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오 5세

니콜라오 5세

다른 표기 언어 Nicolaus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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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397. 11. 15, 제노아 공화국 사르자나
사망 1455, 로마
국적 바티칸시티

요약 로마의 교황(1447~55 재위).
(영). Nicholas Ⅴ. 본명은 Tommaso Parentucelli.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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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외교와 교회개혁
  4. 건축과 인문주의 업적

개요

르네상스에 영향을 끼쳤고 바티칸 도서관을 설립했다.

교황이 된 직후 교황과 공의회 간의 대립으로 빚어진 분열을 종식시켰고, 1455년에는 교황령과 이탈리아에 평화를 회복시켰다. 성베드로 성당을 비롯한 로마의 많은 기념비적 건축물 복원작업을 시작했으며, 많은 예술가들과 학자들을 후원했다. 그러나 그가 실질적인 종교개혁을 추진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결국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초기생애

1397년에 태어나 9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후에 볼로냐에서 공부했으나 학비가 없어서 공부를 그만두어야 했다. 돈을 벌기 위해 부유하고 교양있는 피렌체의 두 가문에서 2년 동안 가정교사 생활을 했고, 이때 초기 르네상스와 접촉한 것이 그의 일생에 영향을 주었다. 대학으로 돌아가 학업을 마친 뒤 22세의 나이에 볼로냐의 추기경 대주교 니콜로 알베르가티의 집에 들어가 20년간 헌신적으로 그를 섬겼으며, 그가 외교적 사명을 띠고 유럽 전역을 다닐 때마다 함께 수행했다.

그의 장점과 경험을 인정한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알베르가티가 죽자 그를 볼로냐의 주교로 서품했으나(1444), 교황으로부터 독립하려고 반란을 일으킨 시민들이 막는 바람에 그 도시에 들어갈 수 없었다.

페라라-피렌체 공의회(1438~45)에서 그는 라틴 교회와 아르메니아·콥트·야코부스파 교회 사이의 교리상의 차이를 없애려는 목적으로 그 세교회와의 토론을 이끌었으며, 후에는 교황사절로서 여행했다. 1446년 프랑크푸르트 의회에서 독일 선제후들을 진정시키는 외교적 성과를 거둔 후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그뒤 불과 3개월 만인 1447년 3월 6일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이 된 뒤 그의 주요목표는 그의 말을 빌리면, "그리스도께서 나의 방어를 위해 주신 것, 즉 그의 십자가 이외에 어떤 무기도 사용하지 않고" 교회 및 정치적 평화를 위해 일하며, 교회를 개혁하고 로마를 건축과 예술의 측면에서 훌륭한 그리스도교 중심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외교와 교회개혁

니콜라오가 교황이 되었을 당시 전임 교황에 반항하던 바젤 공의회(1431~37)의 남은 무리들(그들은 교회가 교황이 아닌 공의회를 통해서 다스려져야 한다고 주장했음)과 그 공의회가 세운 대립교황 펠릭스 5세가 여전히 로마에 도전하고 있었다.

니콜라오는 요구는 거의 않고 양보를 많이 함으로써 그 분열을 종식시켰다. 또한 용병에 의존하지 않고 그들을 해산하는 대신, 전략 요충지에 자리잡은 성들을 엄선된 총독들에게 맡김으로써 교황령의 평화를 회복했다. 로마에서는 귀족들을 회유하고, 반항적인 시민들에게는 양보를 했다. 전임 교황이 파괴한 팔레스트리나 시의 재건을 허용했고, 볼로냐에 실질적 독립을 허용하여 평정을 가져왔으며, 폴란드에서는 양보를 함으로써 충성을 얻어냈다. 또한 프리드리히 3세에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 거행을 약속하여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아냈다.

그는 현상태의 유지를 통해 이탈리아를 평화롭게 하고, 십자군을 일으켜 투크에 대항하기 위해 베네치아·밀라노·피렌체·나폴리 사이에 1445년 2월 25일 그 조약을 로디 평화조약을 엄숙히 재가했다.

니콜라오는 성직매매와 성직자 축첩 행위 등 해묵은 악습을 규제하는 입법활동을 촉진하고, 주교들에게 각자의 교구를 지혜롭게 다스리도록 장려함으로써 교회를 도왔다. 독일에서는 유명한 학자·사상가인 쿠자의 추기경 니콜라오(1401~64)와,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학자·설교가인 카피스트라노의 성 요한(1386~1456)가 교회개혁을 위해 애쓴 결과 큰 성과를 거두었다.

신앙심을 고무하고 교황의 명망을 회복하기 위한 보다 폭넓은 조처는 1450년의 희년(禧年:Jubilee Year) 선포였다. 그 조처로 수많은 순례자들이 로마를 방문했으며, 비록 전염병이 발생하고 성 안젤로 다리 위에서 172명이 압사하는 끔찍한 비극이 일어나는 오점이 있긴 했지만, 그 계획 자체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건축과 인문주의 업적

교황 니콜라오는 로마의 르네상스에 끼친 영향 때문에 매우 유명하다.

유명한 박물관장·예술사가 외젠 뮌츠는, "르네상스 시대의 모든 교황들 중에서 건축에 관한 착상을 가장 많이 내놓은 교황이 바로 니콜라오이며, 후임 교황들은 그의 계획 가운데 일부를 실행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니콜라오는 성베드로 성당을 새로 건축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색인:성 베드로 대성전). 그러나 실제로는 다만 허물어져가고 있는 부분을 보수하고 바티칸 궁을 개조하여 그 주위에 성벽을 쌓는 일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원로원 관저와 같은 로마의 수많은 국보급 건축물을 복원하고 장식하는 공을 세웠지만, 새 건축물을 짓는 데 필요한 자재를 구하기 위해서 고대의 유적들을 훼손하기도 했다. 그가 일을 시작하자 로마는 금은세공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프랑스·벨기에·독일 등지에서 양탄자 제조업자들을 고용했고, 피렌체의 위대한 화가 프라 안젤리코(1387~1455) 같은 유명한 예술가들을 불러 건축물을 장식하게 했다.

니콜라오는 책에 대한 인문주의자적 정열을 갖고 있었다.

교황이 되기 전 외교 임무 여행 때마다 책을 구했고, 교황이 된 후에도 많은 돈을 들여 책을 사들였고 바티칸 도서관을 세웠다. 교황청은 인문주의자들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그중 일부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이교도에 가까운 시각을 갖고 있었다. 교황은 그들에게 고대 문서를 옮겨쓰고 번역하는 일을 시켰는데, 그 가운데는 호메로스·헤로도토스·투키디데스 등과 많은 그리스 교회 교부들의 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니콜라오는 말년을 살해 음모 때문에 우울하게 보냈다.

그는 그 주모자를 2번이나 살려주었지만, 1453년 3번째 똑같은 일을 당하자 주모자와 공모자들을 처형했다. 그해 동방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의 술탄에게 함락되었다. 니콜라오는 함대를 보내 포위된 콘스탄티노플을 구하려고 했지만 함대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종교적·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군사적 패배였다.

니콜라오는 다른 사람들이 무력으로 이룬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슬기로운 양보로 이루어낸 온화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15세기의 뛰어난 위인전 작가 베스파시아노 다 비스티카(1421~98)는 "그는 탐욕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가 어떤 것을 자신의 소유로 가지고 있었다면, 그 이유는 한 사람도 그것을 달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라고 썼다. 그는 이탈리아와 그외 지역의 평화를 위해서 외교 노력을 기울였고, 예술 특히 문학을 후원함으로써 이 분야에서 예전에 실추되었던 교회의 위신을 많이 회복시켰다.

그러나 그는 교회개혁을 추진하는 데는 실패해, 결국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