들(메리 B. 우드워스에터, 찰스 프라이스, 에이미 셈플 맥퍼슨, 그리고 후에는 오럴 로버츠)은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에는 질병으로부터의 구원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은 합당한 믿음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의 특권이라고 가르쳤다.

현대의 기원

현대 오순절운동의 뿌리는 19세기 미국 여러 지역에서 발전한 성결교부흥운동의 은사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운동은 1890년대 중반 노스캐롤라이나에서 '그리스도교도 연맹'이라는 100명 가량으로 구성된 성결과 조직 가운데에서 발생했다. 이들은 나름대로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생각했고, 그 체험에 기초하여 훗날 주요오순절파 교단이 되었던 '하느님의 교회'(테네시 주 클리블랜드)를 세웠다. 이와 비슷한 영적인 각성운동이 역시 1890년대에 테네시·아이오와 및 그외 지역에서 발생했다.

이 운동들 가운데서 가장 폭넓은 영향을 끼친 것은 20세기로 접어들던 시기에 캔자스 토페카에 있는 '베델성서대학'이라는 소규모 종교학교에서 발생한 운동일 것이다. 이 학교의 교장 찰스 폭스 파램은 성결운동에 영향받은 목사로, 그는 자만에 빠져있는 형식주의적인 교회가 부흥해야 하며, 오로지 다시 한번 성령세례를 받음으로써만 부흥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감리교·퀘이커교·성결교 교회에서 목사 임명을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그의 학생들에게 기도하고 금식하고 성서를 연구하며,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건들과 거의 흡사하게 임할 오순절의 축복과 권능을 기다리라고 가르쳤다.

1901년 1월 1일 파램의 수많은 학생들 가운데 애그니스 N. 오즈먼이라는 여학생이 아무도 모르는 방언을 말하기 시작하면서 맨 처음으로 성령세례를 체험했다.

그뒤 오순절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은 대부분 방언이 진정으로 성령세례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최초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오순절의 재현은 예언적인 뜻도 부수적으로 지니고 있었는데, 파램과 그의 학생들은 자신들이 분명히 종말에 살고 있다는 뜻으로 이를 해석했다. 긴박감에 사로잡힌 파램과 그의 학생들은 종말이 오기 전에 미국 남서부에 복음을 전하고자 했다.

이들의 노력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파램에 따르면 1905년까지 텍사스에서만 약 2만 5,000명이 오순절파의 신앙과 의식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은사운동은 처음에는 인접한 캔자스·미주리·텍사스 주 등의 3개주와 앨라배마·플로리다 주 서부 등 일부 지역에서만 유력했을 뿐이다. 전국적이고 세계적인 확장은 1906년 '어주사가(街) 부흥운동'(Azusa Street revival)의 결과였다.

로스앤젤레스 공업지대의 어주사가 312번지에 자리잡은 '사도신앙 복음선교회'는 규모가 크지 않았다.

그 지도자 윌리엄 세이무어는 과거에 성결교회 목사를 지낸 외눈박이 흑인으로서, 찰스 파램이 텍사스 휴스턴에 세운 성서학교에서 오순절파의 가르침을 접한 인물이었다. 그의 인도로 감리교 예배당으로 쓰이던 낡은 건물이 오순절파의 성지(聖地)가 되었다. 1906년 4월부터 계속하여 부자와 빈민, 흑인과 백인, 미국 원주민과 해외 이주민, 구도자와 회의론자들이 영적인 도움을 얻기 위해 어주사가의 선교회로 몰려들었다.

영적인 활력을 얻고 은사를 받았다고 확신한 수많은 남녀들이 각지로 흩어져 방언의 실재와 목적을 자랑하면서 자기들의 체험담을 전했다. 얼마 뒤 활기넘치는 오순절파 신자 집단들이 모이는 가게 앞 전도처들, 인구가 별로 없는 농촌지역들에 자리잡은 소박한 천막교회들, 도시빈민지역의 다락방들이 세계 여러 지역에서 생겨났다.

이 신도들은 '늦은 비 부흥운동'(Latter Rain), '사도신앙', 오순절운동 등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진 새로운 부흥운동의 결과였다.

오순절교회 조직의 발전에 따라 결국 형식에 비중을 두지 않는 일종의 '영적 연맹'이 형성되었다.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분리하여 독립된 '오순절파'를 구성하려는 생각이 있기는 했지만 극히 미미했다. 역사가 깊은 개신교 교회들의 많은 교인들이 방언·치유·예언 등에 관한 가르침과 의식들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처음에는 자기들이 속해 있던 교회에서 이탈하여 또다른 교단을 세울 의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

단지 각자 속한 교회에서 형식적인 예배, 현대주의 신앙, 세속적인 행위 등을 제거하는 일을 돕고, 각자의 교회를 〈신약성서〉 〈사도행전〉에 묘사된 교회들과 비슷한 활기차고 성령으로 충만한 공동체들로 바꾸려고 노력하며, 개혁과 부흥의 대리인이 되고자 했을 뿐이다. 이들은 성서에서 예언하고 또 이미 자신들이 받은 바 있는 '축복의 소나기'가 자기들이 속해 있는 교단들에 흠뻑 내리기를 열망했고, 그로 인해 교단 전체가 오순절교회로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순절파가 초기에 꿈꾸었던 개신교 교계에 대한 정복은 실현되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운동은 오히려 초기부터 폭넓은 반박의 대상이 되었다. 오순절파의 관행을 지지한 목사들은 소속 교회들에서 파면당했고, 은사운동에 공감을 표시한 선교사들은 소속 선교부서들로부터 재정지원을 중단한다는 통보를 받았으며, 방언을 한 교인들의 이름은 교인명부에서 삭제되었다. 오순절파 관행을 드러내는 사람들에 대해서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아나테마'(교회가 내리는 엄격한 출교령)가 공포되었다. 은사를 추구하면서 종교생활을 계속하고 싶어하던 사람들은 전통적인 개신교의 제도적인 틀 안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점점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결과 그러한 견해를 갖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소속교회에서 나와 새롭고 뚜렷한 오순절파 단체들을 구성했다.

이렇게 해서 구성된 대부분의 오순절교회들은 과거 자기들이 몸담았던 교회를 연상시키는 것을 모두 기피했다.

이들은 특히 집행부서에 권한이 중복되거나 집중되는 것을 경계했다. 외부적인 교회조직의 통제에 종속되거나, 신앙과 정책 면에서 공통적인 관행들에 매이려 하지 않았다. 그결과 매우 비효율적인 이질성이 나타났다. 거짓 교리로 보이는 것들이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은 채 퍼졌고, 신실한 설교자와 거짓 설교자를 구별할 능력이 없는 회중들을 대상으로 사이비 부흥사들이 이익을 챙겼으며, 장부와 회계기록들이 아무런 감사도 받지 않았다. 오순절교회 지도자들은 고삐풀린 개인주의와 자율성으로 생긴 문제들이 조직과 관료제의 폐단보다 더 심각하다는 점을 인식하고서 명백히 은사운동을 지향하는 하나의 교단을 세우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오순절운동은 하나로 통합되지 못한 채 분열했다. 그것은 오순절교회들이 각 지역의 유능한 지도자들에게 몰리거나, 일부 사람들이 그들의 독특한 신앙이나 의식에 관한 교리들을 보편적인 의무로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운동 대신 다양한 오순절교회가 생겨났다. 이들은 신조·예배의식·조직 등의 문제에서 견해가 서로 달랐고, 심지어 근본적으로 다른 경우들도 많았다.

어떤 교회들은 열정·자발성·법률존중·독립성을 좋아했고, 어떤 교회들은 질서·의식·관용·성직체계에 의한 통제를 좋아했다. 오순절교단들은 미국 전역에 퍼져 있고,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나라들로는 멕시코, 칠레 및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스웨덴, 노르웨이, 영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러시아 등이 있다. 미국에서는 40개 이상의 단체들이 방언을 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그외에도 정확하게 추산할 수 없는 수많은 스토어프론트 교회들이 있다.

오순절교회들은 두메산골과 농촌지역에도 많이 있으며, 집회 때 감정을 겉으로 표출하는 현상은 주로 이들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순절교회의 대교단들은 '오순절세계협의회'로 조직되어 있으며, 본부는 웨일스에 있다.→ 국제사중복음교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 미국오순절교회, 순복음교회, 연합오순절교회협회, 오직 예수, 하느님의 성회, 하느님의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