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교

시크교

다른 표기 언어 Sikhism

요약 15세기말에 펀자브에서 나나크가 창설했다. 〈아디 그란트〉를 성전으로 삼는다. 이슬람 신앙과 힌두교가 혼합된 것으로서 그 교리는 펀자브어로 간단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다. 신은 오직 하나이며 우상이나 신상을 만들지 않는다.
19세기 초 최초로 시크 국가를 형성했으나 영국령 인도에 병합된 후 정치적 당파운동을 지속하였다. 영국이 인도 지배를 포기한 후 대부분의 시크교 난민들이 펀자브에 정착한 후 펀자브를 인도의 곡창지대로 만들었으며 인도 경제계와 군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시크교의 독립을 요구하는 시크 과격파와 인도 정부 간에 폭력사태가 지속되었고 1984년 총리 인디라 간디를 암살함으로써 절정을 이루었다.

나나크(Nanak)
나나크(Nanak)

15세기말에 펀자브에서 나나크가 창설했다.

시크교도들은 자신들을 10구루인 나나크와 그뒤 9명의 후계자들의 제자로 여긴다.

초기 구루들의 저작은 제5대 구루인 아르준(1563~1606)이 〈아디 그란트Adi Granth〉로 편집하여 시크교의 성전(聖典)이 되었다. 아르준이 무굴 황제에 의해 처형된 후 시크교도들은 평화주의자에서 호전적으로 변신해갔고, 이러한 경향은 제10대 구루인 고빈드 라이(1666~1708) 때 최고조에 달했다. 현재까지도 시크 교단에서 가장 주요한 역할을 하는 할사('순수')라는 결사(結社)를 만든 사람이 바로 이 고빈드 라이이다.

고빈드 싱(Gobind Singh)
고빈드 싱(Gobind Singh)

할사의 단원들은 이름 뒤에 싱('사자') 또는 카우르('암사자')라는 명칭을 붙이고 엄격한 규율을 지킨다. 고빈드 싱, 즉 고빈드 라이는 생전에 4명의 아들을 모두 잃어 더이상 구루를 승계시키지 않은 대신 〈아디 그란트〉(또는 〈그란트 사히브〉)에 영원한 구루의 지위를 부여했다. 그리고 자신의 저작을 모아 〈다삼 그란트Dasam Granth〉 가 편찬되도록 했다.

남부 펀자브의 무슬림 지주들을 거의 섬멸하고 약 8년간에 걸쳐 지배에 저항한 뒤 고빈드 싱의 후예들은 무슬림 통치자들에게 잔혹한 박해를 받았다(이슬람교). 뒤이어 18세기 중반에 페르시아인과 아프간인이 계속해서 침략해 들어왔기 때문에 상황은 다소 호전되었다.

침략자들의 대상 지역에서 벗어나 있던 시크교도들은 각각 고유의 작전 영역을 갖는 12개의 미슬(misl), 즉 군단을 조직했다. 이 미슬들은 일련의 요새를 세우고 도시와 촌락에서 방위세를 징수했다. 미슬들이 란지트 싱(1780~1839)에 의해 통합되면서 19세기초 시크 국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란지트 싱이 죽자 이 국가는 급속히 붕괴되어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한 영국은 펀자브 국경지대에 군대를 배치했고 이어 영국사에서 시크 전쟁으로 알려진 전쟁이 1845~46, 1848~49년에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시크인들이 패하고 펀자브는 영국령 인도에 병합되었다.

영국 통치기의 시크교는 다소 폭력성을 띤 정치적 당파운동으로 특징지어진다. 영국 통치자들의 후원을 받았고 유럽인들의 시크교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싱사바 운동은 본질적으로 교육운동이며 문예운동이었다.

많은 시크인들이 영국군 내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던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영국과 시크인들이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1919년 암리차르에서 영국이 시민들을 대학살한 사건 이후 관계가 심각히 악화되었다(암리차르 대학살). 영국이 인도 지배를 포기한 후 인도는 분할되어 펀자브의 서쪽은 파키스탄 영토가 되고 동쪽은 인도 영토가 되었다. 파키스탄령에 살던 시크교도들(약 250만 명)은 인도로 옮겨와 이번에는 동펀자브에 살고 있던 이슬람교도들을 쫓아냈다.

이 인구의 대이동은 잔혹한 폭력을 수반하여 막대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대부분의 시크교 난민들은 동펀자브에 정착했고 파키스탄과 국경을 접한 많은 지역에서 시크교도들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후 수십 년에 걸쳐 시크교도들은 펀자브를 생산성 높은 농업지역으로 만들어 인도의 곡창지대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시크교도들은 인도 경제계와 군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들이 거둔 성공에 용기를 얻어 일부 시크교도들은 인도 대연방 내의 자치를 추구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펀자브에 독립적인 시크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시크 과격파와 인도 정부 간에 폭력사태가 야기되었고 이것은 인도 군대가 암리차르에 있는 시크교 성전(聖殿)인 하리만디르(황금 사원)를 급습하고(1984년 6월), 시크교도가 총리인 인디라 간디를 암살함(1984년 10월)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이듬해 시크 사회는 시크 과격파들의 테러 행위로 분열되었고 인도 정부는 계속해서 시크과격파들을 억압했다.

시크교는 이슬람 신앙과 힌두교가 혼합된 것으로서 그 교리는 펀자브어로 간단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다.

신은 오직 하나이며 우상이나 신상(神像)을 만들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영혼이 윤회에 의해 여러 가지 모습으로 태어남을 거쳐 궁극적으로 신과 합일될 때까지 신의 명령에 따르는 선한 생활과 기도, 특히 신의 이름을 되풀이하여 부름으로써, 이것을 통해 신을 섬겨야 한다. 시크교에는 사제직이 따로 없고 남녀의 어른은 누구나 종교 의식을 집전할 자격이 있다. 의식(儀式)은 주로 〈그란트 Granth〉를 읽는 것이다. 예배 장소는 '구르드와라'라고 불리는데, 대표적인 예가 구루 아르준이 처음 세우고 몇 차례 훼손되었다가 마지막으로 란지트 싱이 재건한 하리만디르이다.

시크교(Sikhism)
시크교(Sikhism)

시크교도들은 구르드와라에서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전통적인 힌두 축제일을 지키는 외에도 일부 구루의 생일 등 그들만의 성일(聖日)에 〈그란트〉를 들고 거리를 행진함으로써 그 날을 기념한다. 시크 소년·소녀들은 사춘기가 되면 할사에 입문하는 입문식을 거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