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부케르케

알부케르케

다른 표기 언어 Afonso de Albuquerque The Great 동의어 아폰수 데 알부케르케
요약 테이블
출생 1453, 포르투갈 리스본 근처 아얀드라
사망 1515. 12. 15, 인도 고아 근처 해상
국적 포르투갈

요약 포르투갈의 군인.

아폰소 데 알부케르케 (Afonso de Albuquerque The Great)
아폰소 데 알부케르케 (Afonso de Albuquerque The Great)

인도의 고아(1510)와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1511)를 정복했다.

동양의 모든 주요해상교역로를 장악하고 항구적인 정착민 요새를 건설하겠다는 그의 구상은 포르투갈이 동양에서 패권을 장악하는 토대가 되었다. 빌라베르데 영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는 포르투갈 왕 주앙 1세와 두아르테의 신임을 받은 신하였고, 외할아버지는 포르투갈 해군제독이었다. 알부케르케는 10년 동안 북아프리카에서 복무하면서 이슬람교도와 맞서 싸워 초기의 군사적 경험을 쌓았으며 아폰수 5세가 1471년에 아르질라와 탕헤르를 정복할 때 참여했다.

알부케르케는 주앙 2세(1481~95 재위)에 의해 거마 관리관으로 임명되었고 주앙 2세가 포르투갈을 다스리는 동안 줄곧 이 지위를 유지했다.

1489년에는 다시 북아프리카에서 복무하며 그라시오자를 방어했으며 주앙의 후계자인 마누엘 1세 시절에는 궁정에서 별로 중요한 지위를 얻지 못하고 모로코에서 다시 복무했다.

그는 엄격한 주앙 2세 밑에서 출세했고 아프리카에서 경험을 얻었지만, 그의 명성은 동양에서 이룬 업적에 바탕을 두고 있다. 1499년에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선구적 항해를 마치고 포르투갈로 돌아오자, 마누엘 왕은 인도의 통치자들과 관계를 맺고 교역을 시작하기 위해 당장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이 이끄는 2번째 함대를 인도로 파견했다.

그때까지 향료 교역을 독점했던 이슬람 상인들은 캘리컷의 힌두교 군주를 부추겨 포르투갈에 적개심을 갖게 했다. 그러나 인도 남서 해안에 있는 힌두교 군주의 속국인 코친은 포르투갈인들을 환영했다. 1503년 알부케르케는 코친이 통치자를 보호하기 위해 사촌 프란시스쿠와 함께 코친에 도착해 그곳에 아시아 최초의 포르투갈 요새를 짓고 수비대를 주둔시켰다.

그는 퀼론에 교역장을 세운 뒤 1504년 7월 리스본으로 돌아와 마누엘의 환영을 받고 정책 결정에 참여했다. 1505년 마누엘은 돔 프란시스쿠 데 알메이다를 인도의 초대 총독으로 임명하고, 부왕(副王)의 지위를 주었다. 알메이다의 목적은 교역을 발전시키고 포르투갈의 동맹자들을 돕는 것이었다.

알부케르케는 마침내 1506년 4월 트리스탕 다 쿠냐와 함께 리스본을 떠났다.

이 항해의 목적은 아프리카 동해안 탐험뿐 아니라 홍해 입구를 봉쇄하고 아랍과 인도의 교역을 차단하기 위해 소코트라 섬에 요새를 세우는 데 있었다. 이 임무를 마친(1507. 8) 그는 페르시아와 유럽의 교역로를 트기 위해 페르시아 만과 오만 만 사이의 해협에 있는 호르무즈 섬을 점령했다. 그는 호르무즈 섬에 요새를 지을 계획이었지만 부하 장교들이 이 계획에 반대하고 인도로 떠났기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호르무즈 섬의 요새
호르무즈 섬의 요새

그에게 남아 있던 배는 2척뿐이었지만 알부케르케는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해안을 계속 공격했다.알메이다의 임기가 끝날 무렵 마누엘 왕은 알부케르케를 후임으로 임명했지만 부왕의 지위는 주지 않았다. 알부케르케가 1508년 12월 인도에 도착했을 때 알메이다는 임시 변통으로 급조된 캘리컷의 해군을 격파했지만 그의 아들은 이집트에서 온 해군에 패해 전사했다.

알메이다는 죽은 아들의 원수를 갚을 때까지 총독 자리에 있겠다고 주장하면서 간섭을 피하기 위해 알부케르케를 투옥했다. 알메이다는 1509년 2월 디우 앞바다에서 이슬람교도를 무찔렀지만 11월 포르투갈에서 함대가 도착한 뒤에야 인도 총독 자리를 알부케르케에게 넘겨주었다.

알부케르케의 계획은 동양의 모든 주요해상교역로를 적극 통제하고, 정착민이 있는 항구적 요새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는 1510년 1월에 코친을 점령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2월에 이르자 알부케르케는 이슬람교도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게 더 낫다는 것을 깨닫고 티모자라는 강력한 해적의 도움을 얻어 23척의 배를 이끌고 오랫동안 이슬람 군주들의 지배를 받아온 고아를 공격했다. 1510년 3월 고아를 점령했지만 5월에 이슬람 군대의 공격을 받고 요새 밖으로 쫓겨났다가 11월 다시 맹공을 퍼부어 마침내 요새를 탈환할 수 있었다.

고아의 정복
고아의 정복

그는 포로가 된 이슬람 수비군을 모조리 베어 죽였다.

알부케르케가 이슬람교도에게 이런 대승을 거둔 뒤, 힌두교 통치자들은 포르투갈군이 인도에 주둔하는 것을 정식으로 받아들였다. 알부케르케는 고아를 이슬람교도에 대항하는 해군 기지로 이용하고, 향료 교역의 중심지로 바꾸며 페르시아산 말을 힌두교 군주들에게 공급하는 데 사용할 계획을 세웠다.

부하들을 전사한 적군 병사의 미망인과 결혼시키면 고아에는 자체의 주민이 생겨날 것이고, 특별 관리체제 밑에 있는 마을 공동체들은 고아에 필요한 보급품을 어김없이 공급해줄 터였다.

알부케르케는 고아에 정부를 조직한 뒤 말레이 반도에 있는 말라카를 정복하러 떠났다. 말라카는 스파이스아일랜드(몰루카 제도)와 동부의 여러 교역장에 직접 향료를 보급하는 곳이었다. 그는 1511년 7월 이 항구를 점령하고 수비대를 주둔시키는 한편, 향료를 찾기 위해 배를 파견했다.

그 사이에 고아는 다시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는 1512년 1월 말라카를 떠나 고아를 구했다. 알부케르케는 고아에서 확고한 기반을 잡고 특허제도를 이용해 상품 이동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한 뒤, 포르투갈인과 인도인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다시 홍해로 갔다. 소코트라 섬은 기지로 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아덴을 점령하려고 했지만, 병력이 충분하지 못해 아라비아 해안과 아비시니아 해안을 탐험했다. 인도로 돌아온 그는 그때까지 포르투갈 반대세력의 주요거점이었던 캘리컷을 마침내 정복했다.

1515년 2월에 그는 26척의 배를 이끌고 다시 고아를 떠나 호르무즈 섬으로 가서 이 섬의 일부를 장악했으나 9월에 병에 걸려 고아로 뱃머리를 돌렸다.

돌아오는 도중에 그는 개인적으로 원수지간인 로페 소아레스가 그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을 알았다. 그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원한을 품은 채 배에서 죽었다. 알부케르케의 계획은 주앙 2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십자군 정신에서 나왔다. 그는 상업적 이익을 고려하느라 계획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다. 페르시아인을 구슬러 투르크의 적으로 만들거나 나일 강의 물줄기를 다른 데로 돌려 이집트를 황폐하게 만들려는 구상은 그의 대담한 착상으로서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초인적 계획이었겠지만, 그가 이룬 업적 또한 초인적인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