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노동

다른 표기 언어 work , 勞動

요약 사회의 유지에 필수적인 생산활동을 가리키는 경제학 및 사회학의 용어.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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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산업혁명 이전의 노동의 조직화
  2. 선사시대
  3. 고대사회
  4. 중세사회
  5. 16~18세기
  6. 산업혁명 이후의 노동의 조직화
  7. 대량생산의 도래
  8. 대량생산의 발전
  9. 자동화
  10. 선사시대의 노동
  11. 고대사회의 노동
  12. 중세사회의 노동
  13. 16~18세기의 노동
  14. 산업혁명으로 인한 대량생산시대의 노동
  15. 대량생산의 발전과 노동
  16. 자동화시대와 노동
업무(work)
업무(work)

노동은 식량·의복·집 등 인간의 기본적인 물리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기능을 한다.

산업혁명의 개시와 18, 19세기의 기계의 발전이 결국 공장과 들판에서 고된 육체노동을 제거했지만 노동은 여전히 쾌락과는 다른 것으로 간주되며 노동과 놀이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는 고도의 산업사회인 오늘날까지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산업혁명 이전의 노동의 조직화

선사시대

인류발전의 초기단계에서 노동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 곧 식량과 관련된 단순한 일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도 기본적인 노동분업이 존재했다.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사냥을 했으며 노인들, 어린이들과 함께 여자들은 채집활동을 했다. 이때는 한 가지 일만을 하는 전문가도, 진정한 의미의 분업도 없었지만 종종 노동의 조직화가 필요했다. 사냥과 물고기잡이에는 집단구성원들 사이에 다양한 수준의 협동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공동활동은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지녔다. 획득된 식량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져야 했으며 지도자는 집단 전체를 조직하고 지도할 필요가 있었다.

가족이 기본적인 사회집단이었기 때문에 부족의 우두머리로부터 부족민에 이르기까지 친족관계가 '관리상의 서열'의 기초를 이루었다.(수렵채취 사회)

더 복잡한 형태의 노동의 조직화는 도기의 발전과 더불어 이루어졌다. 도기제작에 적당한 점토는 어디에나 다 있지만 가장 좋은 질의 점토는 고르게 분포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일부 지역의 사람들은 교환용 도기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기술의 숙련과 전문화된 도구가 도기생산을 촉진했기 때문에 아마도 더 높은 수준의 전문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실잣기나 천짜기 같은 기술 역시 협동작업을 요구했다. 농경은 최초의 전문가들, 곧 철제도구제조자와 무기제조자를 부양할 수 있는 약간의 잉여생산물을 제공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노동의 조직화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석기도구와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부싯돌은 넓은 지역에 고루 매장되어 있었지만 구리는 그렇지 못했다. 초기의 몇몇 청동유물과 동광(銅鑛)들은 기후와 지형 면에서 농경이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지역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지질적 증거는 원시시대에 광물을 캐고 금속물건들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부분적으로라도 농사를 지었던 것이 아니라 이 일만을 전문적으로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동광은 일반적으로 산악지대에 있기 때문에 금속세공인과 평지의 농경민 사이에 완성된 금속품들의 교환이 이루어져야 했다. 따라서 금속세공인과 그 가족들은 농사짓는 사람들로부터 잉여생산물을 제공받아야 했으며, 농경이 생존수준 이상으로 발전할 때에만 이들 전문가들이 존속할 수 있었다.

최초로 야금술이 발전했던 곳이 나일·티그리스·유프라테스·인더스 강 등 거대한 강 유역의 관개농업지대 부근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지역들은 전부 1㏊당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곳이었다. 농업분야의 잉여생산물과 청동기의 결합은 중동지역의 거대한 관개문명의 발전에 기초를 마련했다. 이후 18세기에 기계화·산업화가 일어나기 전까지 5,000년 동안 노동의 조직화는 이들 거대한 강줄기를 따라 발전했다.

고대사회

대규모 관개사업이 노동의 조직화, 계급의 출현, 높은 전문화 정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리적 특성, 천연자원의 분포, 기후, 농작물과 가축의 종류, 이웃 부족들과의 관계 등 몇 가지 요인들 역시 이에 기여했다. 역사시대 이후 일정한 기능을 담당했던 상이한 사회적·경제적 계급들이 존재했다. 계급구조의 정점에는 아마도 이웃 민족들을 정복한 전사계급으로부터 발전해나온 것으로 보이는 왕과 귀족들이 있었다. 이들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람들로 사제계급이 있었다. 사제들은 문자와 수학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관리들을 도와 경제활동을 지도하고 서기와 필사자들을 감독했다.

상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생산한 물건들을 분배하고 교환했다. 전문적으로 물건을 생산하는 장인들은 경제적으로 낮은 계급에 속했으며 사회조직의 맨 밑바닥에는 전쟁노예와 채무노예가 있었다.

고대사회에 있어서 노동의 조직화의 몇몇 특성들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엄격한 계급구조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직업과 지위의 세습적 성격이 있었다. 로마 제국에서는 부재지주가 소유한 대농장(라티푼디움)과 작물의 특화(주로 포도주와 올리브유)로 인해 가족 단위의 소농들이 몰락하게 되었다.

전문화된 수공업 분야에서는 경제적 성장, 취향의 세련화, 시장확대 등으로 인해 대규모 작업장에서 한 가지 물품만을 생산하게 되었다. 초기의 전문수공업자는 자신들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나 찾아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수공업자가 한 곳에 정착하는 대신에 상인들이 이들의 생산물을 시장에 제공하게 되었다. 경제적 발전 결과 수공업 분야가 늘어났으며 한 도시 또는 한 나라의 일정지역에서는 한 분야의 수공업자들만이 활동하는 등 지역적인 분업이 생겨났다.

특히 기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고대사회에서 행해진 기념적인 공공사업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노동 조직화의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자의 대피라미드는 이집트인들이 바퀴로 움직이는 기구, 곧 도르레에 대해 알기 전인 BC 2500년경에 만들어진 것이다. 약 5.3㏊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이 피라미드는 각각 2,300㎏이나 나가는 화강암 또는 석회암 돌덩이들이 230만 개나 쌓여 이루어진 것이다. 채석방법, 돌의 운반, 건축방법에 대한 완전한 역사적·고고학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증거조차 서로 모순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토대 위에서 노동을 조직하려는 요구가 훌륭하게 충족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대피라미드를 쌓는 데만 약 10만 명의 사람들이 20년 동안 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만한 규모의 사람들에게 거처와 음식물을 제공하는 문제만도 높은 수준의 관리기술을 요구했다.

중세사회

서양에서 노동의 조직화와 분업은 로마 제국 시기에 정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지만 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오히려 쇠퇴하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 후기에 들어 사회적·정치적 분열과 경제적 쇠퇴로 인해 서부 유럽 대부분은 소규모 경제, 자급자족적인 경제단위로 되돌아갔다. 이때문에 전문생산을 위한 시장이 대부분 사라졌다. 그러나 봉건적 사회구조가 새로이 확립됨에 따라 상업과 도시가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각 지역 사이의 상업이 되살아났으며 점차 늘어나는 시장의 수요에 답하기 위하여 전문 수공업이 다시 나타났다.

농업·동력·수송·야금·기계 분야의 중요한 기술적 혁신을 통해 전문화의 영역들이 더욱 넓어졌다. 부의 증대, 기업의 확대와 새로운 시민 계급의 출현은 합리적인 생산관리의 기초를 제공했으며 산업화를 촉진했다.

중세사회의 계급구조는 분업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었다.

귀족 계급인 봉건영주는 전사이자 보호자였고 중요한 소비자였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노동의 조직을 담당하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민은, 다양한 법적 지위를 가지고 있던, 농민들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조상들이 대대로 경작하던 토지에 묶여 있는 농노들로서 장원의 영주에게 일정한 노동과 의무를 지고 있었다. 영주는 그 대가로 농노들을 보호했다.

장원의 자급자족적인 성격, 농작물 재배와 가축사육에 기초를 둔 혼합농경의 발전, 바퀴가 달린 무거운 쟁기 및 고정된 마구(馬具)와 같은 기술적인 개량, 토지보유와 소작지 분할체계 등 상호연관된 네 가지 요소들이 중세 농업의 노동조직화를 결정했다.

각 농가는 거의 모든 필수품을 생산했으며 영주가 독점하고 있던 방아간이나 포도 압착기 등을 사용한 뒤 화폐가 아닌 일정 지분의 현물로 대가를 지불했다.

토지에 묶여 있는 농노들과는 달리 도시민들은 신분이 자유로웠다. 일부는 장거리무역을 비롯한 상업에 종사했으며 상인동직조합(merchant guild)과 같은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가장 높은 기술수준과 지위를 가지고 있는 장인(匠人), 중간 수준의 수공업자인 직인(職人), 초보자들인 도제(徒弟)로 구성된 수공업자조합(craft guild)에 속한 소상인이자 수공업자들이었다.

수공업자조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규율이었다. 특정 수공업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과 조건을 통제함으로써 수공업자조합들은 노동력의 공급을 제한할 수 있었다. 또한 임금·시간·도구·기술 등에 있어서도 규제를 가함으로써 노동조건과 생산과정을 조절했다. 품질정도와 가격 역시 정해졌다. 그 성격상 독점적인 수공업자조합은 개별조합이든 결합체이든 간에 지역상권을 완전히 지배하려고 했으며 외부인들을 배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수공업자조합들은 정치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는데 일부지역에서는 시의회 의원 대다수를 선출할 수 있는 권리만이 아니라 일정한 정치적 지배력까지 장악했다. 점증하는 원료에 대한 요구와 시장의 성장으로 인해 수공업자들은 원료와 시장의 확보를 위해 상업에 치중하게 되었다. 어떤 경우에나 장인들은 다른 수공업분야의 사람들을 고용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당연히 분쟁이 일어났다.

시장의 확대는 동일 수공업 내의 계급분해를 초래했다.

상업의 기능이 점점 더 중요해졌으며 수공업조직 내부의 특정 개인들에 의해서도 행해지게 되었다. 이들은 상인들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던 수공업자들이었다. 동시에 원래는 상인들만의 대표자였던 상인동직조합이 수공업자조합을 흡수한 뒤 점점 이들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수공업자조합은 내부적으로도 분해되기 시작했다.

장인들은 점점 커지는 시장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이 유지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직인들을 자신들의 테두리 안에 받아들이기보다는 이들을 임노동자로 고용하기를 원했다. 따라서 장인-직인-도제의 관계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로 변했으며 고용인들이 수공업품을 생산하는 동안 장인들은 상업에 몰두했다. 이렇게 해서 수공업자조합 체제의 붕괴와 함께 초기 산업체제의 발전을 위한 기초인 원시적인 공장제 수공업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배제된 직인들은 결국 수공업자조합의 규제가 미치지 않는 도시 외부에서 임금을 받고 기술을 파는 자유노동자가 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노동조직화는 직물산업분야에서 나타난 '전대제'(轉貸制)라는 새로운 방식과는 크게 달랐다. 직물업자들이 가공되지 않은 양모를 구입하여 농민들에게 제공하면 농민들은 양모를 빗질하여 털실로 만든 뒤 직물을 짰다.

그다음 직물업자는 숙련된 수공인의 도움을 받아 옷감을 완성했다. 농민들은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재료를 가지고 노동하게 되었기 때문에 점점 더 종속적인 지위로 변했다. 반면에 노동은 여전히 가내수공업적 형태로 가정 내에서 행해졌으며 비인격적인 규율아래 공장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작업속도에 맞추어 이루어졌다. 더구나 직물업자는 실제적인 노동과정을 직접 감독하지 않고 단지 주문내용을 점검하고 일련의 다양한 기술적 과정을 연결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직물을 전대한 직물업자는 전체 생산과정을 감독할 수 있었으며 19세기의 산업자본주의를 향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거대한 전국적 시장의 확립을 통한 상업 규모상의 변화만이 중세의 노동조직을 변화시킨 것은 아니다.

기술의 발전, 특히 풍력과 수력의 이용에서 기인한 변화 역시 중요한 요인이었다. 수차와 풍차 같은 장치를 통해 인간의 노동력을 기계의 힘이 대신하게 되었다. 10세기말부터 곡물을 빻는 일에 쓰이던 수차가 가죽 무두질, 올리브유 짜기, 나무켜기, 무기연마, 가루 만들기, 멧돌, 곡물을 이겨서 맥주 만들기 등 여러 가지 산업과정에 이용되었다. 서부 유럽에서 최초의 수평 회전축 풍차가 만들어진 것은 1185년이었지만 단기간 내에 영국 북부에서 중동지방까지 퍼져나갔다.

16~18세기

근대 초기(산업혁명 바로 전 시기인 16~18세기)에 이르자 다음과 같은 요소에 힘입어 산업이 부흥하게 되었다.

① 부분적으로는 신대륙으로부터 유입된 귀금속과 점증하는 상업적·금융적 활동에서 비롯된 부의 증가, ② 수요 곧 시장의 확대, ③ 새로운 생산물의 도입, ④ 새로운 기술의 발전 등이 그것이다. 그결과 노동조직상의 변화와 더불어 매뉴팩처의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17세기 후반과 18세기초에 인구가 늘어나면서 상품에 대한 새로운 수요가 생겨났으며 도시의 시민 계급 곧 부르주아지의 생활수준이 높아졌다.

또한 중세 봉건영지가 왕국으로 통합되면서 시장의 규모가 더욱 커졌다. 큰 관할구역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게 되면 봉건적 지배에 의해 생겨났던 교역과 상업상의 장벽들이 대부분 제거되었다. 수많은 새로운 생산물들(아시아의 향료, 신대륙의 사탕수수 등)이 탐험가를 통해 직접 유럽으로 들어오거나 원격지무역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어왔다. 새로운 상품에 대한 수요는 유럽의 생활수준 향상, 새로운 생활양식의 출현과 함께 더욱더 늘어났다.

수공업적 생산으로는 더이상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으므로 동업조합은 해체되었다.

주로 수력과 풍력 등 동력의 광범위한 이용에서 일어난 산업양식상의 변화는 새로운 기계장치의 도입으로 인한 변화보다 더 컸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대규모 생산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노동조직화상의 변화 곧 공장제 생산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17, 18세기의 원시적인 공장제 수공업은 직물을 비롯한 일부 산업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세의 동업조합이 해체되고 가내수공업 역시 대규모 생산조직에 의해 밀려났으며 상업조직이 크게 발전했다. 금융·보험·대외무역 분야에 새로이 도입된 기구를 통해 자본축적이 가능해졌으며 산업분야에 대한 투자가 용이해졌다. 산업자본주의화 과정에서 소수의 장인들이 임노동자계급으로 몰락했지만 대다수는 자본가로 발전했다.

바로 이것이 산업혁명의 시작이었다.

18세기 새로운 기계가 도입된 결과 예전의 수공업 전통과는 크게 다른 방식을 통해 작업기능을 합리적으로 조직해야만 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 The Wealth of Nations〉에서 핀 생산공장을 예로 들면서 새로운 생산체계의 의미에 대해 고전적인 평가를 내렸다. "한 사람이 철사를 뽑아낸다. 다음 사람이 철사를 똑바로 펴면 그 다음 사람이 철사를 자른다. 또 다음 사람이 철사의 한쪽 끝을 뾰족하게 만들면 그 다음 사람은 철사의 다른 쪽 끝을 갈기 시작한다.

핀의 머리를 만드는 일만도 두세 가지의 상이한 작업이 요구된다. 핀을 늘리는 것은 특정한 일이며 핀을 하얗게 색칠하는 것 역시 또 다른 일이다. 또한 그것들을 종이에 싸는 것까지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핀 하나를 만드는 데만도 18가지의 상이한 기능들이 필요하다." 스미스는, 노동자가 이런 식으로 핀을 생산하지 않는다면 하루에 1개의 핀도 만들기 어려울 것이며 하루에 20개의 핀을 생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새로운 생산체계 덕분에 이 핀 공장은 하루에 4,800개나 되는 핀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계속해서 대량의 상품생산에 대한 요구가 있을 때에만 기계가 제 기능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에 기계의 존재는 기계의 소유자인 기업가와 고용인 사이에 분업을 초래했다. 기업가는 노동자들을 감시하면서 그들이 기계의 작업속도에 맞추어 일하도록 강제했다. 아직 완전히 기계화되지 않은 기업에서조차 산업혁명의 초기단계에서 공장의 작업규율의 이점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났다.

조사이어 웨지우드는 '가장 엄격하게 노동을 절약하기 위한' 도기공장을 영국 에트루리아에 세웠다. 그의 공장은 도기들이 빚어진 뒤 차례로 칠을 하는 방, 가마니가 있는 방 등을 지나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완성된 도기의 상태를 점검하는 방에서 생산물 목록이 작성되었다. 도기들은 마지막으로 보관창고에 옮겨졌다. 이전까지 도기공장의 노동자들은 여러 번 작업내용을 바꿔야 했다.

그러나 웨지우드의 도기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일정한 자리를 지정받은 뒤 오직 1가지 일만을 했다. 성인 남녀와 어린이를 다 합쳐 278명이 고용되었는데 6명만이 지정된 자리가 없었으며 나머지는 전부 한 분야의 일을 전문적으로 했다.

당시 대부분의 공장들, 특히 직물공장들에서 노동자들의 작업조건이 형편없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대부분 숙련된 기술도 없는 가난한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싼 임금을 받으며 매일 14~16시간씩 일을 했는데 시끄럽고 냄새나며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작업을 반복했다. 빈민가에 있는 이들의 집 역시 건강에 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사회문제'가 대두된 것이 바로 이때이다. 어째서 엄청난 양의 상품을 생산해낼 능력이 있는 나라에 계속해서 빈곤이 존재하는가? 이러한 질문과, 그뒤 노예제의 실시와 관련된 의문의 해답을 찾기 위한 노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서구 사회와 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 새로운 사회철학과 정치 운동의 발생을 가져왔다.

산업혁명 이후의 노동의 조직화

대량생산의 도래

대량생산이란 단위당 낮은 가격으로 많은 양의 상품을 생산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대량생산된 상품은 정확하게 만들어진 상호교환할 수 있는 부품들에 의해 규격화된다. 대량생산 과정 자체는 대량의 상품, 다양한 제조과정에 걸친 원료이동에 관한 세밀한 조직화, 엄격한 품질검사, 세분화된 분업 등을 얻기 위한 기계화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 대량생산을 위한 물질적 기초는 기계제조산업(기계를 만드는 기계의 생산)의 발전에 의해 주어졌다. 정확한 기계장치 덕분에 낮은 원가와 적은 노동력으로 똑같은 부품을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또다른 중요한 요소는 조립라인이라는 새로운 조직화수단이다.

조립라인의 원형은 고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지만 진정한 조립라인은 19세기 미국의 육류포장산업에서 찾아야 한다. 당시 육류포장 공장들에서는 한 노동자에서 다음 노동자에게로 고기덩어리를 옮겨주기 위해 트롤리(trolley)를 이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트롤리들이 체인에 연결되고 동력을 이용해 노동자들에게 고기덩어리를 일정한 속도로 옮겨주기 시작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조립라인이 생겨났다. 노동자들이 고정된 위치에서 기계가 지시하는 속도에 맞추어 작업했기 때문에 불필요한 움직임이 최소화되었으며 놀라울 정도로 생산성이 높아졌다.

육류포장산업의 작업방식에 주의를 기울이던 미국의 자동차제조업자 헨리 포드는 1913년 조립라인을 도입했다.

포드가 도입한 방식에 의해 생산시간이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동차 1대당 가격이 크게 낮아졌기 때문에 노동자들까지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포드가 이룩한 성과에 의해 그의 경쟁자나 자동차 부품업자 모두가 그의 기술을 이용하자 조립라인 방식은 미국 대부분의 산업에 파급되었다. 그결과 생산성이 크게 높아졌고 저임금의 비숙련노동자들이 숙련노동자들을 대신하게 되었다.

대량생산의 발전은 3가지 주요방식으로 노동조직화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첫째, 작업이 세분화되었으며 이미 기술이 기계 속에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비숙련노동자, 적어도 반숙련노동자가 작업을 수행하게 되었다. 둘째, 수많은 감독자와 관리자가 필요해질 만큼 기업이 성장하게 되었다. 셋째, 점증하는 작업의 복잡성으로 인해 대규모 배급망과 판매인력뿐만이 아니라 엔지니어, 화학자, 더 나아가서는 산업심리학자까지 필요해졌다.

또한 대량생산으로 인해 국제분업화 경향이 더욱 강화되었다.

대규모 공장들이 외국의 원료를 요구하게 된 동시에 국내시장 역시 외국의 소비자들을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따라서 일부 국가들은 원자재를 수출하고 완제품을 수입하는 대신에 다른 국가들은 그 반대가 되었다. 이제까지 주로 공산품을 수입하는 농업국가였던 일부 국가들, 특히 아시아와 남아메리카의 나라들이 1970~80년대에 공업화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조립라인 공정에 필요한 기술을 쉽게 습득했으며 개발도상국들의 생활수준이 낮기 때문에 선진국들보다 낮은 임금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개발도상국들에서도 수많은 대기업에서 일부 또는 전체작업과정을 조립라인화하기 시작했다. 그결과 이 나라들은 세계 경제체제에 빠른 속도로 통합되고 있다.

대량생산시대에 농업 역시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19세기초까지도 농업은 낡은 기술과 노동 조직을 이용하는 주로 가족단위의 노동이었다. 쟁기나 파종기 같은 약간의 기술적 혁신이 있기는 했지만 1인당 산출량은 비교적 적었다.

19세기 후반과 특히 20세기에 소수의 농민들이 전체 국민의 식량을 생산하던 일부 선진국에서 농민 1인당 산출량이 크게 늘어났다. 개선된 동력원, 수확기·콤바인과 같은 기계들, 경작·가축사육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 개선된 식량 가공·저장, 더욱 효과적인 비료와 농약, 농업에 대한 기업경영기술의 이용 등 과학과 기술 분야의 일련의 진보가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큰 변화들이 일어났다.

농업의 기업화는 대농장들이 소농을 대신하게 됨을 의미하는데 이는 농업노동자들에 대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대 이래 주류를 이루던 소농경영에서 적은 일손만을 고용한 농민들은 농작물을 심고 재배하여 수확할 때까지 모든 일을 스스로 다 했으며 추수기처럼 바쁜 철에는 이웃들끼리 서로 도우며 일했다. 그러나 산업화와 함께 노동자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고 농업의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한 해 농사에 필요한 농업노동자의 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과일이나 채소처럼, 비슷한 시기에 사람손으로 직접 수확해야 하는 작물을 심고 거두어 들일 때는 여전히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미국의 과일과 채소 생산량의 거의 절반을 생산하는 플로리다·텍사스·캘리포니아에서는 수확기에 약간의 미국 출신 노동자들과 함께 주로 멕시코와 카리브 해 연안의 국가들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 이용된다.

그러나 도시노동자들 가운데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도시를 떠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계절노동자의 고용은 여러 가지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문제를 일으킨다. 이주노동자들은 일반적으로 낮은 임금을 받을 뿐만 아니라 부가급부도 전혀 받지 못한다. 이들의 생활수준과 노동조건은 평균 이하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국의 더욱 열악한 노동조건과 생활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주노동자로 일하는 경우가 흔하다.

19세기에는 서비스 분야의 노동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청소부에서 사업상담자, 트럭 운전수에서 은행가, 즉석요리점의 접대원에서 호텔 지배인, 사무원에서 광고회사 이사, 유치원 교사에서 대학 교수, 간호보조사에서 의사, 거리의 청소원에서 고위관료들에 이르는 공무원 등 굉장히 다양한 집단들이 속한다.

대량생산의 발전

20세기초에 산업공학 또는 과학적 경영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발생했다.

그결과 계획 수립과 조정이 생산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떠올랐다. 공장의 경영진들은 노동자가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지를 결정하고 노동자에게 적절한 공구와 훈련을 제공하며 높은 생산실적을 올리도록 자극을 주기 위해 애썼다. 각 작업은 개별 구성동작들로 분해되었고 어떤 동작이 필수적인지 분석되었으며 스톱 워치를 이용해 노동자들이 특정동작을 행할 때 소요되는 시간이 측정되었다.

불필요한 동작을 제거함으로써 기계적으로 일하는 노동자는 더욱 많은 상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인' 접근법은 인간적인 요소를 무시했기 때문에 노동과정은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가 아니라 기계와 기계의 관계로 변했다.

과학적인 경영이론가들은 노동자들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기를 원했으며 작업이 최소한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대신에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기를 원했다. 또한 이들은 노동자들이 물리적 동작과 사고과정에 대한 규격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이 고안해낸 체계는 인간의 감정과 동기를 무시했다. 또한 일부 고용주들이 임금은 적게 주면서 생산량을 매겨놓고 생산속도를 높이도록 만들었다.

과학적인 경영이론은 노동자들로부터 노동조건과 기능에 대한 발언권을 빼앗았을 뿐 아니라 심리적 피해, 육체적 손상, 품질·생산성의 저하와 함께 노동자들을 과민하게 만들고 피로를 유발했다. 당시 산업공학자들은 노동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노동과 기계의 기술이 최대의 가능성을 발휘하도록 만드는 문제에 직면했다.

사회과학분야에서 부분적인 해결책이 제시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산업심리학이 대두했다.

산업심리학의 주요전제는, 대량생산기술이 직접적인 작업환경과 동료 및 감독자에 대한 관계 등 양측면에서 노동자에게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회사에 소속감을 느낄 수 있도록 노동자들과 경영진의 간담회와 같은 형식의 상담요법이 도입되었다. 산업공학자와 사회학자들은 동기부여와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또다른 접근법을 제시했다.

이런 방법 등에는 지루함을 덜기 위한 직무변경(job alternation) 방식과 노동자가 1가지 일만이 아닌 몇 가지 일을 바꿔가면서 하는 직무확대(job enlargement) 방식, 일이 더욱 많은 흥미를 일으키도록 하는 직무강화(job enrichment) 방식 등이 있다.

자동화

대량생산 발전의 논리적인 귀결은 자동화이다.

이상적인 형태의 자동화는 모든 육체노동의 제거와 인간의 기술을 능가하는 정밀성 및 질을 보장할 수 있는 자동관리의 도입을 의미한다. 자동화를 '혁명적인' 발전으로 묘사하지만 사실 그것은 산업혁명과 더불어 시작된 기계화 경향의 최종적인 결과에 해당한다. 자동화는 생산의 안정성, 품질관리, 불량품의 감소, 공장의 안정성 향상, 관리의 집중화 등을 보장한다. 그러나 자동화의 도입 초기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효과는 비용감소와 생산성의 향상이다.

산업혁명의 초기단계가 대규모 시장과 동일한 의미의 대량생산 조립라인으로 귀결된 반면에 컴퓨터의 도입은 소량 주문생산체계가 자리잡도록 했다.

제조업자들은 시장의 제한된 부분에만 상품을 공급하는 대신 시장의 수요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동화의 잠재적 가능성을 통해 컴퓨터를 이용한 설계제조자동화시스템인 CAD/CAM이라는 2가지 새로운 상호연관 분야가 생겨났다.

자동화는 생산의 유연성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한 생산모델을 다른 생산 모델로 바꾸는 데 소요되는 리드타임(lead time)을 크게 단축했다. 또한 값비싼 보관비용이나 예비부분에 대한 투자없이 계속해서 재료공급이 가능하도록 물품목록을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효율성을 통해 생산비용을 줄일 수 있으며 또한 자동화를 처음으로 도입한 일본이 세계시장에서 계속 경제력을 강화할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자동화가 완전히 로봇화의 꿈을 실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그 꿈은 아주 가까워졌다. 오늘날 로봇은 용접이나 도장(塗裝)과 같은 노동자의 건강에 유해한 불쾌하고 위험한 일부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로봇은 1t 이상의 짐을 손쉽게 들어 올릴 수 있으며 얼어붙는 듯한 추위나 아주 높은 온도에서도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 자동화는 노동자들의 육체적·정신적 노동 가운데 많은 부분을 제거했으며 노동자들이 기계를 움직이는 사람에서 기계를 감독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했다.

자동화는 노동자와 노동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현재까지 가장 효율적인 관리수단의 하나는 일본에 도입된 방식을 약간 변형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공장들에서는 조립라인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노동자들이 작업을 중단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사실 일본의 기업들에는 '품질평가반'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작업과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거칠 수 있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생산성과 품질이 모두 향상되었다. 품질과 노동생산성을 동시에 높이는 것과 비슷한 방법은 스웨덴의 자동차공장에서 시작된 집단조립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방식에서는 각 노동자들이 부분적인 작업과정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모든 노동자들이 전체 생산품에 대해 연대책임을 진다.

조립라인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각 노동자들은 버튼을 누른 뒤 일을 멈추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려도 된다.

또다른 중요한 발전, 즉 수많은 여성 노동력의 출현이 20세기에 이루어졌다. 19세기에 남성들이 '훌륭한 부양인'의 역할을 맡게 되자 여성들은 가사를 전담하는 신세로 밀려났다. 여성들이 누릴 수 있는 권위는 가정주부라는 지위뿐이었다.

결혼하여 자녀를 양육하고 집안일을 하는 여성들에 대한 존중의 전통은 19, 20세기를 훨씬 지나서까지도 계속되었다. 19세기말경 전력이 이용된 뒤 기술발전에 의해 세탁기나 진공청소기와 같은 가사노동을 절약해주는 기구들이 가정에 도입되었다. 이런 기계들이 가사노동의 성격을 변화시켰지만 주부들의 가사노동 시간을 거의 줄이지 못했다.

19세기말부터 경제적·사회적 변화로 인해 관리직과 서비스직이 늘어나게 경영과 서비스업이 성장하게 되었다.

공공교육의 확대를 통해 많은 교사들이 필요해졌으며 성장하는 기업체들과 판매부문에서 더 많은 사무직노동자들과 판매인력을 요구하게 되었다. 여성들은 남성들처럼 가족의 생계를 전담할 필요가 없다는 이론에 근거를 둔 저임금의 조건을 받아들였고 이에따라 생겨난 남녀임금차가 동일직종에서조차 계속 시행되고 있다.

선사시대의 노동

인류발전의 초기단계에서 노동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 곧 식량과 관련된 단순한 일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도 기본적인 노동분업이 존재했다.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사냥을 했으며 노인들, 어린이들과 함께 여자들은 채집활동을 했다.

이때는 한 가지 일만을 하는 전문가도, 진정한 의미의 분업도 없었지만 종종 노동의 조직화가 필요했다. 사냥과 물고기잡이에는 집단구성원들 사이에 다양한 수준의 협동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공동활동은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지녔다. 획득된 식량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져야 했으며 지도자는 집단 전체를 조직하고 지도할 필요가 있었다. 가족이 기본적인 사회집단이었기 때문에 부족의 우두머리로부터 부족민에 이르기까지 친족관계가 '관리상의 서열'의 기초를 이루었다.(→ 수렵채취 사회)

더 복잡한 형태의 노동의 조직화는 도기의 발전과 더불어 이루어졌다. 도기제작에 적당한 점토는 어디에나 다 있지만 가장 좋은 질의 점토는 고르게 분포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일부 지역의 사람들은 교환용 도기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기술의 숙련과 전문화된 도구가 도기생산을 촉진했기 때문에 아마도 더 높은 수준의 전문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실잣기나 천짜기 같은 기술 역시 협동작업을 요구했다. 농경은 최초의 전문가들, 곧 철제도구제조자와 무기제조자를 부양할 수 있는 약간의 잉여생산물을 제공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노동의 조직화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석기도구와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부싯돌은 넓은 지역에 고루 매장되어 있었지만 구리는 그렇지 못했다. 초기의 몇몇 청동유물과 동광들은 기후와 지형 면에서 농경이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지역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지질적 증거는 원시시대에 광물을 캐고 금속물건들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부분적으로라도 농사를 지었던 것이 아니라 이 일만을 전문적으로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동광은 일반적으로 산악지대에 있기 때문에 금속세공인과 평지의 농경민 사이에 완성된 금속품들의 교환이 이루어져야 했다. 따라서 금속세공인과 그 가족들은 농사짓는 사람들로부터 잉여생산물을 제공받아야 했으며, 농경이 생존수준 이상으로 발전할 때에만 이들 전문가들이 존속할 수 있었다. 최초로 야금술이 발전했던 곳이 나일·티그리스·유프라테스·인더스 강 등 거대한 강 유역의 관개농업지대 부근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지역들은 전부 1㏊당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곳이었다. 농업분야의 잉여생산물과 청동기의 결합은 중동지역의 거대한 관개문명의 발전에 기초를 마련했다. 이후 18세기에 기계화·산업화가 일어나기 전까지 5,000년 동안 노동의 조직화는 이들 거대한 강줄기를 따라 발전했다.

고대사회의 노동

대규모 관개사업이 노동의 조직화, 계급의 출현, 높은 전문화 정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리적 특성, 천연자원의 분포, 기후, 농작물과 가축의 종류, 이웃 부족들과의 관계 등 몇 가지 요인들 역시 이에 기여했다. 역사시대 이후 일정한 기능을 담당했던 상이한 사회적·경제적 계급들이 존재했다.

계급구조의 정점에는 아마도 이웃 민족들을 정복한 전사계급으로부터 발전해나온 것으로 보이는 왕과 귀족들이 있었다. 이들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람들로 사제계급이 있었다. 사제들은 문자와 수학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관리들을 도와 경제활동을 지도하고 서기와 필사자들을 감독했다. 상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생산한 물건들을 분배하고 교환했다. 전문적으로 물건을 생산하는 장인들은 경제적으로 낮은 계급에 속했으며 사회조직의 맨 밑바닥에는 전쟁노예와 채무노예가 있었다.

고대사회에 있어서 노동의 조직화의 몇몇 특성들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엄격한 계급구조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직업과 지위의 세습적 성격이 있었다. 로마 제국에서는 부재지주가 소유한 대농장(라티푼디움)과 작물의 특화(주로 포도주와 올리브유)로 인해 가족 단위의 소농들이 몰락하게 되었다.

전문화된 수공업 분야에서는 경제적 성장, 취향의 세련화, 시장확대 등으로 인해 대규모 작업장에서 한 가지 물품만을 생산하게 되었다. 초기의 전문수공업자는 자신들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나 찾아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시장이 확대됨에 따라 수공업자가 한 곳에 정착하는 대신에 상인들이 이들의 생산물을 시장에 제공하게 되었다. 경제적 발전 결과 수공업 분야가 늘어났으며 한 도시 또는 한 나라의 일정지역에서는 한 분야의 수공업자들만이 활동하는 등 지역적인 분업이 생겨났다.

특히 기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고대사회에서 행해진 기념적인 공공사업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노동 조직화의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자의 대피라미드는 이집트인들이 바퀴로 움직이는 기구, 곧 도르레에 대해 알기 전인 BC 2500년경에 만들어진 것이다. 약 5.3㏊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이 피라미드는 각각 2,300㎏이나 나가는 화강암 또는 석회암 돌덩이들이 230만 개나 쌓여 이루어진 것이다.

기자의 대피라미드
기자의 대피라미드

채석방법, 돌의 운반, 건축방법에 대한 완전한 역사적·고고학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증거조차 서로 모순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토대 위에서 노동을 조직하려는 요구가 훌륭하게 충족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대피라미드를 쌓는 데만 약 10만 명의 사람들이 20년 동안 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만한 규모의 사람들에게 거처와 음식물을 제공하는 문제만도 높은 수준의 관리기술을 요구했다.

중세사회의 노동

서양에서 노동의 조직화와 분업은 로마 제국 시기에 정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지만 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오히려 쇠퇴하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 후기에 들어 사회적·정치적 분열과 경제적 쇠퇴로 인해 서부 유럽 대부분은 소규모 경제, 자급자족적인 경제단위로 되돌아갔다. 이때문에 전문생산을 위한 시장이 대부분 사라졌다. 그러나 봉건적 사회구조가 새로이 확립됨에 따라 상업과 도시가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각 지역 사이의 상업이 되살아났으며 점차 늘어나는 시장의 수요에 답하기 위하여 전문 수공업이 다시 나타났다.

농업·동력·수송·야금·기계 분야의 중요한 기술적 혁신을 통해 전문화의 영역들이 더욱 넓어졌다. 부의 증대, 기업의 확대와 새로운 시민 계급의 출현은 합리적인 생산관리의 기초를 제공했으며 산업화를 촉진했다.

중세사회의 계급구조는 분업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었다.

귀족 계급인 봉건영주는 전사이자 보호자였고 중요한 소비자였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노동의 조직을 담당하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민은, 다양한 법적 지위를 가지고 있던, 농민들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조상들이 대대로 경작하던 토지에 묶여 있는 농노들로서 장원의 영주에게 일정한 노동과 의무를 지고 있었다. 영주는 그 대가로 농노들을 보호했다.

장원의 자급자족적인 성격, 농작물 재배와 가축사육에 기초를 둔 혼합농경의 발전, 바퀴가 달린 무거운 쟁기 및 고정된 마구(馬具)와 같은 기술적인 개량, 토지보유와 소작지 분할체계 등 상호연관된 네 가지 요소들이 중세 농업의 노동조직화를 결정했다.

각 농가는 거의 모든 필수품을 생산했으며 영주가 독점하고 있던 방아간이나 포도 압착기 등을 사용한 뒤 화폐가 아닌 일정 지분의 현물로 대가를 지불했다.

토지에 묶여 있는 농노들과는 달리 도시민들은 신분이 자유로웠다. 일부는 장거리무역을 비롯한 상업에 종사했으며 상인동직조합(merchant guild)과 같은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가장 높은 기술수준과 지위를 가지고 있는 장인(匠人), 중간 수준의 수공업자인 직인(職人), 초보자들인 도제(徒弟)로 구성된 수공업자조합(craft guild)에 속한 소상인이자 수공업자들이었다.

수공업자조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규율이었다. 특정 수공업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과 조건을 통제함으로써 수공업자조합들은 노동력의 공급을 제한할 수 있었다. 또한 임금·시간·도구·기술 등에 있어서도 규제를 가함으로써 노동조건과 생산과정을 조절했다. 품질정도와 가격 역시 정해졌다. 그 성격상 독점적인 수공업자조합은 개별조합이든 결합체이든 간에 지역상권을 완전히 지배하려고 했으며 외부인들을 배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수공업자조합들은 정치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는데 일부지역에서는 시의회 의원 대다수를 선출할 수 있는 권리만이 아니라 일정한 정치적 지배력까지 장악했다. 점증하는 원료에 대한 요구와 시장의 성장으로 인해 수공업자들은 원료와 시장의 확보를 위해 상업에 치중하게 되었다. 어떤 경우에나 장인들은 다른 수공업분야의 사람들을 고용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당연히 분쟁이 일어났다.

시장의 확대는 동일 수공업 내의 계급분해를 초래했다.

상업의 기능이 점점 더 중요해졌으며 수공업조직 내부의 특정 개인들에 의해서도 행해지게 되었다. 이들은 상인들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던 수공업자들이었다. 동시에 원래는 상인들만의 대표자였던 상인동직조합이 수공업자조합을 흡수한 뒤 점점 이들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수공업자조합은 내부적으로도 분해되기 시작했다.

장인들은 점점 커지는 시장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이 유지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직인들을 자신들의 테두리 안에 받아들이기보다는 이들을 임노동자로 고용하기를 원했다. 따라서 장인-직인-도제의 관계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로 변했으며 고용인들이 수공업품을 생산하는 동안 장인들은 상업에 몰두했다. 이렇게 해서 수공업자조합 체제의 붕괴와 함께 초기 산업체제의 발전을 위한 기초인 원시적인 공장제 수공업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배제된 직인들은 결국 수공업자조합의 규제가 미치지 않는 도시 외부에서 임금을 받고 기술을 파는 자유노동자가 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노동조직화는 직물산업분야에서 나타난 '전대제'(轉貸制)라는 새로운 방식과는 크게 달랐다. 직물업자들이 가공되지 않은 양모를 구입하여 농민들에게 제공하면 농민들은 양모를 빗질하여 털실로 만든 뒤 직물을 짰다.

그다음 직물업자는 숙련된 수공인의 도움을 받아 옷감을 완성했다. 농민들은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재료를 가지고 노동하게 되었기 때문에 점점 더 종속적인 지위로 변했다. 반면에 노동은 여전히 가내수공업적 형태로 가정 내에서 행해졌으며 비인격적인 규율아래 공장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작업속도에 맞추어 이루어졌다. 더구나 직물업자는 실제적인 노동과정을 직접 감독하지 않고 단지 주문내용을 점검하고 일련의 다양한 기술적 과정을 연결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직물을 전대한 직물업자는 전체 생산과정을 감독할 수 있었으며 19세기의 산업자본주의를 향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거대한 전국적 시장의 확립을 통한 상업 규모상의 변화만이 중세의 노동조직을 변화시킨 것은 아니다.

기술의 발전, 특히 풍력과 수력의 이용에서 기인한 변화 역시 중요한 요인이었다. 수차와 풍차 같은 장치를 통해 인간의 노동력을 기계의 힘이 대신하게 되었다. 10세기말부터 곡물을 빻는 일에 쓰이던 수차가 가죽 무두질, 올리브유 짜기, 나무켜기, 무기연마, 가루 만들기, 멧돌, 곡물을 이겨서 맥주 만들기 등 여러 가지 산업과정에 이용되었다. 서부 유럽에서 최초의 수평 회전축 풍차가 만들어진 것은 1185년이었지만 단기간 내에 영국 북부에서 중동지방까지 퍼져나갔다.

16~18세기의 노동

근대 초기(산업혁명 바로 전 시기인 16~18세기)에 이르자 다음과 같은 요소에 힘입어 산업이 부흥하게 되었다.

① 부분적으로는 신대륙으로부터 유입된 귀금속과 점증하는 상업적·금융적 활동에서 비롯된 부의 증가, ② 수요 곧 시장의 확대, ③ 새로운 생산물의 도입, ④ 새로운 기술의 발전 등이 그것이다. 그결과 노동조직상의 변화와 더불어 매뉴팩처의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17세기 후반과 18세기초에 인구가 늘어나면서 상품에 대한 새로운 수요가 생겨났으며 도시의 시민 계급 곧 부르주아지의 생활수준이 높아졌다.

또한 중세 봉건영지가 왕국으로 통합되면서 시장의 규모가 더욱 커졌다. 큰 관할구역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게 되면 봉건적 지배에 의해 생겨났던 교역과 상업상의 장벽들이 대부분 제거되었다. 수많은 새로운 생산물들(아시아의 향료, 신대륙의 사탕수수 등)이 탐험가를 통해 직접 유럽으로 들어오거나 원격지무역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어왔다. 새로운 상품에 대한 수요는 유럽의 생활수준 향상, 새로운 생활양식의 출현과 함께 더욱더 늘어났다.

수공업적 생산으로는 더이상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으므로 동업조합은 해체되었다.

주로 수력과 풍력 등 동력의 광범위한 이용에서 일어난 산업양식상의 변화는 새로운 기계장치의 도입으로 인한 변화보다 더 컸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대규모 생산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노동조직화상의 변화 곧 공장제 생산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17, 18세기의 원시적인 공장제 수공업은 직물을 비롯한 일부 산업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세의 동업조합이 해체되고 가내수공업 역시 대규모 생산조직에 의해 밀려났으며 상업조직이 크게 발전했다. 금융·보험·대외무역 분야에 새로이 도입된 기구를 통해 자본축적이 가능해졌으며 산업분야에 대한 투자가 용이해졌다. 산업자본주의화 과정에서 소수의 장인들이 임노동자계급으로 몰락했지만 대다수는 자본가로 발전했다.

바로 이것이 산업혁명의 시작이었다.

18세기 새로운 기계가 도입된 결과 예전의 수공업 전통과는 크게 다른 방식을 통해 작업기능을 합리적으로 조직해야만 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 The Wealth of Nations〉에서 핀 생산공장을 예로 들면서 새로운 생산체계의 의미에 대해 고전적인 평가를 내렸다. "한 사람이 철사를 뽑아낸다. 다음 사람이 철사를 똑바로 펴면 그 다음 사람이 철사를 자른다. 또 다음 사람이 철사의 한쪽 끝을 뾰족하게 만들면 그 다음 사람은 철사의 다른 쪽 끝을 갈기 시작한다.

핀의 머리를 만드는 일만도 두세 가지의 상이한 작업이 요구된다. 핀을 늘리는 것은 특정한 일이며 핀을 하얗게 색칠하는 것 역시 또 다른 일이다. 또한 그것들을 종이에 싸는 것까지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핀 하나를 만드는 데만도 18가지의 상이한 기능들이 필요하다." 스미스는, 노동자가 이런 식으로 핀을 생산하지 않는다면 하루에 1개의 핀도 만들기 어려울 것이며 하루에 20개의 핀을 생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새로운 생산체계 덕분에 이 핀 공장은 하루에 4,800개나 되는 핀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계속해서 대량의 상품생산에 대한 요구가 있을 때에만 기계가 제 기능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에 기계의 존재는 기계의 소유자인 기업가와 고용인 사이에 분업을 초래했다. 기업가는 노동자들을 감시하면서 그들이 기계의 작업속도에 맞추어 일하도록 강제했다. 아직 완전히 기계화되지 않은 기업에서조차 산업혁명의 초기단계에서 공장의 작업규율의 이점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났다.

조사이어 웨지우드는 '가장 엄격하게 노동을 절약하기 위한' 도기공장을 영국 에트루리아에 세웠다. 그의 공장은 도기들이 빚어진 뒤 차례로 칠을 하는 방, 가마니가 있는 방 등을 지나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완성된 도기의 상태를 점검하는 방에서 생산물 목록이 작성되었다. 도기들은 마지막으로 보관창고에 옮겨졌다. 이전까지 도기공장의 노동자들은 여러 번 작업내용을 바꿔야 했다.

그러나 웨지우드의 도기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일정한 자리를 지정받은 뒤 오직 1가지 일만을 했다. 성인 남녀와 어린이를 다 합쳐 278명이 고용되었는데 6명만이 지정된 자리가 없었으며 나머지는 전부 한 분야의 일을 전문적으로 했다.

당시 대부분의 공장들, 특히 직물공장들에서 노동자들의 작업조건이 형편없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대부분 숙련된 기술도 없는 가난한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싼 임금을 받으며 매일 14~16시간씩 일을 했는데 시끄럽고 냄새나며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작업을 반복했다. 빈민가에 있는 이들의 집 역시 건강에 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사회문제'가 대두된 것이 바로 이때이다. 어째서 엄청난 양의 상품을 생산해낼 능력이 있는 나라에 계속해서 빈곤이 존재하는가? 이러한 질문과, 그뒤 노예제의 실시와 관련된 의문의 해답을 찾기 위한 노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서구 사회와 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 새로운 사회철학과 정치 운동의 발생을 가져왔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대량생산시대의 노동

대량생산이란 단위당 낮은 가격으로 많은 양의 상품을 생산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대량생산된 상품은 정확하게 만들어진 상호교환할 수 있는 부품들에 의해 규격화된다. 대량생산 과정 자체는 대량의 상품, 다양한 제조과정에 걸친 원료이동에 관한 세밀한 조직화, 엄격한 품질검사, 세분화된 분업 등을 얻기 위한 기계화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 대량생산을 위한 물질적 기초는 기계제조산업(기계를 만드는 기계의 생산)의 발전에 의해 주어졌다. 정확한 기계장치 덕분에 낮은 원가와 적은 노동력으로 똑같은 부품을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또다른 중요한 요소는 조립라인이라는 새로운 조직화수단이다.

조립라인의 원형은 고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지만 진정한 조립라인은 19세기 미국의 육류포장산업에서 찾아야 한다. 당시 육류포장 공장들에서는 한 노동자에서 다음 노동자에게로 고기덩어리를 옮겨주기 위해 트롤리(trolley)를 이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트롤리들이 체인에 연결되고 동력을 이용해 노동자들에게 고기덩어리를 일정한 속도로 옮겨주기 시작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조립라인이 생겨났다. 노동자들이 고정된 위치에서 기계가 지시하는 속도에 맞추어 작업했기 때문에 불필요한 움직임이 최소화되었으며 놀라울 정도로 생산성이 높아졌다.

육류포장산업의 작업방식에 주의를 기울이던 미국의 자동차제조업자 헨리 포드는 1913년 조립라인을 도입했다.

포드가 도입한 방식에 의해 생산시간이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동차 1대당 가격이 크게 낮아졌기 때문에 노동자들까지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포드가 이룩한 성과에 의해 그의 경쟁자나 자동차 부품업자 모두가 그의 기술을 이용하자 조립라인 방식은 미국 대부분의 산업에 파급되었다. 그결과 생산성이 크게 높아졌고 저임금의 비숙련노동자들이 숙련노동자들을 대신하게 되었다.

대량생산의 발전은 3가지 주요방식으로 노동조직화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첫째, 작업이 세분화되었으며 이미 기술이 기계 속에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비숙련노동자, 적어도 반숙련노동자가 작업을 수행하게 되었다. 둘째, 수많은 감독자와 관리자가 필요해질 만큼 기업이 성장하게 되었다. 셋째, 점증하는 작업의 복잡성으로 인해 대규모 배급망과 판매인력뿐만이 아니라 엔지니어, 화학자, 더 나아가서는 산업심리학자까지 필요해졌다.

또한 대량생산으로 인해 국제분업화 경향이 더욱 강화되었다.

대규모 공장들이 외국의 원료를 요구하게 된 동시에 국내시장 역시 외국의 소비자들을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따라서 일부 국가들은 원자재를 수출하고 완제품을 수입하는 대신에 다른 국가들은 그 반대가 되었다. 이제까지 주로 공산품을 수입하는 농업국가였던 일부 국가들, 특히 아시아와 남아메리카의 나라들이 1970~80년대에 공업화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조립라인 공정에 필요한 기술을 쉽게 습득했으며 개발도상국들의 생활수준이 낮기 때문에 선진국들보다 낮은 임금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개발도상국들에서도 수많은 대기업에서 일부 또는 전체작업과정을 조립라인화하기 시작했다. 그결과 이 나라들은 세계 경제체제에 빠른 속도로 통합되고 있다.

대량생산시대에 농업 역시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19세기초까지도 농업은 낡은 기술과 노동 조직을 이용하는 주로 가족단위의 노동이었다. 쟁기나 파종기 같은 약간의 기술적 혁신이 있기는 했지만 1인당 산출량은 비교적 적었다.

19세기 후반과 특히 20세기에 소수의 농민들이 전체 국민의 식량을 생산하던 일부 선진국에서 농민 1인당 산출량이 크게 늘어났다. 개선된 동력원, 수확기·콤바인과 같은 기계들, 경작·가축사육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 개선된 식량 가공·저장, 더욱 효과적인 비료와 농약, 농업에 대한 기업경영기술의 이용 등 과학과 기술 분야의 일련의 진보가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큰 변화들이 일어났다.

농업의 기업화는 대농장들이 소농을 대신하게 됨을 의미하는데 이는 농업노동자들에 대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대 이래 주류를 이루던 소농경영에서 적은 일손만을 고용한 농민들은 농작물을 심고 재배하여 수확할 때까지 모든 일을 스스로 다 했으며 추수기처럼 바쁜 철에는 이웃들끼리 서로 도우며 일했다. 그러나 산업화와 함께 노동자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고 농업의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한 해 농사에 필요한 농업노동자의 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과일이나 채소처럼, 비슷한 시기에 사람손으로 직접 수확해야 하는 작물을 심고 거두어 들일 때는 여전히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미국의 과일과 채소 생산량의 거의 절반을 생산하는 플로리다·텍사스·캘리포니아에서는 수확기에 약간의 미국 출신 노동자들과 함께 주로 멕시코와 카리브 해 연안의 국가들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 이용된다.

그러나 도시노동자들 가운데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도시를 떠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계절노동자의 고용은 여러 가지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문제를 일으킨다. 이주노동자들은 일반적으로 낮은 임금을 받을 뿐만 아니라 부가급부도 전혀 받지 못한다. 이들의 생활수준과 노동조건은 평균 이하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국의 더욱 열악한 노동조건과 생활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주노동자로 일하는 경우가 흔하다.

19세기에는 서비스 분야의 노동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청소부에서 사업상담자, 트럭 운전수에서 은행가, 즉석요리점의 접대원에서 호텔 지배인, 사무원에서 광고회사 이사, 유치원 교사에서 대학 교수, 간호보조사에서 의사, 거리의 청소원에서 고위관료들에 이르는 공무원 등 굉장히 다양한 집단들이 속한다.

대량생산의 발전과 노동

20세기초에 산업공학 또는 과학적 경영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발생했다. 그 결과 계획 수립과 조정이 생산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떠올랐다. 공장의 경영진들은 노동자가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지를 결정하고 노동자에게 적절한 공구와 훈련을 제공하며 높은 생산실적을 올리도록 자극을 주기 위해 애썼다.

각 작업은 개별 구성동작들로 분해되었고 어떤 동작이 필수적인지 분석되었으며 스톱 워치를 이용해 노동자들이 특정동작을 행할 때 소요되는 시간이 측정되었다. 불필요한 동작을 제거함으로써 기계적으로 일하는 노동자는 더욱 많은 상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인' 접근법은 인간적인 요소를 무시했기 때문에 노동과정은 노동자와 기계의 관계가 아니라 기계와 기계의 관계로 변했다.

과학적인 경영이론가들은 노동자들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기를 원했으며 작업이 최소한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대신에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기를 원했다. 또한 이들은 노동자들이 물리적 동작과 사고과정에 대한 규격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이 고안해낸 체계는 인간의 감정과 동기를 무시했다. 또한 일부 고용주들이 임금은 적게 주면서 생산량을 매겨놓고 생산속도를 높이도록 만들었다.

과학적인 경영이론은 노동자들로부터 노동조건과 기능에 대한 발언권을 빼앗았을 뿐 아니라 심리적 피해, 육체적 손상, 품질·생산성의 저하와 함께 노동자들을 과민하게 만들고 피로를 유발했다. 당시 산업공학자들은 노동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노동과 기계의 기술이 최대의 가능성을 발휘하도록 만드는 문제에 직면했다. 사회과학분야에서 부분적인 해결책이 제시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산업심리학이 대두했다.

산업심리학의 주요전제는, 대량생산기술이 직접적인 작업환경과 동료 및 감독자에 대한 관계 등 양측면에서 노동자에게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회사에 소속감을 느낄 수 있도록 노동자들과 경영진의 간담회와 같은 형식의 상담요법이 도입되었다. 산업공학자와 사회학자들은 동기부여와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또다른 접근법을 제시했다. 이런 방법 등에는 지루함을 덜기 위한 직무변경(job alternation) 방식과 노동자가 1가지 일만이 아닌 몇 가지 일을 바꿔가면서 하는 직무확대(job enlargement) 방식, 일이 더욱 많은 흥미를 일으키도록 하는 직무강화(job enrichment) 방식 등이 있다.

자동화시대와 노동

대량생산 발전의 논리적인 귀결은 자동화이다.

이상적인 형태의 자동화는 모든 육체노동의 제거와 인간의 기술을 능가하는 정밀성 및 질을 보장할 수 있는 자동관리의 도입을 의미한다. 자동화를 '혁명적인' 발전으로 묘사하지만 사실 그것은 산업혁명과 더불어 시작된 기계화 경향의 최종적인 결과에 해당한다. 자동화는 생산의 안정성, 품질관리, 불량품의 감소, 공장의 안정성 향상, 관리의 집중화 등을 보장한다. 그러나 자동화의 도입 초기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효과는 비용감소와 생산성의 향상이다.

산업혁명의 초기단계가 대규모 시장과 동일한 의미의 대량생산 조립라인으로 귀결된 반면에 컴퓨터의 도입은 소량 주문생산체계가 자리잡도록 했다.

제조업자들은 시장의 제한된 부분에만 상품을 공급하는 대신 시장의 수요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동화의 잠재적 가능성을 통해 컴퓨터를 이용한 설계제조자동화시스템인 CAD/CAM이라는 2가지 새로운 상호연관 분야가 생겨났다.

자동화는 생산의 유연성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한 생산모델을 다른 생산 모델로 바꾸는 데 소요되는 리드타임(lead time)을 크게 단축했다. 또한 값비싼 보관비용이나 예비부분에 대한 투자없이 계속해서 재료공급이 가능하도록 물품목록을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효율성을 통해 생산비용을 줄일 수 있으며 또한 자동화를 처음으로 도입한 일본이 세계시장에서 계속 경제력을 강화할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자동화가 완전히 로봇화의 꿈을 실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그 꿈은 아주 가까워졌다. 오늘날 로봇은 용접이나 도장(塗裝)과 같은 노동자의 건강에 유해한 불쾌하고 위험한 일부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로봇은 1t 이상의 짐을 손쉽게 들어 올릴 수 있으며 얼어붙는 듯한 추위나 아주 높은 온도에서도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 자동화는 노동자들의 육체적·정신적 노동 가운데 많은 부분을 제거했으며 노동자들이 기계를 움직이는 사람에서 기계를 감독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했다.

자동화는 노동자와 노동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현재까지 가장 효율적인 관리수단의 하나는 일본에 도입된 방식을 약간 변형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공장들에서는 조립라인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노동자들이 작업을 중단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사실 일본의 기업들에는 '품질평가반'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작업과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거칠 수 있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생산성과 품질이 모두 향상되었다. 품질과 노동생산성을 동시에 높이는 것과 비슷한 방법은 스웨덴의 자동차공장에서 시작된 집단조립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방식에서는 각 노동자들이 부분적인 작업과정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모든 노동자들이 전체 생산품에 대해 연대책임을 진다.

조립라인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각 노동자들은 버튼을 누른 뒤 일을 멈추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려도 된다.

또다른 중요한 발전, 즉 수많은 여성 노동력의 출현이 20세기에 이루어졌다. 19세기에 남성들이 '훌륭한 부양인'의 역할을 맡게 되자 여성들은 가사를 전담하는 신세로 밀려났다. 여성들이 누릴 수 있는 권위는 가정주부라는 지위뿐이었다.

결혼하여 자녀를 양육하고 집안일을 하는 여성들에 대한 존중의 전통은 19, 20세기를 훨씬 지나서까지도 계속되었다. 19세기말경 전력이 이용된 뒤 기술발전에 의해 세탁기나 진공청소기와 같은 가사노동을 절약해주는 기구들이 가정에 도입되었다. 이런 기계들이 가사노동의 성격을 변화시켰지만 주부들의 가사노동 시간을 거의 줄이지 못했다.

19세기말부터 경제적·사회적 변화로 인해 관리직과 서비스직이 늘어나게 경영과 서비스업이 성장하게 되었다.

공공교육의 확대를 통해 많은 교사들이 필요해졌으며 성장하는 기업체들과 판매부문에서 더 많은 사무직노동자들과 판매인력을 요구하게 되었다. 여성들은 남성들처럼 가족의 생계를 전담할 필요가 없다는 이론에 근거를 둔 저임금의 조건을 받아들였고 이에따라 생겨난 남녀임금차가 동일직종에서조차 계속 시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