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운시

두운시

다른 표기 언어 alliterative verse , 頭韻詩

요약 두운법을 우연적인 장식물로서가 아니라 기본적인 구성원칙으로 두는, 게르만 제어의 초기 시 형태.

두운법은 거의 모든 시에 공통적인 기법이지만 인도유럽어족 중에서 두운을 엄격한 강세원칙 및 음절의 장단부호와 함께 지배적 원칙으로 쓰는 언어들은 고대 스칸디나비아어, 고대 영어(700~1150), 고대 색슨어, 고대 고지 독일어(800~1100), 고대 저지 독일어뿐이다. 게르만어의 두운시행은 2개의 불완전행(半行)이 휴지(休止 caesura)를 사이에 두고 분리되어 있다. 중간에 있는 휴지의 전반부 반행에는 1~2개의 두운 글자가 있는데 이것들은 다시 후반부 반행의 첫번째 강세음절과 두운을 맞춘다.

두운은 강세음절에 오기 때문에 비강세음절이 두운글자로 시작한다면 두운이 효과적이라고 볼 수 없다. 중세에 들어서서 두운시는 라틴어 찬가에서 유래한 압운(rhyme)의 도입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저지 독일어에서는 순수한 두운시가 900년 이후 사라진 것으로 보이며 고대 고지 독일어에서도 그무렵 압운시가 두운시를 대신하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1066년(노르만계 프랑스인들이 영국을 정복한 시기) 이후 엄격한 구조적 원칙으로서의 두운이 서부지역을 제외하고는 발견되지 않는다. 두운법은 여전히 중시되었지만 두운시행은 점차 형식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즉 후반부 반행은 1개 이상의 두운으로 된 단어들로 구성되는 일이 잦아졌으며, 다른 형식상 제한들도 점차 무시되었다. 라야몬의 13세기 초엽의 시, 〈농부 피어스 Piers Plowman〉·〈가웨인 경과 녹색기사 Sir Gawayne and the Grene Knight〉·〈진주 The Pearl〉 등 좀더 후대의 시들은 각운(end rhyme)을 널리 썼다. 때로는 모든 시행에 압운이 쓰였으나 일정하게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압운이 사용되어 두운이 깨지기도 했다. 플로든 전투(1513)를 소재로 한 작품 〈스코틀랜드 전장 Scottish Fielde〉을 영국의 마지막 두운시로 본다.

900년 이후의 후기 스칸디나비아 시인들은 여러 스탠자(stanza) 형식의 시들에서 두운과 압운 그리고 모운을 구분하지 않고 섞어서 사용했다. 따라서 1000년 이후 고대 스칸디나비아어 두운시는 사실상 아이슬란드에서만 계속 그 명맥이 유지되었다(→ 아이슬란드 문학). 켈트 시에서는 초창기부터 두운을 중요시했지만 부차적인 원칙으로 보았다. 웨일스 시에서는 두운시로부터 복잡한 음유시 컹하네드(cynghanedd)가 생겨났다(→ 켈트 문학, 컹하네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