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부

미국 남부

다른 표기 언어 The South , 美國南部
요약 테이블
위치 미국의 남동부 지역, 위도 36°30'선의 아래
대륙 북아메리카
국가 미국

요약 미국의 남부 지역. 보통 펜실베이니아 주와 메릴랜드 주의 경계선인 메이슨-딕슨 선과 오하이오 강의 남부, 즉 위도 36°30'선의 아래를 가리킨다. 남부는 여러 가지 복잡한 요인들 때문에 역사적으로 다른 지역과 구분된다. 작물의 긴 생장기간, 주종작물 중심의 농경방식, 대농장체제, 흑인 노예와 자유 흑인 노동자를 이용한 노동력 등이 그것으로, 백인이 흑인을 지배하는 인종적 지배형태가 남부지방의 정치적·경제적 특징을 결정해왔다. 1964년에 통과된 평등권 법과 이후 통과된 흑인투표권 법은 흑인의 권리 향상을 제도화했으며 지난 세기에 존재했던 인종차별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메이슨과 딕슨 선(Mason–Dixon line)
메이슨과 딕슨 선(Mason–Dixon line)

정확하게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보통 펜실베이니아 주와 메릴랜드 주의 경계선인 메이슨-딕슨 선과 오하이오 강의 남부, 즉 위도 36°30'선의 아래를 가리킨다. 연방정부의 규정에 따르면 컬럼비아 특별구·앨라배마·아칸소·델라웨어·플로리다·조지아·켄터키·루이지애나·메릴랜드·미시시피·노스캐롤라이나·오클라호마·사우스캐롤라이나·테네시·텍사스·버지니아·웨스트버지니아 주들이 포함된다.

미국 남부는 여러 가지 복잡한 요인들 때문에 역사적으로 미국의 다른 지역과 구분된다. 작물의 긴 생장기간, 주종작물 중심의 농경방식, 대농장체제, 흑인 노예와 자유 흑인 노동자를 이용한 노동력 등이 특징적이다. 백인이 흑인을 지배하는 인종적 지배형태가 17세기 이후 남부지방의 정치적·경제적 특징을 결정해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비로소 인종지배현상이 완화되었다.

남부지방은 기후가 따뜻해서 연중 서리가 내리지 않는 날이 200~290일인데 담배·쌀·사탕수수·면화 등 이윤 높은 작물들이 자라기에 적합하다. 이러한 기후조건과 풍부한 강우량으로 17~18세기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은 작물을 재배해서 수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았다. 이때 필요한 것이 지속적인 노동력이었다. 결국 아프리카에서 온 노예들이 국제노예시장에서 매매되어 노동력으로 공급되었다(미국 흑인). 노예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라는 특이한 조건 때문에 대농장 노예제도가 발생했다. 이것이 남부지방과 미국의 다른 지역을 구분하는 가장 큰 특징이 되었다.

1790년쯤 흑인들은 남부지방 인구 가운데 약 1/3을, 그리고 대농장 노동력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때 400만 명의 흑인들이 속박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 흑인들을 소유한 백인들은 백인 전체 인구 가운데 1/6이 채 못 되었다. 경제적으로 남북전쟁 전의 남부는 면화생산에 크게 의존했다. 남부지방의 면화는 영국의 섬유시장을 겨냥한 것이었으므로 공업화된 북부지방의 정치적·경제적 힘이 커가는 것을 반대했다.

남부의 사회철학은 지방귀족의 이상을 지켜나가는 것으로서, 북부지방의 사회철학과는 뚜렷이 대조되었다. 남부지방에서는 자유보다 정체된 사회 내부의 계층질서와 같은 보수적 가치가 옹호되었고, 진보보다 안정성을 선호했다. 단순한 자본의 축적에 따른 생활상보다 품위있는 귀족적 생활습관을 중요시했다.

미국독립전쟁 시기부터 1830년경 사이에 북부는 노예폐지론자(→ 노예제폐지운동)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노예제를 온건히 반대하던 종래의 입장에서 강하게 비난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다(노예폐지운동). 이에 대해 남부의 백인들은 남부 특유의 관례인 노예제를 무조건적으로 옹호했다. 성서에 근거해서 노예제의 타당성을 주장하거나 경제적 이유를 들어 정당화했고, 흑인의 인종적 열등함을 추정해서 주장하거나 체계가 잘 잡힌 사회의 필요성을 이유로 내세워 노예제를 인정받으려고 했다.

1860~61년에 노예제를 옹호하는 남부의 분리주의가 절정에 달했고 사우스캐롤라이나·미시시피·플로리다·앨라배마·조지아·루이지애나·텍사스·아칸소·노스캐롤라이나·버지니아·테네시 주들이 연방으로부터 탈퇴해 남부연합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남북전쟁(1861~65)이 발발하자 패전한 남부는 크게 파괴되었고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농경지는 황폐해지고 가축은 유실되었다. 철도는 파괴되고 노예와 관련된 투자금 수십 억 달러가 손실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이런 파괴로부터의 회복은 단지 멈추지 않을 정도의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고 남부 대부분 지역의 경제는 여전히 면화·담배·쌀 중 하나의 작물에만 의존했다. 그리고 여전히 흑인 자유민들의 노동력이 작물재배에 이용되었다. 백인이 지배하는 남부지방은 짐 크로(Jim Crow) 법으로 알려진 합법적인 인종지배 법안을 통해서 계속 흑인의 열등함과 종속관계를 주장했다. 이에 따라 남부연맹의 여러 주가 합중국으로 재편입되는 과정이 끝났을 때(1877) 노예제도는 3가지 제도들로 대체되었다. 경제적으로는 계약에 의한 소작농체제가 성립되었고, 정치적으로는 민주당이 집권하는 1당제 정치가 자리잡았으며, 사회적으로는 인종차별체계가 법과 관습의 영향으로 계속되었다.

1932년까지 남부지방은 가난하고 변화가 없는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서 섬유산업이 발달했고 남북전쟁 이후에 '새로운 남부'를 건설하려는 운동이 있었으나 면화와 농업에 치중하는 것과 시골풍의 생활양식은 근본적으로 수정되지 않았다. 흑인들은 소작인으로 남아 있었다. 1929년 남부지방의 1인당 소득은 372달러였는데, 그밖의 지방에서는 797달러에 이르고 있었다. 만성적으로 면화가 과잉 생산되자 자연히 면화의 가격은 떨어지게 되고, 그결과 흑인과 백인 농부들은 잇따라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1880~1930년에 남부의 소작농지는 36%에서 55%까지로 늘었다.

1930년대의 '대공황'으로 남부의 면화산업은 완전히 파산했다. 뉴딜 정책에 따라 면화 재배지를 줄이는 것에 대한 재정보조가 뒤따르고 실업자 구제를 위한 보조금이 지급되자 비로소 경제침체가 완화되기 시작했다. 이들 정책에 따라 도시로 이주하는 인구가 늘었고 제2차 세계대전중에 많은 남부의 흑인들이 북부의 공업 중심지로 이동하는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뉴딜 정책은 궁극적으로 남부지방에 이득을 주려는 정책이었다.
면화 재배지 할당제를 실시하면서 생산성이 개선되었고 농업토대가 다변화되었다. 1933년 거대한 테네시 강 유역 개발계획(TVA) 공사가 마련되어 많은 시골 가정들이 전기를 공급받았다. 뿐만 아니라 홍수조절과 개선된 토지관리법을 통해 농업생산성을 높였고 새로운 산업의 토대를 마련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남부지방은 성장과 공업화의 지속적인 변화들을 겪게 되었다. 제조업체의 설립이 증가했고, 1939년 이후 제조업에 따른 부가가치는 미국 전체 평균부가가치의 약 2배에 이르게 되었다. 제재·제지·석유화학제품·항공우주산업·농작물가공업 등을 중심으로 공업이 발달했다. 복숭아·땅콩·콩 등의 작물을 재배하게 되면서 면화에 의존하던 남부의 뿌리 깊은 역사적 전통도 바뀌었다. 면화는 가축이나 섬유제품보다 낮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그 지위가 떨어졌다.

1940년 이후의 인구성장률은 전국 인구 성장률보다 약간 높았으나 1970년 이후로는 전국 평균 성장률의 거의 2배에 이르고 있다. 20세기초에는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다른 주로 이주해갔기 때문에 인구가 많이 줄었다. 그와 반대로 1960년에는 이주해오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1970년대만 하더라도 400만 명 이상이 남부지방에 정착하기 위해 들어왔다. 이러한 성장에 발맞추어 꾸준히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흑인과 백인 모두의 1인당 소득이 증가했다.

1954년 미국 대법원은 공립학교의 인종차별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결정했다. 이를 계기로 여러 세기에 걸친 남부의 인종차별을 없애려는 노력이 뚜렷한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비롯한 여러 지도자들의 지도 아래 1950년대말과 1960년대초에 걸쳐 평등권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결과 남부지방에 있던 다른 인종적 장애도 무너졌다.

1964년에 통과된 평등권 법안과 1965년에 통과된 흑인투표권 법안은 흑인의 권리 향상을 제도화했으며 전(前)세기에 존재했던 인종차별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