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운동

성결운동

다른 표기 언어 Holiness movement , 聖潔運動

요약 19세기 미국의 개신교 교회들에서 일어난 근본주의 신앙운동.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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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기원
  3. 분리와 연합
  4. 성결파 단체들의 등장

개요

그 특징은 신자로 하여금 죄 없고 완전하고 거룩한 그리스도교도의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회심의 경험을 크게 강조하는 성화(聖化) 교리에 있다.

이 시기에 태동한 많은 성결교회는 유사 감리교 분파에서부터 오순절파 교회와 비슷한 집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기원

완전함, 즉 개인의 성결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추구해온 역사가 그리스도교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으로 본다.

그들은 그 충분한 근거를 복음서와 사도서신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음탕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Ⅰ데살 4:7) 등의 구절에서 찾는다. 그러나 완전주의를 반대하는 자들은 주저 없이 지적하기를, 그리스도교 전체 역사를 통해 볼 때 그러한 견해를 지지했던 자들은 대부분 영지주의, 펠라기우스주의, 몬타누스주의, 재세례파, 셰이커교 등의 집단을 형성한 심령파들, 이단들, 광신주의자들이었다고 한다.

더 나아가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칼뱅에 이르는 주요 정통신학자들은 인간이 죄와 죄의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으며, 따라서 이 세상의 삶에서 완전을 성취할 수 없음을 강하게 선언했다고 주장한다.

대체로 이러한 견해는 감리교 창시자인 웨슬리가 그리스도교도의 완전을 촉구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웨슬리는 완전성의 교리를 성서에 기초를 둔 원리로 보았다.

그는 '진정으로' 그리스도교도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완전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흔쾌히 죄를 용서(義認)해줄 만큼 선한 하느님은 죄인을 넉넉히 성자로 변화시킬(성화) 만큼 능력이 있는 분이며, 그러므로 죄인이 '악한 생각과 기질'뿐만 아니라 외적인 죄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게 해 주는, 즉 성결의 단계에 이를 수 있게 해 준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도의 완전성, 철저한 성화, 개인적인 성결과 같은 개념은 웨슬리의 설교뿐만 아니라, 18세기 영국 전역을 휩쓸고 마침내 식민지 미국에까지 도달하게 된 복음주의 부흥운동에서도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미국 감리교의 표어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의 성결을 이 나라 전역에 전파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반 수십 년 동안 미국 감리교도들은 대체로 성결의 교리를 무시했다. 완전주의에 대한 관심이 해이해진 이유는 국가경제의 번영으로 인해 경건이 심화될 여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며, 경제적 번영과 아울러 대중들이 오네이다 공통체 같은 당시의 도덕폐기론적 완전주의 단체의 영향을 받아 무절제해졌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성결의 교리가 무시된 것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1830년대에 접어들면서 완전주의는 월간지 〈그리스도교도의 완전에 이르는 길 Guide to Christian Perfection〉의 출판과 앨런 스트리트 감리교회의 여성 평신도였던 피비 파머의 맨해튼 집에서 열린 '성결 증진을 위한 화요 모임'의 시작으로 새로운 자극을 받았다. 게다가 에드먼드 S. 제인스와 리오니더스 L.햄린과 같은 감독들을 포함한 감리교 단체들의 유력한 지도자들은 성결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보다 차원 높은 그리스도교도의 삶'의 부흥을 열렬히 지지했다.

분리와 연합

1843년에 20여 명의 목사와 6,000여 명의 교도들이 감리교 감독교회(Methodist Episcopal Church)에서 탈퇴하여 미국 웨슬리 감리교회(Wesleyan Methodist Church of America)를 세웠다.

그뒤 완전주의와 감독 권한을 쟁점으로 한 10여 년의 논란 끝에 감리교의 또다른 무리가 1860년 게네시(뉴욕) 평의회를 떠나 북아메리카 자유감리교회(Free Methodist Church of North America)를 세웠다. 그러나 이러한 탈퇴에도 불구하고 성결이나 완전주의적 견해를 지지하는 대부분의 개신교도들은 자기 교회를 버리기를 꺼려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자기 교회의 교도로 그냥 남아 있기를 바랐으며, 1867년에 세워진 '성결증진을 위한 전국 야영집회 연합회'(National Campmeeting Association for the Promotion of Holiness) 같은 독립적인 기구들을 통해 뜻을 같이하는 다른 그리스도교도들과의 교제를 추구했다. 사실상 그뒤 몇 년 간 이 기구는 성결 사상을 널리 퍼뜨리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양대 해안에서 열린 여러 야영 집회에 수백 명의 참가자들이 제2의 축복, 즉 성화 은총을 체험했다고 간증했다.

이렇게 자기 교단에 그대로 남은 채 성결증진을 위한 지방·지구·전국 협의회에서 개인의 완전을 추구하는 방식은 일시적으로는 그 기능을 발휘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그 방식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 이유로는 첫째, 중서부와 남부 농촌지역의 많은 개신교도들이 성결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청교도적인 복장과 행위를 좋아했다. 그들 대부분은 '피상적이고, 거짓되고, 세상 유행에 민감한' 그리스도교도들에게 냉담했으며 부와 사회적 명성, 형식적인 신앙에 몰두해 있는 그들을 혐오했다. 그결과 그들은 분리정책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둘째, 교단의 몇몇 지도자와 성결파 지지 교구들 사이에 점차 균열이 커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엄격한 규율에 젖어 있는 교단에서 활동하던 감리교 감독들이 '자발적인 동맹·연맹·연합·협회들'의 지나친 행동을 용납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또한 아무런 '공식적' 승인도 없이 대학의 부흥운동, 야영집회, 도시단위의 전도대회 등을 지휘하고 있는 성결파 전도자들의 수가 갈수록 늘어나는 것을 우려했으며, 아울러 제2의 축복 사상을 홍보하는 성결파 대중매체의 능력이 갈수록 커지는 것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그들은 이런 모든 활동이 '어떤 공식적인 감독이나 제한'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그들의 조언은 주목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1894년의 감독교서를 통해 '성결'을 구호로 하는 자들과 '성결파 집회, 성결파 설교자, 성결파 복음전도자, 성결파 재산'을 유지하는 자들에 대해 축출을 선언했다. 의심할 것도 없이 이 선언은 1843년에 시작된 분열과정을 더욱 촉진시켰을 뿐이다.

이때 의견을 달리하는 6,000명이 교단을 탈퇴하여 '웨슬리 감리교회'(Wesleyan Methodist Church)를 세웠다.

성결파 단체들의 등장

1880년과 제1차 세계대전 사이에 수많은 성결파 집단이 등장했다.

인디애나 주 앤더슨의 '하느님의 교회'와 같은 집단은 관료적인 교단의 파벌주의에 저항하여 세워졌다. '크리스천 선교동맹'과 '나자렛 교회' 같은 집단은 소위 개신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화려한 도심지 교회 회중들이 거의 돌아보지 않던 도시 빈민들의 영적·사회적 궁핍을 돕기 위해 조직되었다. 결국 이들 모든 성결파 교단은 제2의 축복인 성화의 체험과 그에 따르는 성별된 생활과 성결의 실천을 손쉽게 전파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그것은 기존의 큰 교단들로서는 명백히 지지하거나 용인할 수 없는 견해였다(신). 이들 새로 출현한 성결파 집단들은 대부분 제한된 지역에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이들 중 다수는 계속 성장하여 주목할 만한 능력을 발휘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하느님의 교회, 크리스천 선교동맹, 구세군, 나자렛 교회 등 비교적 새로운 교단들뿐만 아니라, 웨슬리 교회와 북아메리카 자유감리교회 등 '오래된' 교단도 있다. 현재 성결 운동의 전체 회원 중 약 1/3을 차지하고 있는 나자렛 교회는 일반적으로 이 운동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 교단으로 인정된다.

성결파 교단들은 신앙과 예배에서 큰 차이가 있지만, 그중에서 공통되는 몇 가지 가닥을 잡을 수 있다.

감리교 교리에 근거하여 그들의 신앙을 정립한 대다수의 성결파 교회들은 예정과 영벌(永罰)이라는 보다 엄격한 칼뱅주의 교리를 무시하고, 회개·신앙·성결에 관한 비교적 온건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강조점들을 받아들인다. 덧붙여 말하자면 비록 20세기의 대다수 감리교도들은 그리스도교도의 완전에 대한 웨슬리의 견해를 별로 중요하게 받아들이지 않지만, 성결파 교회들은 대부분 지금도 그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19세기 경건주의와 부흥운동에 영향을 받은 오늘날의 성결파 교회들은, 교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감리교 선조들보다는 근본주의에 더 가까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의 교리를 검토해보면 '완전 영감'(성서 전체의 축자영감), '인류 전체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재림' 등과 같은 보수주의적인 복음주의 신앙의 증거들을 발견하게 된다. 나자렛 교회와 크리스천 선교동맹 등 몇몇 교단의 교리문에는 신유와 오순절적인 체험에 대한 간단한 암시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런 요소가 성결파 교회의 교리를 오순절운동, 즉 완전주의 좌파와 동일시할 만큼 충분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사실상 많은 우파 성결 교단들은 이 완전주의 좌파를 비난해왔다. 성결 교단들은 괄목할 만큼 성장해왔으며(1933~63년 '나자렛 교회'의 교인수는 80%가량 증가함) 극적인 변화를 겪어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찰자들 눈에는 그들이 변함없이 회개 이후의 성화 체험이라는 독특한 교리에 집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들은 담배·술·영화·유행 등과 같은 '세속적' 일들을 포기했으며 개인적 성결의 삶에 관한 기존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도 않았다.

야영집회와 부흥운동, 죄인이 마음과 생활의 성결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마련된 참회석은 아직도 오늘날 성결운동의 징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