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리든

셰리든

다른 표기 언어 Richard Brinsley (Butler) Sheridan
요약 테이블
출생 1751년 11월 4일
사망 1816년 7월 7일
국적 영국

요약 아일랜드 태생 영국의 극작가, 흥행주, 웅변가, 휘그당 정치인.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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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성장기
  3. 연극활동
  4. 정치활동
  5. 말년

개요

풍속희극사에서 17세기말과 19세기의 오스카 와일드를 연결짓는 역할을 했으며, 특히 〈험담꾼들 The School for Scandal〉(1777)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성장기

셰리든은 토머스와 프랜시스 셰리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토머스 셰리든은 조너선 스위프트의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였고, 아버지는 발음사전의 편찬자로서 웅변술을 매우 중시하는 공공교육안을 옹호했으며, 어머니는 극작가로서 상당히 알려진 사람이었다. 가족이 런던으로 이사한 뒤 셰리든은 단 한 번도 아일랜드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1762~68년에 해로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770년 가족과 함께 바스로 이사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당시 옥스퍼드에 있던 학교친구와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으며 함께 소극을 썼는데, 이 작품은 〈익시온 Ixion〉이라 불리기도 하고 〈주피터 Jupiter〉라 불리기도 했다.

그들은 5세기의 작가 아리스타에네투스가 플라톤·루키아노스·플루타르크의 작품에서 사랑 이야기를 뽑아 2권으로 엮은 서간체 작품을 운문형식으로 공동 각색하기도 했다(1771). 셰리든의 시 〈바스의 리도토 The Ridotto of Bath〉와 〈클리오의 항의 Clio's Protest〉도 이 시기에 쓴 작품이었다.

셰리든은 바스에서 엘리자베스 앤 린리(1754~92)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 토머스가 지휘하는 음악회와 축제 행사에서 아름다운 소프라노 목소리로 관중들을 즐겁게 했다.

그녀는 웨일스의 대지주 토머스 매슈스의 달갑지 않은 호의를 피하기 위해 프랑스의 수녀원에 피신하기로 결심했다. 셰리든은 1772년 3월 릴까지 그녀와 동행한 뒤, 돌아와 매슈스와 2차례의 결투를 치렀는데, 그해 5월의 런던 결투에서는 매슈스의 무기를 빼앗았으나, 7월 배스의 결투에서는 부상을 입었다.

한편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와 함께 집에 돌아와 있었고, 셰리든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에식스의 월섬 수도원에 들어가 학업에 전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1773년 4월 미들 사원에 들어갔으나 1주일 만에 아버지와 의절한 뒤 법률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런던의 매릴르번 교회에서 엘리자베스와 결혼식을 올렸다.

연극활동

셰리든은 결혼한 뒤 생계수단으로 연극을 하기 시작했다.

1775년 1월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 그의 희극 〈연적 The Rivals〉이 초연되었다. 일반 작품보다 1시간 더 길게 상연된 이 작품은 루시어스 오트리거 경 역을 맡은 배우의 공격적인 성향과 미숙한 연기 때문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나, 내용을 과감하게 수정하고 루시어스 경 역을 맡은 배우를 교체해 11일 뒤에 2번째로 무대에 올렸을 때에는 즉석에서 갈채를 받았다. 장면과 등장인물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셰리든이 풍부한 재치를 발휘해 신선함을 불어넣었으며, 극 전체는 그의 극적효과에 대한 뛰어난 감각을 보여주었다.

몇몇 등장인물들이 부리는 허세에 대한 유해하지 않은 조소가 이 작품의 특징이다. 극의 흐름을 늦추는 말의 우스꽝스런 오용조차도 맬라프롭 부인이라는 등장인물을 제대로 희화하는 느낌을 준다.

루시우스 경 역을 맡은 로렌스 클린치의 연기력도 이 작품의 성공에 한몫 했다. 셰리든은 1775년 5월의 클린치를 위한 자선공연용으로 유쾌하고 짤막한 소극 〈성 패트릭의 날 : 교활한 중위 St. Patrick's Day, Or, The Scheming Lieutenant〉를 써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

케케묵은 소재를 가지고도 줄거리를 재미있게 엮는 그의 능력은 이듬해 11월에 공연되었던 〈듀에너 The Duenna〉에서도 나타난다. 이 발라드풍의 가극은 전체적으로 인물의 성격 변화는 없지만 흥미 있는 줄거리와 매력적인 가사, 그리고 장인 토머스 린리와 아들이 연주하는 음악 덕택에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이 작품은 당시 62회로 최장기 공연을 기록했던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 The Beggar's Opera〉(1728)를 능가하는 75회의 공연기록을 세웠고 오늘날에도 공연되고 있다.

이리하여 셰리든은 1년도 못 되어 그당시 최고의 극작가로 부상하게 되었다.

드루어리 레인 극장의 소유자이자 경영자로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을 찾던 데이비드 개릭은 셰리든에게서 활동력과 명민함, 참된 연극적 감각을 갖춘 젊은이의 모습을 보았다.

의사로 성공한 제임스 포드라는 인물은 개릭의 판단에 동의하여 극장에 대한 투자액을 늘렸다. 1776년에 셰리든과 린리는 포드와 손잡고 드루어리 레인 극장 지분의 절반을 소유하는 동업자가 되었다. 2년 뒤에 그들은 개릭의 동업자 윌로비 레이시에게서 극장의 나머지 지분을 샀다. 셰리든이 이 사업에 겨우 1,300파운드를 투자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이 거래가 성립된 이유는 셰리든이 드루어리 레인 극장을 감독하면 번창할 것이라고 믿고서 개릭과 포드가 저당을 잡히면서까지 그를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셰리든의 연극에 대한 관심은 얼마 가지 않아 다소 변덕스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루어리 레인 극장에서 윌리엄 콩그리브의 작품이 다시 공연된 데 이어 왕정복고시대의 희극을 다시금 새롭게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은 셰리든 덕분이었다. 1777년 2월 밴브루의 〈타락 The Relapse〉(1696)을 각색한 작품 〈스카버러 여행 A Trip to Scarborough〉을 무대에 올려 각색에 대한 그의 재능을 다시금 입증했다. 그는 원작의 산만한 줄거리를 말끔하게 다듬고 상스러운 대사를 많이 삭제했지만, 그결과는 실망적이었다.

이는 아마도 원작이 가지고 있던 맛을 많이 상실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셰리든이 왕정복고시대의 극작가들로부터 받은 영향은 1777년 5월 드루어리레인 극장에서 공연된 〈험담꾼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이 작품으로 '현대판 콩그리브'라는 칭호를 얻었다. 〈험담꾼들〉의 등장인물들은 전체적으로 풍자적 기지가 매우 뛰어나다는 점에서 콩그리브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아주 유사해 한 인물이 다른 인물과 언제나 구별되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조지프 서피스와 티즐 부인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에는 상류사회의 성적 자유에 한편으로는 놀라고 한편으로는 즐거워하는 한 시골 소녀를 묘사하기 위해 여러 명의 왕정복고시대 모델들(예를 들면 위처리의 〈시골 아낙 The Country-Wife〉에 등장하는 핀치와이프 부인과 밴브루의 〈타락〉에 등장하는 호이던 양)이 나온다. 그러나 셰리든은 당시의 더 세련된 취향에 맞추느라 티즐 부인을 온화하게 묘사했다.

순결함과 세련됨이 결합된 이 배역은 비길 데 없이 탁월하게 무대에 올려졌다. 그밖의 배역들 역시 극단의 배우들에 적합하도록 섬세하게 배려해서 씌어졌으며, 작품 전체는 지성과 상상력을 갖춘 대성공작이었다. 허세와 자만심을 신랄하게 조소한 이 작품은 흔히 영국 최고의 풍속희극으로 평가된다. 〈험담꾼들〉의 무대에서 그 우수성이 완벽하게 입증된 셰리든의 무대효과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은 무대의 관행에 대한 애교 있는 풍자극 〈비평가 The Critic〉에서 다시 발휘되었다.

이 작품은 1779년 10월에 초연된 이래로 그 원형이었던 버킹엄 공작 2세 조지 빌리어스의 〈공연 연습 The Rehearsal〉(1671)보다 훨씬 재미있는 작품이라 평가되어왔다. 셰리든도 이 작품의 1막을 그가 쓴 작품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여겼다. 비록 퍼프는 판에 박힌 인물이지만, 프레트풀 플래지어리 경은 극작가 리처드 컴벌런드에 대한 풍자일 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우쭐대는 작가들의 전형이다.

정치활동

셰리든은 계속해서 각색작업을 하고 드루어리 레인에서 즉석으로 흥행 쇼를 무대에 올렸으나, 조감독들이 계속 연출을 대신해줌에 따라 그는 정치에 점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유일한 후기 장편극 〈피자로 Pizarro〉(1799)는 페루 정복을 소재로 한 독일 희곡을 각색한 것으로, 예술적 가치는 떨어지지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멜로드라마로 인기가 높았다. 셰리든은 1780년 9월에 스태퍼드를 대표하는 하원의원이 되었고, 외무부 차관(1782)을 거쳐 재무장관이 되었다(1783). 말년에는 해군 재무부장(1806~07)과 추밀고문관을 지냈다.

그는 의회에서 32년 동안 여당 토리당에 대립하는 소수당인 휘그당 당원으로 일했다. 비판적 통찰력과 능숙한 언어구사력으로 열변을 토했는데, 그의 뛰어난 웅변은 실패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인도 총독 워런 헤이스팅스를 탄핵하는 연설에 가장 탁월하게 발휘되었다.

그는 당대에 가장 설득력 있는 웅변가로 인정을 받았지만 믿을 수 없는 계략가로 여겨졌기 때문에 의회에서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이런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조지 3세가 일시적으로 정신이상이 된 후 뒤이은 섭정 위기(1788~89) 동안 그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방종한 황태자(뒤에 조지 4세가 됨)의 고문으로 일한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셰리든은 단지 황태자가 확실한 후계자이기 때문에, 온갖 왕권을 누리며 섭정하는 것을 찬성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황태자를 부추겼다.

당시 이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이것은 찰스 제임스 폭스와 그의 동료들이 정권을 잡으려고 수상 윌리엄 핏을 축출하려는 운동으로 보였다. 셰리든이 신임을 얻지 못한 또다른 이유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에드먼드 버크의 뿌리깊은 적대감에 대해 버크와 휘그당 안에서 벌인 언쟁(1791~93)에서 그가 취한 입장 때문이었다. 셰리든은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공공연하게 변호할 만한 용기가 있는 몇 안 되는 의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사실 그는 개인적인 입장을 취하기 좋아했다. 그는 프랑스 국민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정부형태를 택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폭스를 지지했지만, 일단 프랑스가 전쟁준비를 갖추고 영국의 안전을 위협했을 때는 폭스와 결별했다. 그는 영국 해군의 생활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폭도들을 비난할 때 토리당을 지지하기도 했다(1797). 셰리든은 휘그당원이면서도 나중에 시드마우스 자작 1세가 된 수상 헨리 애딩턴이 이끄는 토리당 정부를 지지하기도 해서 폭스에게 심한 혐오감을 안겨주었다(1801~04). 1806년 11월 셰리든은 비록 그가 원하던 대로 휘그당의 당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폭스의 뒤를 이어 웨스트민스터 대표의원이 되었으나 1807년 5월에 의원직을 잃었다.

그때 황태자가 일체스터의 '제한 선거구' 대표의원직을 그에게 주었는데 두 사람은 가톨릭 해방에 대한 입장이 달랐기 때문에 황태자의 총애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셰리든을 괴롭혔다. 가톨릭 해방을 지지하기로 결심한 그는 1812년에 다시 스태퍼드 의원선거에 출마했으나, 이전에 자신을 지지해준 사람들에게 그들이 기대하는 만큼 보답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낙선하고 말았다.

말년

1809년 2월에 일어난 화재로 드루어리 레인 극장이 타버린 데다가 자신의 낭비벽과 일을 뒤로 미루는 습관 때문에 그는 심각한 재정난을 겪게 되었다.

의원직과 극장 수익을 모두 잃은 그는 많은 채권자들에게 시달리게 되었다. 게다가 자신의 심장병과 2번째 부인 에스터 제인 오글의 암 등 그밖의 걱정거리로 셰리든은 괴로운 말년을 보냈다. 첫 아내 엘리자베스가 죽은 지 3년 뒤인 1795년 4월에 결혼한 오글은 윈체스터의 학장 딸이었다. 임종 때까지 집행리(執行吏)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던 셰리든은 시인 바이런 경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었다.

그가 죽자 바이런은 〈명예로운 셰리든의 죽음에 부치는 애도시 Monody on the Death of the Right Honourable R. B. Sheridan〉(1816)를 썼는데, 이 시는 드루어리 레인 극장이 재건되었을 때 낭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