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랑제브

아우랑제브

다른 표기 언어 Aurangzeb 동의어 무히웃딘 무함마드, Muhi-ud-Din Muhammad, 알술탄 알아잠 왈 카칸 알카람 아불 무자파르 무휴딘 무하마드 아우랑제브 바하두르 알라기르 1세 파드샤 가지
요약 테이블
출생 1618. 11. 3(구력 10. 24), 인도 말와 도드
사망 1707. 3. 3(구력 2. 20), 인도
국적 무굴

요약 비록 그의 정책이 제국 해체의 원인이 되었지만, 그의 치세 동안 무굴 제국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일찍부터 군사와 통치에 자질을 보여 우즈베크·페르시아와의 싸움에서 군대를 지휘하여 공훈을 세웠다. 1657년 시작된 권력 투쟁에서 아우랑제브는 전략적·전술적인 군사능력, 무자비한 결단력으로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했다. 1680년까지는 힌두-이슬람교도 혼합 왕국의 유능한 이슬람 군주로, 주로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투르크인들로부터 북서부 지방을 방어하는 데 몰두했다. 1680년 이후부터는 호전적인 정통 수니파 이슬람교도 통치자로 변신했다. 그는 제국을 거의 반세기 동안 통치하며 먼 남방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마라타족과의 오랜 전쟁으로 재원이 고갈되고, 새로운 이슬람 정책은 힌두교도의 감정을 악화시켰다. 토지에 대한 재정압박은 행정체계를 흔들었다. 아우랑제브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제국은 붕괴되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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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인도의 황제

개요

비록 그의 정책이 제국 해체의 원인이 되었지만, 그의 치세 동안 무굴 제국은 최대 판도를 이루었다(인도사).

초기생애

샤 자한 황제와 뭄타즈 마할(이 황비를 위해 타지마할이 세워졌음)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진지한 품성에 신앙심 깊은 청년으로 성장했고, 당시의 정통 이슬람교를 믿어 무굴 황실의 고질이었던 주색탐닉을 멀리했다. 그는 일찍부터 군사와 통치에 자질을 보였다. 권력욕과 결부된 이러한 재능 때문에, 샤 자한의 후계자였고 사치스럽고 변덕스러운 성격인 맏형 다라 시코와 대적하게 되었다.

1636년부터 그는 많은 중요한 지위에 임명되었고 그 임무 수행에 두각을 나타냈다. 우즈베크·페르시아와의 싸움(1646~47)에서 군대를 지휘하여 공훈을 세웠다. 데칸 지방의 부왕(副王)을 2번 지내면서(1636~44, 1654~58) 데칸의 두 이슬람 왕국을 정복하여 종속국처럼 만들었다. 1657년 샤 자한이 위독하게 되자 두 형제간의 제위 계승을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어 싸움이 불가피한 것처럼 보였다. 샤 자한이 예기치 않게 회복되었지만 이때에는 이미 둘 다 이 문제에 너무나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권력 투쟁(1657~59)에서 아우랑제브는 전략적·전술적인 군사능력, 대단한 위장능력, 무자비한 결단력을 보여주었다.

1658년 5월 사무가르에서 다라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킨 그는 아버지가 세운 아그라 궁에 아버지를 유폐했다. 권력장악 과정에서 그는 이미 형제 하나를 죽이고 다시 두 형제와 아들 하나, 조카 하나를 처형했다. 이 전쟁은 전설이 되어 유럽에까지 알려졌다.

인도의 황제

아우랑제브의 치세는 거의 기간이 같은 두 시기로 나뉜다.

1680년까지의 첫시기에 그는 힌두-이슬람교도 혼합 왕국의 유능한 이슬람 군주였다. 무자비해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정열과 능력 때문에 두려워하면서 존경했다. 이 시기 동안 그는 주로 페르시아와 중앙 아시아 투르크인들로부터 북서부 지방을 방어하는 데 몰두했고, 그외에 수라트 대항구를 2번씩 약탈한(1664, 1670) 마라타 수장 시바지에게도 많은 신경을 썼다. 그는 증조할아버지인 악바르가 썼던 정복 수법을 사용했다.

즉 상대방을 쳐부순 다음 화해하고 그들에게 제국의 임무를 부여했다. 따라서 시바지를 패배시킨 뒤 화해를 위해 그를 아그라로 불렀고(1666) 제국의 직위를 주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시바지는 그뒤 데칸으로 도망하여 독립된 마라타 왕국을 세우고 군주가 되었다가 1680년 죽었다.

1680년경 이후부터 아우랑제브는 통치 태도와 정책을 바꿨다.

힌두-이슬람교도 혼합 왕국의 노련한 정치가인 그가 이슬람 국가의 독실한 통치자로 변신했다. 힌두교도들은 동료가 아니라 종속자가 되었다. 남부의 이슬람 왕국들과 마찬가지로 마라타족은 군사적 견제보다는 병합의 대상이 되었다. 첫번째 변화는 인두세인 지스야(jizya:악바르가 폐지했던 세금)가 1679년부터 비(非)이슬람교도들에게 다시 부과된 것이다.

그러자 1680~81년 아우랑제브의 셋째 아들 악바르가 지원하여 라지푸트 반란이 일어났다. 힌두교도들은 여전히 제국을 섬겼지만 열성적이지는 않았다. 비자푸르와 골콘다의 데칸 왕국들은 1686~87년에 정복되었지만 뒤이은 불안상태는 오랜 경제 위기를 더욱 재촉했고 이 위기는 마라타와의 전쟁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시바지의 아들 삼바지는 사로잡혀 1689년 처형되었고 왕국은 멸망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마라타족은 게릴라 전술을 채택했고 민중들의 동조 속에서 남인도 전역으로 퍼졌다. 아우랑제브는 남은 생애를 마라타 고지대 국가들의 요새들을 공략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아우랑제브는 남부에 있는 동안 북부지역을 이전처럼 강력하게 통제할 수 없었다.

통치력의 약화는 토지세입의 일부를 할당받는 무굴 제국의 관리들이 토지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켰기 때문에 더욱 가속화되었다. 농민의 불만은 펀자브 지방의 사트남파와 시크교도의 경우와 같은 종교운동 형태로 자주 나타났다. 1675년 아우랑제브는 이슬람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시크교 구루(정신적 지도자) 테그 바하두르를 잡아들여 처형했다. 후계 구루들은 아우랑제브의 나머지 치세 동안 공개적으로 저항을 계속했다.

이것은 현재까지 지속되는 시크교도와 이슬람교도 간 불화의 첫 출발점이었다. 자트족의 반란과 같은 여타 농민반란들은 대체로 비종교적인 성격이었다.

일반적으로 그는 호전적인 정통 수니파 이슬람교도로서 통치했고 도덕 검열관, 즉 무흐타시브(muḥtasib) 들에 의해 강요되는 엄격한 법령들을 점차 시행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주화에 새겨진 모든 이슬람교 신앙고백 구절은 이교도의 모독을 방지하기 위하여 제거했으며, 조정의 신하들에게는 힌두식 인사법을 금지했다.

힌두교의 우상·사원·성지는 마구 파괴되었다. 그는 제국을 거의 반세기 동안 유지했으며 나아가 탄조르(탄자부르)·트리치노폴리(티루치치라팔리)와 같은 먼 남방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찬란한 외양의 뒷면에는 심각한 취약점이 숨어 있었다. 마라타 소탕작전은 제국의 재원을 지속적으로 고갈시켰고, 시크교도와 자트족의 호전성은 제국 북부에 어두운 전조를 드리웠다. 새로운 이슬람 정책은 힌두교도의 감정을 손상시켰고 라지푸트족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다.

토지에 대한 재정압박은 전체 행정체계를 왜곡했다. 거의 49년 동안 통치한 뒤 아우랑제브가 죽었을 때, 제국은 수많은 치명적인 문제에 직면해 빈사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의 아들이 이러한 문제에 대처하지 못하자 제국은 18세기 중반에 붕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