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세유

마르세유

다른 표기 언어 Marseille
요약 테이블
위치 프랑스 남부 부슈뒤론 주, 론 강 하구 부근
인구 1,620,000명 (2022년 추계)
면적 240.62㎢
언어 프랑스어
대륙 유럽
국가 프랑스

요약 지중해에 면해 있는 프랑스 제1의 항구도시. 자유도시의 성격이 강했는데 BC 1세기 로마 군대에게 점령당한 후에도 그런 성격이 유지되었다. 15세기 프로방스가 프랑스 왕국에 통합된 이후에도 마르세유는 중앙과 분리된 행정체제를 유지했다. 1800년 프랑스 정부가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부슈뒤론 주의 주도로 지정했다. 지중해 연안의 유럽, 북부 아프리카, 근동, 중동 지역, 인도양 및 태평양 연안의 아시아 지역에서 북해 연안의 서부 유럽으로 가는 물자 유통의 교두보이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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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르세유 자연·인문환경
    1. 지형
    2. 기후
    3. 도시
  2. 마르세유 주민
  3. 마르세유 경제
  4. 마르세유 정치와 사회
  5. 마르세유 문화
  6. 마르세유 역사
    1. 초기역사
    2. 오늘날의 도시
마르세유(Marseille)
마르세유(Marseille)

프랑스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이자 부슈뒤론 주의 주도. 지중해에 면해 있는 프랑스 제1의 항구도시로 론 강 하구 부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서쪽 349㎞ 지점에는 리옹, 북북서쪽 863㎞ 지점에는 파리가 있다. 이 위치는 지중해 지역에서 론 강 하곡을 경유해 북해 연안의 서부 유럽, 라인 강 중·상류 유역, 중부 유럽 지역과 연결되는 해안 교두보에 해당된다. 따라서 지중해 연안의 유럽, 북부 아프리카, 근동, 중동 지역은 물론 멀리는 인도양 및 태평양 연안의 아시아 지역에서 북해 연안의 서부 유럽으로 가는 물자 유통의 적환점(積還點)이며, 동시에 북해 연안의 서부 유럽이 이들 지역으로 진출하는 전진기지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지리적 배경과 관련되어 마르세유는 그리스 로마 시대 이래 현재까지 계속 성장하고 있다. 2,500년 전부터 항구기능의 도시화가 시작되어 오늘에 이른 마르세유는 중앙권력에 대해서는 다양한 형태로 강한 독립성을 주장해온 역사를 지니고 있다. 원래 자유도시의 성격이 강했는데 BC 1세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군대에게 점령당한 이후에도 그런 성격이 유지되었다. 그후 여러 세기에 걸친 침체기를 거친 후 다시 생기를 되찾아 10~14세기에는 프로방스의 자작 가문 지배하에 들어가 독립성이 강한 도시로 성장했다.

15세기 프로방스가 프랑스 왕국에 통합된 이후에도 마르세유는 중앙과 분리된 행정체제를 유지했으며, 도시의 자치성을 위협하는 왕과 중앙정부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러한 이유로 1800년 프랑스 정부가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마르세유를 부슈뒤론 주의 주도로 지정하자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이 프로방스 지방이 프랑스와 프랑스 정신문화에 완전히 통합될 수 없다고 믿는 프랑스 타지역 사람들은, 오랜 기간 마르세유가 독특한 민속문화를 지닌 곳으로 보아왔으며 희극적 일화 및 사투리, 페탕크라고 하는 야외 볼링, 부야베스로 알려진 토속적 생선요리를 연상해왔다. 이와 같이 이색적 인상을 주는 요소가 있으나, 또한 마르세유는 프랑스의 경제·사회 구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프랑스 제2의 도시이자 최대의 항구로서, 시의 북서쪽 40㎞ 지점에 위치한 포스쉬르메르 시의 성장으로 항구기능이 확대·강화되면서 1970년대 이래에는 유럽 최대의 적환점 자리를 놓고 로테르담과 경쟁하고 있다.

지도
마르세이유

마르세유 자연·인문환경

마르세유
마르세유
지형

마르세유의 특징은 1차적으로 론 강 하구 일대의 지리적 위치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주변의 석회암 지형이 천연의 요새항구를 만드는 이곳은 론 강 하곡을 따라 북쪽의 대륙과 남쪽의 지중해를 연결시키는 교두보 자리이기 때문에 적환점으로서 적지였다. 고대에는 주변이 밀림 같은 숲으로 덮여 사람이 살지 못했으나, 일찍이 BC 600년경 그리스인들에 의해 무역항으로 발돋움해 그후 많은 사람들이 이주·정착하게 되었고 이후 프랑스 최고의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지역적 특수성으로 인해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이주해옴으로써 다양한 주민구성, 생활양식, 문화적 유적을 볼 수 있으며 도시 분위기는 개방적이고 변화가 많다.

론 강(Rhone river)
론 강(Rhone river)

그리스 로마 시대에 마르세유는 지중해 지역 세력이 서부 유럽으로 진출하는 해안 교두보 역할을 했고 산업혁명 이래 서구 제국의 식민지 개척을 위한 전진기지가 되었다.

1960년대 알제리·모로코·튀니지 등 북부 아프리카 식민 국가들이 유럽의 압제에서 독립한 후에는 새로운 이주 물결이 지중해를 건너 이곳으로 들어왔다. 당시에 유럽의 급격한 경제성장에 힘입어 마르세유를 통한 물동량이 급격히 증가했으며, 인근 지역의 도시화가 포스쉬르메르까지 연결되어 이곳에는 공업단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전까지 주택문제나 주요 물자수요에 전혀 문제가 없을 만큼 풍요로웠으나 1970년대 유럽의 경제성장 둔화로 산업 정체현상과 높은 실업률을 가져와 이주민들의 수가 급감했으며, 거주민의 다양한 문화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 또한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들은 점점 회복되는 추세에 있다.

마르세유 및 인근 시역이 위치한 지중해의 해안은 알프스 남단의 석회암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론 강 하구에는 저습지 상태의 삼각주가 펼쳐져 있다. 이런 자리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해야만 항구로 이용할 수 있는 저습지의 경우와는 달리 수심이 깊어 쉽게 항구로 이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반면 험준한 산지로 인해 시가지 확장에는 많은 장애가 따른다. 이미 19세기에 원래 천연 항구(비외포르)의 수용력이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구 항구와 인접해 라졸리에트 만을 매립하여 새로운 인공항만을 건설했고, 그외에도 5곳의 항만을 연이어 건설했다. 그러나 석회암 산지의 해안만으로는 계속 증가하는 물동량을 감당할 수 있는 부두시설 확대 및 시가지 확장이 한계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론 강 하구 삼각주의 해안 습지가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해 항구로 이용된 것은 1960년대이다.

이때부터 마르세유 인근 광역 도시권의 부두시설과 시가지가 론 강 하구 삼각주로 확대되었다. 1965년 이 지역 일대에 항구도시들의 연담지역인 포스쉬르메르가 형성되었고, 1966년 이후에는 론 강 하구 삼각주에서 포스 시와 인근한 베르 석호를 끼고 새로운 항구를 건설했다. 마르세유의 북쪽으로는 알프스 산지 남부에 해당하는 에투알 산맥이 펼쳐진다. 북동쪽의 엑상프로방스 지역에 펼쳐진 이곳 산 사면은 프로방스 포도주 산지로 잘 알려져 있다.

기후

마르세유의 기후는 전형적인 지중해성이 아니다.

여름철 건조기간에는 강수량이 적고 기온이 높으며, 겨울보다 봄과 가을에 최대의 강수량을 보인다. 가장 서늘한 기간인 12월과 1월에는 안개가 발생하기도 하며 비교적 온화한 기후를 보인다. 여름철에는 불쾌지수가 높을 정도로 기온이 올라간다. 겨울에는 미스트랄이라 불리는 한랭건조한 바람이 론 계곡을 따라 하강해 도시를 강타한다.

도시

마르세유에서 가장 살기 좋은 지역은 구 항구 북쪽의 파니에라는 곳이었는데 1943년 독일의 침공에 의해 파괴되고 말았다.

19세기에는 중류층의 거주지가 도시 남쪽인 파라디스 거리와 프라도 거리 주변에 형성되었다. 1960년대 이후에는 도시의 외곽지대를 중심으로 노동자 주택지구가 형성되었다. 1970년대 이후 시 당국에서는 대단위 프로그램을 세워 파니에 지구와 구 항구 주변을 비롯한 많은 지역에 재개발 사업을 벌이고 있다. 라카니비에르 간선도로는 도시의 옛 중심지인 구 항구로부터 동쪽을 향해 뻗어 있으며 오늘날 중요한 상업지구를 이루고 있다.

이 도로가 시작되는 부르즈 건물은 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공건물로서 상공회의소와 해양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967년 부르즈 건물 뒤쪽에서는 그리스 양식의 성벽(BC 3~2세기)과 로마 시대의 탑·도로 유적이 발굴되었다. 또한 고대의 항구 유적도 발굴되었다. 이들 유적지로부터 출토된 로마 시대의 항아리를 비롯한 많은 유물들은 시청 근처의 로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항구 입구에는 포르생장 성곽(13세기)의 유적이, 15세기 중엽 프로방스 왕국의 르네 왕이 건설한 탑과 함께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곽은 17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당시 프랑스 방어망의 일부였다. 항구의 다른 쪽 입구에는 포르생니콜라 성채가 있다. 항구 안쪽에 있는 프리울 제도는 수상 스포츠의 중심지로 개발되어왔다. 이들 섬과 육지 사이에는 과거에 많은 정치범들이 유폐되었던 이프 섬이 있다.

이프(If)
이프(If)

구 항구 주변에서는 이외의 다른 역사적 유물들도 볼 수 있다.

디아나 신전의 유적지에 지어진 라마조르 성당(11세기)은 부분적으로 철거되긴 했지만, 1852년 8개의 돔 구조를 지닌 주교좌성당으로 재건되었다. 또한 이 근처에는 1660~1750년에 지어진 오래된 자선병원이 있다. 이 건물의 내부에는 조그마한 예배당이 있는데, 이는 프랑스 바로크 양식의 대표적 조각가인 피에르 피제가 만든 것이라 한다. 자선병원 옆에는 시에서 가장 오래된 16세기 말의 병원건물 오텔디외가 남아 있다.

이에 인접해 아쿨레 교회의 종각이 마르세유의 구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종각은 12세기에 만들어진 탑과 14세기의 첨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항구의 선적장 맞은편에는 11~14세기에 지은 생빅토르 바실리카가 있다. 구 항구 남쪽의 언덕에는 노트르담들라가르드 교회(8세기)가 있다. 교회 꼭대기에는 약 9m 높이의 성모 마리아 상이 세워져 있다.

마르세유 주민

마르세유
마르세유

마르세유 주민은 지중해 연안, 유럽, 아프리카 등 세계 각처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새로 이주한 사람들의 거주 형태는 다양하다. 예를 들어 이슬람인은 1970년대에 개발된 지역에만 거주하고, 이스라엘인·그리스인·아르메니아인은 그들만의 공동체적 결합을 형성하며 강력한 조직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최근의 이주민들로는 프랑스의 다른 지역에서 온 젊은 기술자들을 들 수 있다.

마르세유 경제

마르세유 경제
마르세유 경제

마르세유는 산업이 다양하게 발달한 중요한 제조업 도시로서, 특히 정유업·조선업·철강업이 유명하다. 가장 오래된 산업은 15세기에 시작된 비누 제조업이지만, 제당업과 마찬가지로 이 산업은 상대적인 침체기에 빠져 있고, 오늘날에는 야금업·건축자재업·화학공업 등이 주류를 이룬다. 1966년 이후에는 포스쉬르메르와 베르 석호 근처의 항구건설로 인해 많은 새로운 산업들이 발달하고 있다. 항구 주변에서는 석유, 광물, 천연 가스, 컨테이너, 일반 상품들을 위한 창고 산업이 발달했다. 포스-라베라-베르 공업지대 중 특히 포스의 금속조립공장, 라베라의 정유소, 베르 석호의 석유화학 및 정유 공업단지 등이 유명하다. 이들 공장의 대부분은 마르세유 항을 거쳐 직수입되는 천연자원을 사용한다. 마르세유에서 포스에 걸쳐 발달한 항구 연관산업은 유럽 최대규모이다. 이곳 항만시설의 규모는 프랑스 조선업의 2/3를 차지할 정도로 거대하며, 주 항만 이외에도 7곳의 드라이 독이 더 있고 석유 탱크의 관리를 위한 특별시설도 있다.

항구는 주요 철도, 운하, 파이프 관, 고속도로 등으로 프랑스 각지와 북유럽·이탈리아·스페인·독일·스웨덴까지 연결된다. 마르세유의 지리적 이점은 외국의 자본을 유치하기에 충분했으며 19세기 중반 마르세유부동산은행과 마르세유산업-상업-주식은행이 세워졌다. 재정은 이 지역의 산업 계획과 수에즈 운하 건설 등 외국에의 투자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재정조건은 20세기 프랑스 식민지들의 독립으로 악화되었고, 오늘날에는 지방 및 중앙 정부의 투자에 크게 의존한다. 프랑스의 증권거래소 지부가 이곳에 있다. 주요 간선도로는 1953년 이후에야 개통되었다. 시 당국은 자동차가 급증하면서 도로건설 및 확장사업을 시작했고, 그 이후 마르세유의 외형은 크게 바뀌었다. 지하철 1호선은 1977년 개통되었다. 오늘날 마르세유는 철도와 고속도로에 의해 유럽 각지와 연결되어 있다. 시 남쪽 29㎞ 지점에 있는 마리냔 공항은 이 지역의 항공교통을 담당한다.

마르세유 정치와 사회

시 정부는 시 의회가 주축이 되어 이루어진다. 시 의회는 행정과 재정의 많은 면에 있어 중앙 정부와 연결되어 있으나 지방분권적인 역사적 전통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시는 16개의 군(arrondisse-ment)으로 나뉘고 이들이 6개의 지구(secteur)로 묶여 각각의 지구에서 시장을 선출한다.

시장은 30명의 지방정부관리들에 의해 업무보조를 받는다. 이들은 각각 시의 도시계획·문화·재정·고용·교통 등의 책임자로 일하며, 다시 이들을 돕는 직원들이 별도로 있다. 국내 평균보다 높은 실업률과 많은 이주민 노동자 등으로 인해 마르세유는 공공 서비스와 관련된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범죄 발생률과 산업재해 발생률은 전국 평균을 웃돈다. 반면 자살률과 정신병 발생률은 전국 평균 이하로 보고되어 있다. 이곳에는 북부 병원과 티몬 병원 등 2개의 대학종합병원이 있다.

프로방스대학교(University of Provence)
프로방스대학교(University of Provence)

프로방스대학교는 1968년 엑스마르세유제1대학·엑스마르세유제2대학·엑스마르세유제3대학으로 나누어졌으며 대학 본부는 구 항구 근처에 있다. 뤼미니에는 국립건축학교·주립미술학교·시립경영학교가 설립되어 있다.

마르세유 문화

마르세유에는 어린이 박물관을 포함해 여러 개의 박물관이 있다. 구 마르세유 박물관은 1960년 시청 옆에 설립되었다. 구 항구의 동쪽에 위치하는 캉티티 박물관에는 동양 예술품, 지방 도자기, 현대의 미술품 및 조각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시 당국은 알제리를 비롯한 다른 북아프리카 나라들과 문화교류를 활성화하는 등 문화발전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시는 건축물이 증가함에 따라 공원과 운동장 건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시내에는 현재 약 5만 석 규모의 시립 스타디움과 야외극장을 비롯해 수영장·운동장·해변 등이 있다. 특히 샤토 뒤 파로, 샤토 보렐리, 팔레 롱샹 공원은 매우 넓은 것으로 유명하다.

샤토 보렐리 공원
샤토 보렐리 공원

마르세유 역사

마르세유(Marseille)
마르세유(Marseille)
초기역사

프랑스의 대도시 중 역사가 가장 깊은 마르세유는, BC 600년경 소아시아의 포카이아 지방에서 온 그리스 선원들에 의해 마살리아로 건설된 데서 유래한다. 마살리아인들은 해안과 내륙을 따라서 무역거점을 확산시켜 나갔으며 오늘날의 니스·아를·앙티브·아그드·라시오타 같은 도시를 건설했다.

마르세유와 최대의 무역경쟁 대상이던 카르타고가 로마와 포에니 전쟁을 할 때 주민들은 로마를 도왔으며, 자신들이 리구리아 지방의 원주민을 정복할 때에는 로마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전쟁을 할 때 폼페이우스 편을 들었던 마르세유는 BC 49년 카이사르의 부관 트레보니우스에게 함락되고 말았으나 자유도시로서의 지위를 계속 지켰다. 그러나 수많은 외세의 침입과 페스트 병이 지나간 몇 세기 동안은 폐허가 된 도시에 불과했다.

10세기에는 프로방스 자작 가문의 보호하에 도시가 십자군 원정의 거점이 되면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후 점차 시민들은 자치권을 얻게 되었으며, 13세기에는 구 항구를 중심으로 공화국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1245년과 1256년 앙주공 샤를이 자신의 통치권을 주장했던 것을 제외하면, 프로방스 백작 가문은 많은 자치권을 허용했다. 1423년 아라곤의 알폰소 5세가 침략한 뒤 프로방스의 르네 왕이 도시를 복구했다. 1481년 프로방스 지방이 프랑스 왕국의 일부로 통합되었을 때, 마르세유는 독립된 행정체제를 고수했다.

16세기 종교전쟁 동안에는 종교가 로마 가톨릭이었으므로 프로테스탄트였던 앙리 4세를 왕으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절대군주제를 반대해 일어났던 1648~53년의 프롱드 내란 때 도시는 이전에 누렸던 자유를 되찾고자 항거했으며, 루이 14세에 대항하여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왕은 시의 독립적인 성격을 억누르기 위해 구 항구 남단에 포르생니콜라라는 성곽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같은 해에 시는 그 성곽 너머의 서쪽 내륙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마르세유는 프랑스 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는데, 1792년에 파리로 진군해간 혁명가들이 부르던 행군가가 〈라 마르세예즈 La Marseillaise〉라는 이름으로 널리 퍼져 오늘날의 프랑스 국가가 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마르세유가 북아프리카 해적의 정벌(1815~35), 알제리 정복(1830), 수에즈 운하 개통(1869) 등에 힘입어 '제국의 항구'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간선도로 및 기념물 등은 바로 이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심각했던 용수문제는 뒤랑스 강에서 물을 끌어오는 계획(1837~48)이 성공적으로 완료됨에 따라 해결되었다. 나폴레옹 통치 당시, 한때 대륙봉쇄령에 의해 상업활동이 크게 위축된 적도 있었으나 나폴레옹 3세 치하에서 강력한 공화국의 형태를 유지했다.

오늘날의 도시

1942년 11월부터 1944년 8월까지 독일군에게 점령되었으며, 줄곧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의 중심지가 되어왔던 까닭에 1943년 구 항구와 파니에르 지구가 파괴되었다. 1944년 8월에는 독일군의 대 지뢰작전에 의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전후로는 전쟁 동안 파괴된 지역을 재건하고 산업을 육성시키며 포스를 중심으로 하는 항만 공업단지를 건설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유럽의 대서양 쪽 관문인 로테르담과 경쟁을 하면서 마르세유는 대 경제 지역구인 론알프코트다쥐르의 중심지로서 위치를 굳혀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