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브라우닝

로버트 브라우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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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테이블
출생 1812. 5. 7, 런던
사망 1889. 12. 12, 베네치아
국적 영국

요약 탁월한 극적 독백과 심리묘사로 유명하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로마의 살인재판에 대해 쓴 시집 〈반지와 책〉(12권, 1868~69)이다. 이 시집은 1698년 로마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재판과정을 소재로 했다. 그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나오자마자 갈채를 받아 로버트 브라우닝은 당시 가장 주목받는 문인으로서 자리를 굳혔다. 아버지는 런던에 있는 영국은행의 사무원이었다. 브라우닝은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고 아버지로부터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기초를 배웠다. 1828년 런던대학에 다녔으나 첫 학기 도중 그만두었다. 초기 시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강렬하고 병적인 자의식'을 드러내어 이기적으로 이용했다는 존 스튜어트 밀의 비판은 브라우닝의 시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브라우닝은 배우 찰스 머크리디의 격려로 몇 년 동안 이미 〈스트래퍼드〉(1837)에서 시도한 바 있는 시극 형식에 몰두했다. <반지와 책>을 발표하면서 런던 사교계의 초대가 쇄도했고 여름에는 친구들과 프랑스·스코틀랜드·스위스에서 지냈으며 1878년부터는 이탈리아에서 여름을 보냈다. 브라우닝의 대표적 후기시는 장편의 이야기시나 극시들이었다.

로버트 브라우닝의 아버지는 런던에 있는 영국은행의 사무원이었다.

로버트 브라우닝은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고 아버지로부터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기초를 배웠다. 1828년 런던대학에 다녔으나 첫 학기 도중 그만두었다. 1834년 러시아 총영사 조지 데 벤크하우젠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여행했다. 1838, 1844년의 이탈리아 여행을 빼고는 1840년까지 런던의 캠버웰, 그뒤부터 1846년까지는 런던의 해첨에서 부모와 함께 살았다. 이때(1832~46) 초기의 장시(長詩)와 대부분의 극이 씌어졌다. 처음 출판된 〈폴린 Pauline : A Fragment of a Confession〉(1833, 익명으로 출판)은 형식 면에서 극적 독백이지만 청년기 시인의 열정과 불안이 담겨 있다.

이 작품은 호평을 받기도 했지만, 존 스튜어트 은 로버트 브라우닝이 자신의 감정과 '강렬하고 병적인 자의식'을 드러내어 이기적으로 이용했다고 공격했다. 이러한 밀의 비판은 브라우닝이 시에서 다시는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쓰겠다는 결심에 영향을 주었다. 〈파라켈수스 Paracelsus〉(1835)·〈소르델로 Sordello〉(1840)는 위대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내면의 요구와 세계의 요구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는 내용이다. 〈파라켈수스〉는 많이 읽혔지만 〈소르델로〉는 독자에게 무리한 지식을 요구하는 이해하기 힘든 시이다.

로버트 브라우닝은 배우 찰스 머크리디의 격려로 몇 년 동안 이미 〈스트래퍼드 Strafford〉(1837)에서 시도한 바 있는 시극 형식에 몰두했다. 1841~46년에는 〈방울과 석류나무 Bells and Pomegranates〉라는 소책자 시리즈에 〈피파가 지나가다 Pippa Passes〉(1841)·〈오명 A Blot in the 'Scutcheon〉(1843 공연)·〈루리아 Luria〉(1846)를 비롯해 7편이 넘는 극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과 〈스트래퍼드〉를 제외한 모든 초기작들은 브라우닝 가족의 돈으로 인쇄되었다. 로버트 브라우닝은 극을 쓰기를 즐겼지만 공연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 재능은 〈스트래퍼드〉에서 고백하다시피 '사건 속의 인물보다 인물 내부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데 주력했기 때문이다.

1845년경 로버트 브라우닝 생애의 1단계는 거의 끝났다. 그해에 엘리자베스 배렛을 만났기 때문이다. 배렛은 〈시 Poems〉(1844)에서 브라우닝을 칭송하는 시를 썼고, 브라우닝은 1845년 1월 고마움을 글로 표현했다. 5월에 만나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배렛은 여러 해 동안 병자로서 방에 갇혀 지냈으며 불치로 생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녀의 아버지는 위압적이고 이기적이며 딸의 사랑을 독차지하려 했고 그녀 역시 아버지에게 의존했다. 의사가 이탈리아 요양을 권했으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자, 그들은 규칙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만나다가 드디어 결심을 하게 되었고, 1846년 9월 비밀리에 결혼하여 1주일 뒤에 피사로 떠났다.

결혼 뒤에는, 프랑스와 영국에서 휴가를 보낸 것을 빼고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카사구이디에서 주로 살았다. 아들 로버트가 태어난 뒤 1849년 브라우닝 부인의 사촌 존 케니언으로부터 1년에 100파운드씩 받았고, 그가 1856년에 죽자 1만 1,000파운드를 물려받긴 했지만 수입은 적었다.

로버트 브라우닝은 결혼 뒤부터는 거의 시를 쓰지 않았다. 1849년 전집 출판을 빼고는 〈크리스마스 이브와 부활절 Christmas-Eve and Easter-Day〉(1850)만을 발표했을 뿐이다. 1849년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이 작품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여러 가지 태도를 검토한 것이다. 또 셸리의 편지로 위조한 글에 부치는 서문(1852)은 유일한 주요산문작품이며 비평서이다. 시 51편을 모은 시집 〈남과 여 Men and Women〉(1855)에는 〈주요사건 Memorabilia〉·〈폐허 속의 사랑 Love Among the Ruins〉·〈갈루피가(家)의 토카타 A Toccata of Galuppi's〉 등의 극적 서정시와 〈리포 리피 신부 Fra Lippo Lippi〉·〈동시대를 겨냥하는 법 How It Strikes a Contemporary〉·〈블로그램 주교의 변명 Bishop Blougram's Apology〉 등 훌륭한 독백시가 실려 있다.

그밖에도 〈화롯가에서 By the Fireside〉에서는 암시적으로, 〈한마디만 더 One Word More〉에서는 명백하게 자신이 세운 원칙을 어기고 시인 자신과 사랑하는 아내에 대해 노래했다. 그러나 〈남과 여〉는 많이 팔리지 않았고, 호평도 받지 못했다. 로버트 브라우닝은 이러한 반응 때문에 처음에는 실망을 느껴 다음 몇 해 동안 거의 시를 쓰지 않고 낮에는 스케치를 하거나 점토모형을 만들고 밤에는 사교 클럽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탈리아에서 현저히 회복되었던 브라우닝 부인의 건강도 마침내 나빠지기 시작했다. 1861년 6월 29일에 그녀는 남편 품에 안겨 죽었다. 그해 가을에 브라우닝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런던에서는 먼저 아내가 쓴 〈최후의 시들 Last Poems〉의 출판 준비를 했다. 처음에 사람들을 꺼렸으나 서서히 거리낌없이 초대에 응했고 사교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1863년 새로운 시집을 내놓았으나 여기에 〈폴린〉은 실리지 않았다. 뒤이은 시집 〈등장인물 Dramatis Personae〉(1864)에는 〈앱트 보글러 Abt Vogler〉·〈랍비 벤 에즈라 Rabbi Ben Ezra〉·〈Caliban upon Setebos〉·〈슬러지 씨 Mr.Sludge〉·〈중용 The Medium〉이 실렸으며, 제2판이 나오고서야 폭넓은 인정을 받게 되었다.

1868~69년에 나온 가장 훌륭한 시집 〈반지와 책 The Ring and the Book〉은 1698년 로마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재판과정을 소재로 했다. 이 시집은 그 계획과 완성작의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나오자마자 갈채를 받아 로버트 브라우닝은 당시 가장 주목받는 문인으로서 자리를 굳혔다. 그뒤부터 런던 사교계의 초대가 쇄도했고 여름에는 친구들과 프랑스·스코틀랜드·스위스에서 지냈으며 1878년부터는 이탈리아에서 여름을 보냈다.

능숙한 창작력에 의해 씌어진 대부분의 대표적 후기시는 장편의 이야기시나 극시들로서 〈호엔슈틸 슈방가우 왕자 Prince Hohenstiel-Schwangau〉(1871)·〈박람회장의 피핀 Fifine at the Fair〉(1872)·〈Red Cotton Night-Cap Country〉(1873)·〈여인숙 명부 The Inn Album〉(1875)·〈극적 목가시 Dramatic Idyls〉 시리즈 2편(1879, 1880) 등과 같이 시사적인 주제를 다루었다.

또한 〈바로스티온의 모험 Balaustion's Adventure〉(1871)·〈아리스토파네스의 변명 Aristophanes'o Apology〉(1875) 등 고전적 주제를 다룬 시도 다수 발표했다. 이밖에도 짧은 시들로 이루어진 〈파치아로토와 그가 언짢아할 때 Pacchiarotto and How He Worked in Distemper〉(1876)·〈조코세리아 Jocoseria〉(1883)·〈페리시타의 공상 Ferishtah's Fancies〉(1884)·〈아솔란도 Asolando : Fancies and Facts〉(1889)를 내놓았으며 죽기 직전에 이례적으로 자전적 내용의 시집 2권을 출판했다.

〈La Saisiaz〉(1878)는 친구 앤 에거턴 스미스의 죽음을 슬퍼한 비가로서 죽음에 대한 명상시이다. 〈당대의 중요인물들과의 담화 Parleyings with Certain People of Importance in Their Day〉(1887)에서는 젊은시절부터 로버트 브라우닝에게 영향을 준 책들과 사상을 논했다. 1889년 베네치아에 있는 동안 감기에 걸려 몹시 앓다가 12월 12일에 죽었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브라우닝에 대한 평가

브라우닝은 다른 시인들보다 악의적인 오해와 그릇된 찬사를 많이 받았는데, 이는 그의 시가 가지는 극적인 특성이 이해되지 못한 데서 비롯되기도 했다.

1846년 이전의 많은 작품들이 무대를 겨냥해 쓰여졌고, 그 이후의 주요시들은 극적 독백기법을 점점 완숙하게 구사했다.

극적 독백기법에서는 1명의 화자가 말하고 이 이야기에 대한 화자의 해설이나 말하고 있는 주위의 분위기 등이 첨가된다. 그러나 브라우닝이 이 형식을 즐겨 쓰자, 의도적인 모호함과 기본적인 의도에 있어서 경박한 낙관주의라는 2가지 오해가 생겨났다. 이러한 비판은 타당한 점도 있으나 충분하지는 않다. 그의 시가 항상 어려운 것은 아니다. 짧은 서정시를 비롯한 많은 시에서 명백한 표현이 훌륭하게 구사되어 있다(운율학). 그렇지만 시구의 전달을 어렵게 하는 표면상의 장애물도 많다.

거칠고 불규칙적인 리듬으로 대사를 전달하기 때문에 시를 빨리 읽기가 거의 불가능하며, 생략된 구문은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지만 조금만 주의해서 읽는다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소르델로 Sordello〉·〈피렌체에 있는 옛 그림 Old Pictures in Florence〉과 같은 시는 주제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있어야 이해된다. 또한 슬러지 씨나 나폴레옹 3세 같은 허풍선이, 궤변론자의 독백을 즐겨 썼기 때문에 독자는 교묘하고 역설적인 일련의 이야기를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특징은 손쉬운 독서를 방해한다. 문체나 기법상의 독특한 점들이 해명된다고 해도 브라우닝의 시에는 여전히 흥미로운 요소들이 많다. 첫째, 독백 등에서 뜻밖의 시점을 택하여 독자에게 낯선 관점을 던질 때가 종종 있다. 둘째, 1편의 시 안에서 갑자기 강조점을 바꾸기도 한다. 예를 들어 〈리포 리피 신부〉·〈Master Hugues of Saxe-Gotha〉에서처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주제를 통해 불변의 주제를 다룬다.

개별적인 관찰을 통해 초월적인 진리로 옮아가는 부분은 17세기 형이상학파 시인들이 그랬듯이 독자에게 어려움과 흥미를 부여한다. 셋째, 브라우닝의 시에서는 화자가 항상 아이러니 속에서 등장하기 때문에 풍자의 대상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갈루피가의 토카파〉 같은 음악적인 시의 경우는 논쟁의 고비마다 거짓된 상황과 참된 상황을 구분해야 하며, 〈블로그램 주교의 변명〉 같은 매우 궤변적인 독백에서는 공감할 부분이 더욱 교묘하게 변화한다.

브라우닝이 철학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시를 썼다는 것은 맞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철학은 그다지 심오하거나 흥미롭지 않으며 안이한 낙관주의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변을 통한 신념보다는 상상에서 나온 신념을 추구했기 때문에 그의 시를 단순히 형이상학적 표현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한편 브라우닝의 극적 독백은 그도 주장했다시피 가공의 인물을 화자로 형상화하면서 그들의 주장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브라우닝의 정서와는 다르다. 따라서 시 속에 나오는 가상의 인물들은 시인의 자화상 시리즈가 아니라 인간의 동기를 포괄적으로 나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그리스도교 신앙과 같은 개인적 믿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근본적인 가정이 끊임없이 제기되기도 한다. 인간의 행위에 관한한 그는 애정이나 정직한 본성, 따뜻한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감했으며, 이러한 면들은 결코 풍자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그는 비록 실패하더라도 이상을 향해 전력을 다하는 사람들 편에 섰다. 그러나 다소 불합리해 보이지만 같은 시에서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낮은 수준에서 행동하거나 타협하는 사람들을 포용하는 태도를 동시에 보여준다.

브라우닝은 인간의 본질이나 운명에 대해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관점에 서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대해 깊이 생각지도 않은 채 순진하게 희망을 품지는 않았다. 브라우닝은 죽기 전 1864년부터 비평계의 반응을 얻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다.

하지만 그의 책은 아내나 테니슨의 것만큼 잘 팔리지는 않았다. 20세기에는 빅토리아 시대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명성도 쇠퇴했으며, 독자들이 시에 담긴 가치에 점점 회의를 느끼면서 독자 폭이 줄어들었다. 브라우닝은 개인의 심리와 자신의 의식 흐름에 중점을 두면서 극적 독백을 구사한 점에서 로버트 프로스트나 에즈라 파운드 같은 많은 현대시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또한 다양한 현대인의 삶을 인습의 냄새가 전혀 없는 언어로 표현했다는 점에서도 이들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