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티

알베르티

다른 표기 언어 Leon Battista Alberti
요약 테이블
출생 1404. 2. 14, 제노바
사망 1472. 4. 25, 로마
국적 이탈리아

요약 개성, 저서, 학문의 폭 등에 비추어 볼 때 르네상스 '보편인'의 모범으로 여겨진다.
그는 초기 르네상스 이탈리아 문화생활의 선구자로 다재다능한 자질로 존경을 받았다. 이런 면에서는 반세기 뒤에 나온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비슷했으나 알베르티의 인물됨과 업적은 다재다능할 뿐 아니라 통일성을 특징으로 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천재성 덕분에 알베르티보다 더 많이 더 깊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시야가 '현대적'이고 단편적인 성질을 지녔음에 비해 알베르티는 사상과 생활면에서 측량과 조화라는 르네상스의 이상을 완벽하게 실현했다. 그의 지적 추구와 예술적 추구는 동질적이었으며 그는 이론과 실천 사이의 독특한 균형을 이룩했다. 그리하여 사회·정치 사건들이 이 강력한 시대적 소망을 꺾기 시작한 바로 그 시점에 그는 이 소망을 실현하고 있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어린시절과 교육
  3. 철학·과학·예술에 대한 기여
  4. 평가

개요

개성, 저서, 학문의 폭 등에 비추어 볼 때 르네상스 '보편인'의 모범으로 여겨진다.

어린시절과 교육

알베르티는 그가 태어난 사회와 계급으로부터 일생 동안 가다듬고 발전시킬 지적·도덕적 경향을 부여받았다.

그는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은행가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알베르티가(家)는 당시 알비치가가 지배한 과두정부에 의해 피렌체에서 쫓겨나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 알베르티의 아버지 로렌초는 그가 태어난 제노바에서 가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로렌초는 그뒤 곧 베네치아로 이사하여 알베르티와 형 카를로를 길렀다. 그와 형 카를로는 볼로냐의 한 과부한테서 태어난 서자였지만 로렌초의 유일한 자식이자 상속자였다.

애정이 깊고 책임감있는 아버지 로렌초는 피렌체 출신의 양어머니(1408 결혼)를 맞아 아들의 교육을 주의깊게 돌보았다. 알베르티에게 수학을 가르친 사람도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사업가로서 유용한 지적 도구 덕분에 알베르티는 평생 동안 규칙적·이성적 질서에 애착을 가졌고 수학 원리를 실제로 응용하는 일에 지칠 줄 모르는 즐거움을 느꼈다. 한 저명인사는 알베르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나에게 수학 연구와 증명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다. 특히 알베르티처럼 이 연구와 증명을 무언가 유용한 일에 응용할 수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알베르티는 수학에서 그림의 원리(원근법)와 무게 변화에 관한 놀라운 명제도 이끌어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알베르티도 수학 때문에 겉으로 보면 무관한 몇 가지 학습과 실천 분야에 매력을 느꼈다. 수학은 단번에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주었고 물리세계의 합리적 구조와 과정을 식별하는 눈도 뜨게 해주었다.

그가 초기에 공식적으로 공부한 과목은 인문학이었다.

10(또는 11)세 때 알베르티는 파도바에 있는 기숙학교에 들어가 고전 라틴어 교육을 받았다. 토스카나의 시골 마을에서 가난한 공증인의 서자로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런 교육을 받지 못했다. '새로운 학습'은 주로 문학과 관련된 것이었고 알베르티는 완벽한 라틴어 학자이자 문학가가 되어 학교를 졸업했다. 고전학자로서 재능을 맘껏 발휘하며 불과 20세 때 라틴어로 희극을 썼다. 이 희극은 한 로마 극작가가 '개발한' 작품으로 갈채를 받았고 1588년에도 베니스의 유명한 출판사인 알두스마누티우스사(社)가 로마인의 작품으로 출판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베르티가 젊었을 때부터 평생 동안 매료된 것은 고전작가들의 형식보다 내용이었다. 대부분의 인문주의자처럼 그에게도 고대 로마의 문학은 도시적·비종교적·합리적 세계에 대한 시야를 열어주었으며, 이 세계는 점점 더 부상하고 있던 이탈리아의 도시생활과 매우 비슷하게 보였고 이 생활의 문화적 필요를 채워주었다. 그는 '고전작가들'과 비슷한 정서적·지적 경향을 지니게 되었으며 그들에게서 자기 사상의 핵심 개념을 이끌어냈다.

알베르티는 볼로냐대학교에서 재미없는 법률공부를 하면서 공식 교육을 마쳤다.

아버지가 죽자 알베르티는 슬픔에 잠겼고 가족 중 누군가가 예상 외로 그의 유산을 모조리 차지해버렸기 때문에 그는 볼로냐에 머문 7년 동안 궁핍하게 지냈다. 그러나 학업은 포기하지 않았다. 1428년 교회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법률 활동을 계속하지 않고 대신 서기라는 '글쓰는' 자리를 받아들였다. 1432년경 그는 로마에서 교황청 사무국(몇몇 인문주의자를 지지했음)의 서기였으며, 높은 성직에 있는 후원자의 부탁으로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전통적 생애를 우아한 '고전' 라틴어로 다시 쓰는 임무를 맡았다.

이때부터 교회는 그의 생계를 보장해주었다. 그는 성직을 얻었고 그리하여 교황의 서기로서 받은 연금 외에 성직록으로 피렌체의 주교관구에 있는 강갈란디의 작은 수도원도 받았다. 몇 년 뒤에는 니콜라우스 5세에게 무젤로에 있는 보르고 산 로렌초의 교구목사관도 수여받았다. 알베르티는 분명히 전형적인 독신 생활을 했지만 그후의 활동에는 그가 성직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이 전혀 없었다. 그의 관심과 활동은 아주 현실적이었고, 인문주의적이고 전문적인 일련의 눈에 띄는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철학·과학·예술에 대한 기여

로마에서 1432년에 쓰기 시작한 〈가족에 관하여 Della famiglia〉라는 소논문은 도덕철학에 관한 몇 가지 대화편 중 첫번째 것이었으며 이 대화편 덕분에 그는 윤리사상가와 문장가로서 유명해졌다.

그는 라틴어에 능숙하지 못한 폭넓은 도시대중(그는 이들을 non litteratissimi cittadini라 불렀음)을 위해 이 대화편을 모국어로 썼다. 고전적 모델, 주로 키케로세네카에 기초한 이 작품들은 부르주아 집단의 일상적 관심사, 즉 재산의 덧없음, 역경과 행운에 대처하는 법, 살림살이, 우정과 가족, 교육, 공동이익을 위한 의무 등에 관해 고전작가들의 현명한 조언을 제공했다.

이 작품들은 교훈적이고 전통적이었지만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말씨와 생활양식을 가진 참신한 것이었다. 알베르티의 대화편에서 고대세계의 윤리적 이상은 분명한 현대적 관점, 즉 노동의 관념에 기초한 도덕성을 기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덕은 올바른 사고의 문제가 아니라 행동의 문제가 되었다. 덕은 평화로운 초월상태에서 생기지 않고 애쓰고 노동하고 생산하는 데서 생긴다.

알베르티가 젊었을 때의 사회현실과 일치하는 이 성취윤리는 그가 1434년 이후 이주한 중부와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사회에 즉각 수용되었다.

에우게니우스 4세의 교황청 법정과 함께 피렌체(메디치가의 영향력이 되살아나면서 그의 가족에 대한 추방령은 풀렸음)·볼로냐·페라라를 여행하면서 알베르티는 몇 차례 뜻이 맞고 결실이 있는 교류를 가졌다. 새 동료들에게 바친 라틴어와 모국어로 쓴 글은 노동·실천·생산활동 등 독특한 개념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제 친구들과 후원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기술적·실제적 문제들을 떠맡았다. 피렌체에서는 조각가 도나텔로와 건축가 브루넬레스키와 가깝게 사귀면서 그의 주요업적 가운데 하나인 화가의 원근법을 체계화했다.

1435년에 쓴 〈그림에 관하여〉에서는 판넬이나 벽의 2차원 평면 위에 3차원 장면을 그리는 방법을 처음으로 설명했다. 이 책은 이탈리아의 그림과 공공시설에 즉시 깊은 영향을 끼쳐 원근법적 르네상스 양식의 정확하고 널찍하며 기하학적으로 질서있는 공간을 낳았다.

그뒤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등 원근법 이론가들이 알베르티의 연구를 정교하게 가다듬었지만 그의 원리는 에우클레이데스가 평면기하학에서 이룩한 업적처럼 원근법에 관한 투영과학에서 기본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그가 피렌체의 우주구조론 학자인 파올로 토스카넬리와 맺은 교분은 실용과 과학에서 상당히 중요했다. 토스카넬리는 콜럼버스에게 첫 항해에 필요한 지도를 제공한 사람이었다.

알베르티는 지리학보다 천문학에서 그와 함께 연구한 듯하지만 두 학문은 당시 고대 천문학자이자 지리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의 글에서 재발견한 기하학적 지도제작의 관점과 방법에 의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원근법과 연관됨). 이 사상조류에 대한 알베르티의 분명한 기여는 지리학에 관한 짧은 논문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이 논문은 고대 이래 지리학 분야 최초의 저술이었다. 이 논문은 육지, 특히 로마 시를 조사하고 지도로 그리는 규칙을 설명했으며, 그림에 관한 이전 논문과 마찬가지로 큰 영향을 끼친 듯하다.

역사적 맥락을 추적하기는 힘들지만 알베르티가 묘사한 지형을 조사하고 지도를 제작하는 방법과 도구는 15세기 후반과 16세기초에 비롯된 도시와 육지를 그리는 새롭고 정확한 과학적 방법과 관련이 있다(측량).

1438년 알베르티가 처음에는 손님으로 환영받은 페라라의 에스테 궁정에서 마르케세 레오넬로는 그에게 또다른 분야, 즉 건축에 재능을 써보라고 권유(위임)했다.

알베르티가 고전적 건축양식을 되살리려고 애쓴 최초의 결실은 지금도 페라라에 서 있다. 이 작품은 레오넬로 아버지의 승마상을 떠받치고 있는 소형 개선문이다. 레오넬로는 대규모 인문주의 사업을 장려했을 뿐 아니라 알베르티에게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건축가이자 건축이론가인 비트루비우스의 고전문헌을 복원하도록 재촉함으로써 예술행위 양식도 장려했다.

알베르티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치밀하게 고대의 건축행위와 공학행위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1443년 교황청 법정과 함께 로마에 돌아올 때까지 이 연구를 계속했다. 니콜라우스 5세가 1447년 교황이 되었을 때 알베르티는 교황의 건축고문이 될 정도로 박식해졌다. 알베르티와 니콜라우스 5세의 협력으로 르네상스 시기 로마의 첫번째 대규모 건축계획이 수립되었고, 우선 성베드로 대성당과 바티칸 궁전을 복원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에스테 왕자가 죽었기 때문에 알베르티는 비트루비우스에 관해 오래 연구하여 얻은 기념할 만한 이론적 결실을 1452년 니콜라우스 5세에게 바쳤다. 이 결실이 〈건축론 De re aedificatoria〉이었다. 이 책은 비트루비우스를 복원한 문헌이라기보다 완전히 새로운 저작이었으며 그에게 '피렌체의 비트루비우스'라는 명예를 안겨주었다. 고대의 공학지식을 구체적으로 설명·개선했으며, 비례와 조화에 관한 완벽한 미학이론을 바탕으로 고전예술의 문법적 원리를 세웠기 때문에 이 책은 르네상스 건축의 성서가 되었다.

생애 후반기 20년 동안 알베르티는 자신의 건축 아이디어를 몇 개의 두드러진 건물로 실현했다.

산타마리아노벨라 교회의 정면부분과 팔라초 루첼라이는 모두 피렌체에서 상인 조반니 루첼라이를 위해 건축했는데 비례, 완벽한 측량감각 등으로 유명하다. 이 건축은 피렌체의 15세기 르네상스 건축양식을 창시한 브루넬레스키의 예술을 훌륭하게 계승한 것이었다. 그밖의 건물은 16세기, 특히 산페드로의 건축가 브라만테를 예견한 것이다.

리미니의 통치자인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의 위임을 받아 세운 템피오 말라테스티아노의 고전적 엄밀함, 만토바의 후작인 인문주의자 루도비코 곤차가를 위해 설계한 산안드레아 교회의 새로운 규모 감각 등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완벽한 양식을 보여준다. 알베르티는 르네상스 건축의 1급 이론가였을 뿐 아니라 그 위대한 실천가이기도 했다.

1450, 1460년대에 그는 건축에 열중했으며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와 궁정을 여행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로마와 피렌체는 여전히 그의 지적 고향이었으며 그는 이 도시들이 끊임없이 자극하는 관심사를 계속 탐구했다. 교황정부가 공화주의적 생활을 금지한 로마에서 그는 기술·과학 문제에 몰두했다. 교황청 사무국원들이 품은 몇 가지 문제에 대답하면서 그는 이 분야에서 매우 독창적인 저술 2권을 내놓았다.

하나는 최초의 이탈리아어 문법책으로, 이 책에서 그는 토스카나 지방어가 라틴어만큼이나 '규칙적'이고 따라서 문학에 충분히 사용될 수 있음을 밝히려 애썼다. 또 하나는 암호학에서 선구적인 책이다. 이 책에는 최초로 알려진 주파수표와 알베르티가 발명한 것으로 보이는 암호바퀴를 사용하여 기호를 적는 최초의 다표환자법(多表換字法)이 들어 있다.

교황 파울루스 2세가 명령한 기구축소 때문에 1464년 교황청 사무국에서 쫓겨났지만 알베르티는 교황의 서기로 계속 머문 친구의 부탁으로 교황권 확립에 중요한 이 연구를 계속했다. 모든 사업에서 알베르티는 너그러운 성격, 실천적 태도, 윤리적 신념 등을 결합하여 무언가 '쓸모있는' 일에 자신의 지적 재능을 사용했다. 그의 재능은 화가·건축가·지도제작자·천문학자·인문주의자·왕자·교황 등 그가 활동한 교양 있고 공손하며 예술을 좋아하는 집단뿐 아니라 그가 태어난 부르주아 집단, 도시대중에게도 쓸모 있었다.

모든 작품에서 그의 다재다능함은 피렌체의 '도시적 인문주의'를 규정하는 사회관과 항상 결합되어 있었다.

그가 마지막이자 가장 세련된 대화편을 피렌체에서 쓰고, 특히 이 대화편을 그 자신도 규칙을 가다듬는 데 기여한 명료한 토스카나 산문체로 쓴 것은 적절한 일이었다. 당시 피렌체의 공화주의는 시들해졌고 알베르티는 위풍당당한 로렌초 데 메디치가의 행정구역에 친지로 이주했지만, 〈위인에 관하여 De iciarchia〉는 그가 속한 초기 부르주아 시대의 공익정신적 인문주의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알베르티는 이 인문주의의 가장 중요한 선전가이며 그보다 더 적당한 인물은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의 대화편이야말로 피렌체의 인문주의가 달성한 이론과 실천의 통일과 그 자신이 몸소 보여준 성취와 공공봉사의 윤리를 크게 선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인에 관하여〉는 죽기 몇 해 전에야 완성되었다. 16세기 전기작가 조르조 바사리에 따르면 그는 '만족스럽고 차분하게' 죽었다.

평가

알베르티는 초기 르네상스 이탈리아 문화생활의 선구자였다.

그는 다재다능한 자질로 존경을 받았다. 이런 면에서는 반세기 뒤에 나온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비슷했으나 알베르티의 인물됨과 업적은 다재다능할 뿐 아니라 통일성을 특징으로 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천재성 덕분에 알베르티보다 더 많이 더 깊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시야가 '현대적'이고 단편적인 성질을 지녔음에 비해 알베르티는 사상과 생활 면에서 측량과 조화라는 르네상스의 이상을 완벽하게 실현했다. 그의 지적 추구와 예술적 추구는 동질적이었으며 그는 이론과 실천 사이의 독특한 균형을 이룩했다.

그리하여 사회·정치 사건들이 이 강력한 시대적 소망을 꺾기 시작한 바로 그 시점에 그는 이 소망을 실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