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토

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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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테이블
출생 1496/97경, 스페인 바다호스 헤레스데로스카바예로스
사망 1542. 5. 21, 미시시피 강가(지금의 미국 루이지애나)
국적 스페인

요약 스페인의 탐험가·정복자.
Hernando는 Fernando라고도 씀.

목차

접기
  1. 개요
  2. 청년시절
  3. 북아메리카 남부 탐험

개요

중앙 아메리카와 페루 정복에 참여했고 북아메리카 남동부 지역 탐험중 미시시피 강을 발견했다.

청년시절

헤레스데로스카바예로스에 있는 가문의 저택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부모는 그가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으나 10대였던 1514년에 이미 아버지에게 서인도 제도로 가기를 원한다는 뜻을 밝히고 살라망카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는 대신 세비야로 갔고, 그곳에서 그는 바깥세상을 돌아다니는 모험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당시 그는 젊은 나이였지만 대단한 열정을 가진데다가 기병으로서 용맹을 떨친 덕분에 1514년 페드로 아리아스 다빌라 휘하의 서인도 제도 원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라틴아메리카). 그는 곧 파나마에서 무역업자이자 탐험가로 두각을 나타냈는데 교묘한 재간과 과감성을 발휘해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그는 에르난 폰세 데 레온과 프란시스코 캄파뇬과의 동업에 성공한 뒤 니카라과와 파나마 지협을 무대로 무역을 해 1520년에는 이미 상당한 재산가가 되었다. 1524~27년 니카라과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경쟁에서 가장 강력한 적수였던 힐 곤살레스 데 아빌라를 제압하고 인디언 노예무역을 더욱 확장했다.

1530년에는 태평양 연안의 다리엔 남쪽(지금의 콜롬비아 북서부)에 금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실제로 조사해보기 위해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2척의 배를 빌려주었다.

그를 후원하던 다빌라가 1531년에 죽고 피사로의 원정으로 금이 나온다는 보고가 사실로 확인되자, 그는 새로운 사업에 끼어들었다. 피사로는 배를 빌려준 보답으로 소토를 자기의 수석부관으로 임명했고, 다음해에는 페루 정복에 나섰다. 이때 기병대장을 맡아 스페인 군대가 카하마르카에서 잉카 군을 무찌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또한 잉카 제국 황제 아타우알파와 접촉한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스페인 군대가 아타우알파를 사로잡은 데 이어 소토는 잉카의 수도 쿠스코를 함락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그는 황제의 친구이자 보호자가 되었다. 그러나 피사로는 아타우알파가 잉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두려워해, 잉카 사람들이 황제가 풀려나는 몸값으로 엄청난 금을 모았는데도 황제를 처형시켜버렸다. 피사로의 일 처리방식에 불만을 느끼고 총독직을 갈망하던 소토는 1536년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그가 페루를 약탈해 번 재산은 피사로의 절반도 안 되었지만 정복자로서 귀환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기에 충분했다. 스페인에 돌아온 그는 다빌라의 딸 이사벨 데 보바디요와 결혼하고, 유명한 산티아고 기사단에 들어갔다.

그러나 스페인에 있으면서 점점 마음이 들뜬 그는 1537년 아마존 강 분지에 대한 특권과 함께 에콰도르 정복 특별허가를 청원했다. 하지만 스페인 왕은 지금의 플로리다 지역 정복을 그에게 맡기는 동시에 쿠바 총독으로 임명했다.

북아메리카 남부 탐험

1538년 4월 소토는 10척의 배와 700명의 부하를 이끌고 산루카르데바라메다 항에서 돛을 올렸다.

원정군은 쿠바에 잠깐 기착한 뒤 1539년 5월 지금의 탬파 만과 샬럿 항구 사이를 거쳐 플로리다 해안에 상륙했다. 소토는 지금의 플로리다 주 탤러해시 근처에 있는 작은 인디언 마을 애팔래치에서 겨울을 난 뒤, 행군 도중 사로잡은 원주민의 안내를 받아 북쪽으로 올라가 오늘날의 조지아를 지나 서쪽으로 길을 돌려 캐롤라이나와 테네시를 지나갔다. 그는 금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지금의 동부 조지아 주의 코피타체키라는 곳에서 갖가지 값진 진주들을 수집했다.

소토와 그의 부하들은 테네시 남동부에 있는 룩아웃 산 근처에서 남쪽으로 길을 돌려 앨라배마로 들어갔고, 그들이 타고 왔던 배들이 기다리고 있을 모빌 만(루이지애나 주)으로 향했다. 그러나 근처에 있는 인디언의 요새도시인 모빌라에서 인디언들이 부족연맹을 이루어 1540년 10월에 스페인 군대를 공격했다.

그 싸움에서 소토의 병력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모든 진주와 대부분의 장비를 잃었다.

1개월 동안의 휴식 후 다시 북쪽으로 길을 돌려 방향을 바꿔 보물을 찾아 내륙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앨라배마를 거쳐 북서쪽으로 갔다가 미시시피를 거쳐 서쪽으로 나아갔던 소토와 부하들은 인디언에게 무차별 공격을 당했다. 1541년 5월 21일 스페인 군대는 지금의 테네시 주에 있는 멤피스의 남쪽에서 '물의 아버지'인 미시시피 강을 처음 보았다.

그들은 그 강을 건너 계속 나아가 아칸소와 루이지애나를 지나갔다. 그뒤 1542년초에 소토는 다시 미시시피 강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루이지애나에서 열병에 걸려 죽었고 동료들은 그의 시신을 미시시피 강가에 묻었다. 소토가 후계자로 지명한 루이스 데 모스코소는 남아 있는 원정군(원래 인원의 절반가량)을 이끌고 뗏목으로 미시시피 강을 따라 내려가 1543년 멕시코에 다다랐다.

소토는 플로리다 원정에서 자신의 목적을 거의 이루지 못했고, 정복자로서 에르난 코르테스나 피사로에 맞먹는 명성을 한번도 누리지 못했다.

그는 인디언들을 잔인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비도덕적으로 다루었고 조직이나 통치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소토는 스페인 정복자들 가운데 남·북 아메리카 양쪽에서 활약한 유일한 인물이었고, 그의 발견 덕분에 신세계의 지리에 대해 그때까지 사람들이 알고 있던 지식을 크게 늘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