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바지

시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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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테이블
출생 1630. 2. 19/1627. 4, 인도 푸나 시브나
사망 1680. 4. 3, 라지가르
국적 인도

요약 인도의 마라타 왕국을 창건한 왕(1674~80 재위).
Shivājī라고도 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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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와 원정
  3. 아그라 탈출
  4. 독립 왕국의 창건

개요

마라타 왕국은 종교관용정책을 폈고 브라만 계급, 마라타족, 프라부를 기능적으로 통합함으로써 국가안정의 기틀을 닦았다.

초기생애와 원정

시바지는 명망 높은 귀족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당시 인도는 이슬람교도 지배 아래 있었다. 북부는 무굴 제국이, 남부는 비자푸르와 골쿤다의 술탄국이 있었다. 세 왕국은 모두 정복왕조였기 때문에 백성들에 대해 아무런 의무감을 갖지 않고 있었다. 시바지 가문의 세습 영지는 비자푸르 술탄국 영내의 데칸 지방에 있었으므로, 시바지는 힌두교도에 대한 이슬람교도의 압제와 종교적 박해가 얼마나 가혹한지를 어려서부터 목격했다. 그는 16세 때 이미 자기 자신을 힌두교도의 자유라는 대의를 이루기 위해 신이 점지해준 사람으로 믿었으며 이러한 신념을 일생 동안 간직했다.

그는 추종자를 규합하여 1655년경부터 비교적 약한 비자푸르의 변경지방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술탄 편에 붙은 몇몇 영향력 있는 힌두교도를 제거했다.

대담성과 군사기술 그리고 힌두교도를 억압하는 자들에 대한 단호함 때문에 그는 백성들의 인심을 얻었다. 술탄국들에 대한 시바지의 공격은 점차 대담해졌고, 그를 징벌하러 나선 몇 차례의 소규모 원정대는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1659년 비자푸르의 술탄이 아프잘 칸 휘하의 2만 명의 군대를 파견하자 시바지는 위세에 눌린 체하면서 술탄의 군대를 험준한 산악지대로 깊숙이 끌어들였다.

그리고 저자세로 간청하여 아프잘 칸을 회담장으로 유인한 다음 살해해버렸다. 이와 동시에 잠복해 있던 선발부대가 방심한 비자푸르군을 급습하여 궤멸시켰다. 밤 사이에 시바지는 노획한 비자푸르군의 군마·소총·대포로 무장한 만만찮은 군대를 거느리게 되었다.

시바지의 급속한 세력부상에 놀란 무굴 제국의 황제 아우랑제브는 남부의 부왕에게 그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시바지는 이에 대항하여 부왕의 야영지 내에서 과감하게 야간 기습공격을 벌였다. 이러한 역습에 당황한 부왕은 부대를 철수시켰다. 이 전투에서 부왕은 아들뿐만 아니라 그의 한쪽 손가락을 잃었다. 시바지는 무굴 제국을 더욱 자극하려는 듯 부유한 해안도시 수라트를 공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탈취해갔다. 이러한 놀라운 도전행위를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게 되자 아우랑제브는 무굴 제국에서 가장 탁월한 장군인 미르자 라자 자이 싱에게 10만 명의 대군을 맡겨 징벌에 나서게 했다.

자이 싱의 강력한 불굴의 추진력과 함께 대규모 부대가 주는 위압 때문에 시바지는 곧 화평을 간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들과 함께 아그라에 있는 아우랑제브의 궁전으로 가서 공식적으로 무굴의 봉신이 되었다. 고향에서 수백㎞ 떨어진 아그라에서 시바지와 그의 아들은 처형의 위협을 받으면서 연금생활을 했다.

아그라 탈출

불요불굴의 의지를 가졌던 시바지는 병이 난 체하고 참회의 표시로 사탕바구니를 보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했다.

1666년 8월 17일 시바지 부자는 이 바구니에 숨어 감시병을 따돌리고 빠져나왔다. 이 탈출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그의 생애에서도 가장 박진감 넘치는 일화였지만 인도 역사의 행로를 바꾸어놓은 사건이기도 했다. 추종자들은 지도자의 귀환을 열렬히 환영했고, 2년도 채 못 되어 그는 잃었던 영토를 모두 회복했을 뿐 아니라 더 넓히기까지 했다. 무굴 왕조의 영역에서 공물을 거두어들였고 무굴의 부유한 상업도시들을 약탈했다.

군대조직을 재정비하고 백성의 복리를 위해 개혁을 단행했다. 이미 인도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진출하던 포르투갈과 영국 상인들로부터 시사를 받아 해군을 창설하기 시작했다. 시바지는 근세 인도 군주 중에서 해군이 방위뿐만 아니라 무역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아우랑제브는 시바지의 갑작스런 재기에 자극된 듯 힌두교도를 더욱 심하게 박해했다.

힌두교도에게 인두세를 부과하고 강제적인 개종을 묵인했으며, 힌두 사원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모스크를 세웠다.

독립 왕국의 창건

1674년 여름 화려한 팡파르가 연주되는 가운데 시바지는 독립 군주로 즉위했다.

억압받던 힌두교도 대부분이 그를 지도자로 여기고 모여들었다. 시바지는 8명의 대신으로 내각을 구성하고 6년 동안 통치했다. 스스로 힌두교의 보호자라고 자부하는 독실한 힌두교도였던 그는 강제로 이슬람교로 개종당한 그의 친척 2명에게 다시 개종하라고 명령했다. 이것은 개종을 허용하지 않는 힌두교의 전통을 깨뜨린 것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는 대중들에게 강제로 그들의 신조를 강요했지만, 시바지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신앙을 존중했고 그들의 교단을 보호해주었다.

많은 이슬람교도가 공무원으로 기용되었다. 즉위식이 끝난 뒤 가장 중요한 전쟁이 인도 남부에서 있었다. 이때 시바지는 술탄들과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고 인도 대륙 전체에 지배권을 확립하려는 무굴 제국의 거대한 계획을 무산시켰다.

시바지는 여러 아내와 두 아들을 두었다. 그의 말년은 맏아들의 배반으로 암울했다. 그의 맏아들은 한때 무굴 제국으로 도망갔다가 간신히 되돌아왔다. 극렬한 궁정 암투와 대신들 사이의 불화에다 외적들로부터 왕국을 지켜야 하는 중압감은 시바지의 죽음을 재촉했다.

영국의 정치가 매콜리가 '시바지 대왕'이라고 불렀던 그는, 자신이 건설한 왕국의 수도 라지가르의 산중 요새에서 1680년 4월 병고 끝에 숨졌다. 시바지는 수세기 동안 비참한 농노의 처지를 감수하면서 빈사상태에 빠졌던 사람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었고 그들을 거대한 무굴 제국의 통치자 아우랑제브에게 대항하도록 이끌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종교 만행으로 얼룩졌던 한 시대와 현장에서 진정한 종교적 관용을 실천한 유일한 인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