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젤란

마젤란

다른 표기 언어 Fernão de Magalhães
요약 테이블
출생 1480년
사망 1521년
국적 포르투갈

요약 1505~12년에는 포르투갈, 1519~21년에는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항해했다. 스페인을 출발해 남아메리카를 순항하면서 마젤란 해협을 발견하고, 태평양을 횡단했다. 비록 그는 필리핀에서 살해당했지만, 그의 배는 계속 스페인을 향해 서쪽으로 항해를 해서 최초로 세계일주에 성공했다. 그가 죽은 후에는 바스크의 항해가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에 의해 일주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1519년 8월 스페인에서 서항로로 몰루카제도에 갈 계획으로 선박5척과 승무원 270명으로 세비아를 출발했다. 12월 중순에 리우데자네이루에 닿고, 이듬해 1월 라플라타 강에 도착하여 해협이 아니라 강인 것을 확인했다. 남하를 계속하여 1520년 11월 해협을 빠져나가 잔잔한 대양에 이르자 이를 태평양이라 이름짓고, 지나온 해협은 마젤란해협이라 불리게 되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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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기생애
  2. 스페인에의 마젤란
  3. 마젤란 해협의 발견
  4. 마젤란에 대한 평가
마젤란Fernão de Magalhães
마젤란Fernão de Magalhães

1505~12년에는 포르투갈, 1519~21년에는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항해했다. 스페인을 출발해 남아메리카를 순항하면서 마젤란 해협을 발견하고, 태평양을 횡단했다.

비록 그는 필리핀에서 살해당했지만, 그의 배는 계속 스페인을 향해 서쪽으로 항해를 해서 최초로 세계일주에 성공했다. 그가 죽은 후에는 바스크의 항해가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델 카노)에 의해 일주가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어졌다(→ 항법).

초기생애

아버지 루이 데 마가양스와 어머니 알다데 메스키타 사이에 태어난 마젤란은 포르투갈의 귀족계급이었다. 어린시절에는 리스본에서 레오노르 여왕의 시중을 들기도 했다.

그는 1505년초 동방에 보내진 최초의 포르투갈 총독이던 프란시스코 데 알메이다의 함대에 들어갔다. 알메이다의 원정대는 마누엘 왕으로부터 아프리카와 인도의 이슬람권 해군력을 점검·조사하라는 명을 받고 3월 25일 리스본을 떠났다. 연대기 기록자 가스파르 코레이아에 따르면 마젤란은 인도 말라바르 해안의 칸나노레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이 인도 복무 초기시절에 항해에 관한 많은 지식을 얻었다고는 전해지나, 그가 동방에서 보낸 초기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1506년 11월 누노 바스 페레이라와 함께 모잠비크 해안의 소팔라를 항해하고 그곳에 요새를 세운 이후의 기록만 남아 있다.

1508년 인도로 다시 돌아온 마젤란은 1509년 2월 2~3일에 디우 대전투에 참가했는데 이 전투로 포르투갈은 인도양 대부분의 패권을 장악했다. 한편 디오구 로페스 데 세케이라 함대와 함께 코친에 도착한 뒤 곧바로 무장군인의 자격으로 말라카를 향해 출발했다. 이때 그의 임무는 사령관에게 말레이 침입이 임박했음을 경고하는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후의 전투 중에 포르투갈의 탐험가 프란시스코 세랑을 구해주었는데 이 탐험가는 후에 몰루카스(말루쿠)를 탐험하고 와서 마젤란에게 이 섬들에 관한 많은 정보를 주었다.

10월 10일 코친에서 열린 의회에서 고아를 탈환하자는 안건이 결정되었다. 이때 마젤란은 계절적 조건이 맞지 않아 큰 배를 출항시키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새 총독인 아퐁수 데 알부케르케는 탈환계획을 감행해 결국 11월 24일 함락시켰다. 마젤란의 이름은 당시 전투자 명부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한편 그가 인도 복무중 선장이 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이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없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동부 해안과 인도 서부 해안에서 승리를 거두어 인도양에서의 이슬람 해상세력을 꺾어버렸다. 이로써 아랍인들로부터 해상무역의 거점들을 빼앗는 알메이다 원정대의 임무는 거의 완수했으며 오로지 말라카를 정복하는 일만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1511년 6월말 마젤란도 참가한 알부케르케 휘하의 함대가 말라카를 향해 출발해 6주 후 마침내 그곳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포르투갈은 동방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동방의 부는 말라카를 거쳐 서방의 항구로 전달되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은 말라카 해협을 지배함으로써 말레이시아의 바다와 항구들 가운데 주요거점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그들의 탐험대상으로 남아 있던 곳은 향료의 섬 몰루카스였다. 따라서 1511년 12월초 정찰항해를 한 뒤 반다에 도착해 1512년 향신료를 가지고 돌아왔다. 지오바니 바티스타 라무시오와 레오나르도 데 아르젠솔라에 의하면, 이때 마젤란이 이 항해에 가담했다는 주장에는 증거가 불확실하다고 한다. 그가 사실상 몰루카스를 항해했다고 해도 그 이후 스페인에서 필리핀까지의 항해에서는 세계일주 항해를 마무리했어야 했다.

1512년 마젤란은 리스본으로 돌아왔고 그 이듬해 아자모르에 있는 모로코인들의 요새점령 임무를 띤 군대에 참여했다. 이때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1514년 11월 리스본으로 돌아온 마젤란은 마누엘 왕에게 지위 승진을 의미하는 연금인상을 요청했다. 그러나 아자모르 함락 후 그의 불법행위를 폭로하는 근거 없는 기록이 왕에게 알려져 왕은 이 요구를 거절했고 그에게 모로코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1516년초 청원을 냈지만 왕은 이를 거절하고 다른 곳에서 일하도록 그를 보내버렸다.

스페인에의 마젤란

마젤란은 1517년 10월 20일 스페인 세비야에 도착했다. 여기서 포르투갈의 우주론자 루이 팔레이로와 합류하고 함께 바야돌리드 궁정을 여행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국적을 버리고 카를로스 1세(후에 황제 카를로스 5세가 됨)의 수하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마젤란은 '페르난도 데 마가야네스'라는 스페인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493년 포고된 로마 교황의 칙서에 따라 영토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분할되었다. 즉 새로 발견된 모든 지역과 앞으로 탐험될 모든 지역 중에서 새로 정한 국경선(1494년에 다시 고쳐짐)의 동쪽 지역은 포르투갈의 지배로 들어갔고, 서쪽 지역은 스페인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때 풍요로운 스파이 섬(향료섬)은 이 경계선의 서쪽에 위치해 있어 스페인에 속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마침내 마젤란과 팔레이로는 이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 탐험항해를 할 것을 제안했다.

1518년 3월 22일 그 제안은 왕에게 받아들여져 그들은 원정대의 합동 총사령관으로 임명받았다. 그 원정대는 몰루카스로 가는 모든 스페인 지배하의 항로를 찾도록 지시받았다. 그들이 발견한 모든 영토의 지배권은 그들과 그들의 후계자에게 귀속되었으며, 항해에서 얻은 순이익의 1/20은 그들의 몫이었다. 이는 모두 산티아고령으로 투자되었다. 이때 티에라피르메를 곧장 통과하는 해협을 발견했던 마젤란은 그의 배를 이끌고 대서양에서 '남해'로 항해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것은 그가 최초로 생각해낸 것은 아니었다. 이미 다른 사람들도 포르투갈이 지배하는 희망봉을 피해 가기 위해 서쪽으로 계속 항해해서 동방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었다.

왕의 승인을 받은 마젤란과 팔레이로는 바로 그 해협을 찾도록 명령받았다. 그리고 당시 동인도의 업무를 맡고 있던 관리들은 이 원정대에 5척의 배를 공급하도록 명령받았다. 원정대는 세비야에서 항해준비를 했는데, 이곳에서 포르투갈 중개상이 계획을 무산시키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마젤란의 기함은 트리니다드호였고 산안토니오호·콘셉시온호·빅토리아호·산티아고호 등이 동행했다. 팔레이로는 정신착란으로 이 항해에 참여하지 못했다.

마젤란은 1517년 세비야 고위관리의 딸 베아트리스 바르보사와 결혼했다. 그는 아내와 아직 갓난아기였던 아들 로드리고에게 작별을 고한 뒤 1519년 9월 20일 산루카르데바라메다를 떠났다. 선원은 9개국에서 온 사람들로 270명이었다. 이 함대는 9월 26일 테네리페에 도착한 뒤 10월 3일 브라질을 향해 떠났다. 그러나 기니 만에서는 폭풍을 만나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묶여 있다가 11월 29일에야 세인트아우구스티네 곶 남서쪽 129.6㎞ 지점에 도달했다.

그들은 다시 카보프리오를 돌아 12월 13일 리우데자네이루 만에 도달한 뒤 해협을 찾아 남쪽 라플라타 강으로 항해를 계속했다. 그러나 라플라타는 결국 해협이 아니라 강어귀임이 밝혀졌다. 3월 31일에는 남위 49。 20' 세인트줄리안 항구에 도착했는데, 이곳에서 부활절 밤을 보내던 중 스페인 태생 선장들이 포르투갈 지휘관인 마젤란에게 반항해 폭동을 일으켰다. 이때 그는 가차없이 진압하기로 결정을 내려 선장 1명을 사형시키고, 1520년 8월 24일 이 항구를 떠나면서 다른 1명을 이곳에서 운명을 마치도록 버려두었다.

마젤란 해협의 발견

마젤란 해협
마젤란 해협

이전에 함락시켰던 산티아고 근처의 산타크루스 강 어귀에 도착한 후, 마젤란은 다시 남쪽으로 항해해서 10월 21일엔 버진스 곶(비르헤네스 곶)을 돌아 남위 52。 50'쯤 되는 곳에서 한 해협으로 들어섰다. 이곳이 바로 그가 찾은 해협임이 증명되어 후에 그의 이름이 붙여진 마젤란 해협이다. 한편 산안토니오호가 도망쳐 3척의 배만이 해협의 서쪽 끝에 도착했다. 마젤란은 강인한 성격의 함대 사령관이었지만 바다가 보인다는 소식을 듣자 기쁨에 겨워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11월 28일 트리니다드호·콘셉시온호·빅토리아호 등 3척의 배가 '남해'로 들어갔는데 이곳을 순조롭게 횡단했기 때문에 나중에 태평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의 항해는 갈증과 괴혈병에 시달리면서 쥐가 물어뜯은 지저분한 비스킷을 먹고, 급기야는 돛대 끝에서 가죽까지 떼내어 먹을 정도로 힘겨웠다. 그러나 마젤란의 가차없는 결단력으로 인해 선원들은 마침내 최초로 페루 해협을 건넜으며 끝내는 태평양 횡단에도 성공해 12월 18일 칠레 해안 가까이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다시 북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해 1521년 1월 24일 드디어 투아모투 군도의 푸카푸카라는 육지를 발견했다. 2월 13일, 서경 약 158。 주야평분선을 통과한 뒤 3월 6일 마리아나 제도의 괌 섬에 최초로 상륙했다. 이곳에서 그들은 99일 만에 처음으로 신선한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마젤란이 스페인을 떠나기 전 카를로스 왕에게 보낸 비공식 문서를 보면 그는 몰루카스의 위치를 대략 알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곧바로 스파이 섬 방향으로 가는 대신 필리핀 쪽으로 항해하면서 마젤란은 몰루카스에 도달하기 전에 식량을 충당하고 기초를 단단히 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3월 9일 출발한 마젤란은 후에 필리핀이라고 부르게 되는 제도를 향해 서남서 방향으로 항해를 계속했다. 태평양에 있는 마사바에서 최초로 스페인에 충성을 다짐했고, 세부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개월이 채 지나기도 전에 마젤란은 막탄 섬 원주민과의 싸움에서 죽었다.

마젤란에 대한 평가

그가 죽은 후, 트리니다드호와 빅토리아호 2척만이 몰루카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엘카노가 지휘를 맡았던 85t의 빅토리아호만이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엘카노는 원래 콘셉시온호의 지휘관이었으며 세인트줄리안 항구의 폭동에 가담했던 인물이었다.

1522년 9월 8일 향료를 가득 싣고 돌아온 그 배의 생존자는 17명의 유럽인과 4명의 인도인으로 그 배는 선체가 부서져 물이 새고 있었다. 이들은 살아 있다는 것이 의심스러울 만큼 쇠약해져 있었다. 엘카노는 지위가 승격되어 왕으로부터 "너는 처음으로 나를 일주했다"라고 씌어진 지구 모양의 문장을 받았다. 이는 희망봉 항로를 돌아옴으로써 실제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한 공로로 그에게 주어진 명예였다.

마젤란의 업적은 그의 대담한 발상과 최초의 세계일주 항해를 훌륭하게 이끌었다는 데 있다. 그는 또 태평양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횡단한 최초의 항해가였다. 그 항해의 결과로 마젤란은 당시 신대륙에서 단 며칠만 서쪽으로 항해하면 동인도에 도착할 것이라던 생각을 반증했다.

대신 그는 3개월 이상 걸린 항해 끝에서야 한 함대를 횡단시키는 데 성공했다. 마젤란의 성격은 복잡하고도 극도로 모순적이어서 아직도 불가사의한 인물로 남아 있다. 심리적으로 그는 한시도 자신에게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한편 그가 포르투갈에 등을 돌리고 스페인에 충성했던 것에 대해 많은 작가들은, 당시 국왕에 대한 충성은 포르투갈인들에게는 신에 대한 충성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었음을 지적하면서 그를 비난했다. 한편 또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마젤란이 다른 군주에게 충성한 것처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세바스티안 카보트, 아메리고 베스푸치 등도 마찬가지 일을 했다고 지적하면서 국적을 제한하는 것은 지식의 진보에 장애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포르투갈인들이 주장하는 하나의 사실은 바로 '마젤란은 포르투갈인'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