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 뤼삭

게이 뤼삭

다른 표기 언어 Joseph-Louis Gay-Luss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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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78. 12. 6, 프랑스 생레오나르드노블라
사망 1850. 5. 9,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물리학자·화학자.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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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 연구활동
  3. 게이 뤼삭의 법칙
  4. 그밖의 화학연구
  5. 법칙

개요

기체의 운동과 화학분석 방법을 처음으로 연구한 사람으로서 기상학(氣象學)의 기초를 마련했다.

초기 연구활동

1797년 파리의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해서 1800년 졸업했다.

그뒤 토목학교(École des Ponts et Chaussées)에서 공학공부를 더 하다가, 1801년 유명한 화학자 클로드 루이 베르톨레의 조수가 되자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의 초기 연구는 대부분 파리 근처의 아르쾨유에 있는 베르톨레의 별장에서 이루어졌다. 이 마을은 아르쾨유 서클이라는 젊은 과학도들의 활동무대로, 베르톨레와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가 이들을 이끌었다. 이들 두 과학자는 나폴레옹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게이 뤼삭의 첫번째 주요연구는 기체열팽창에 대한 것이었다. 1802년 그는 모든 기체는 온도가 상승함에 따라 부피도 일정한 비율로 팽창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러한 일반적 열팽창계수가 나옴으로써 온도계의 눈금을 새로 정하게 되었고, 이는 나중에 윌리엄 톰슨(뒤에 켈빈 경이 됨)이 확립한 열역학의 기초가 되었다.

1804년 8월 24일 장 바티스트 비오와 함께 수소를 채운 기구를 타고 4,000m 상공까지 올라가 지구의 자기강도(磁氣强度)가 고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 조사했다.

같은 해 9월 16일 혼자 7,016m 상공까지 올라갔다. 이 고도는 이후 반세기 동안이나 깨지지 않을 정도로 기록적인 높이였다. 2번째 비행에서도 자기강도를 측정하고 압력과 온도의 변화율을 연구했으며, 6,000m 상공의 공기를 채집해서 분석한 결과, 지구의 자기강도와 대기의 화학적 구성은 자신이 올라갔던 높이까지는 일정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기구 비행을 마친 뒤, 그는 프로이센의 귀족으로 여행가이고 독학한 학자이며 그 당시 아르쾨유 서클의 신입회원이고, 나중에 과학을 대중화시킨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공동연구를 시작했다.

1805년 두 사람은 실험을 통해 산소와 수소가 로 결합할 때의 상관비(相關比)를 명확히 밝혀냈다. 게이 뤼삭은 무게비가 아니라 부피비를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실험 결과 그의 주장이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즉 산소와 수소는 1:2라는 부피비로 결합하여 물을 만든다.

게이 뤼삭의 법칙

결혼한 해인 1808년 12월 31일, 오늘날 그의 이름을 따서 게이 뤼삭 법칙이라고 불리는 법칙을 발표했다.

그때 이미 그는 프랑스 학술원의 일원이었고 파리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동료 화학자인 루이 자크 테나르와 공동연구를 하면서 화학 반응물이 결합할 때의 비율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의 연구와 이미 발표된 다른 화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종합해서 "기체는 아주 간단한 비율로 결합하며, 이때 생기는 부피의 감소는 기체들의 부피나 적어도 어느 한 기체의 부피와 간단한 정수비가 성립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관계를 배수비례의 법칙 또는 게이 뤼삭 법칙이라 한다. 그가 예로 든 간단한 정수비로는 염화수소와 암모니아의 1:1 부피비와 일산화탄소와 산소의 2:1 부피비 등이 있다.

그는 자신의 법칙이 가진 규칙성은 가장 단순하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움직이는 기체에만 적용된다고 지적했다. 한편 같은 시기에 영국 화학자 존 돌턴이 화합물에서는 부피가 아니라 무게의 결합정수비가 성립한다는 법칙을 발표했다.

돌턴의 법칙은 게이 뤼삭과 접근방법에서 기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두 과학자는 상대방의 연구결과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결국 서로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했다(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아메데오 아보가드로가 이 두 사람의 연구결과를 조화시키는 방법을 제시했음).

그밖의 화학연구

험프리 데이비 경이 전기화학 연구를 성공적으로 해낸 데 자극을 받아 그는 테나르와의 공동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그들은 데이비가 쓴 방법과 비슷한 방법으로 전류의 화학적 효과를 연구했다. 데이비가 포타슘과 소듐을 분리해내자 그들은 화학적 방법만으로 이 두 원소를 더 많이 만들어냈으며, 포타슘의 성질까지 알아냈다. 또 이들은 데이비보다 먼저 붕소를 발견하여 이름을 붙였다. 1813년 게이 뤼삭과 데이비는 거의 동시에 각각 아이오딘의 성질을 독립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게이 뤼삭이 아이오딘이라고 이름붙였다.

그는 염화수소·아이오딘화수소·플루오린화수소에 대해 연구하여 (酸)의 성질에 관한 새로운 이론의 기초를 마련했지만, 스스로는 그것을 공식화하지 못했다.

이보다 몇 년 앞서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모든 산에는 산소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는 산의 성질을 계속 연구하여 청산(靑酸:사이안화수소산 또는 사이안화수소라고도 함)이 수소·탄소·질소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1815년 사이안기체(CN)2를 분리해냈으며, 1개의 탄소원자(C)와 질소원자(N)가 결합하면, 화학반응에서 어떤 원자단이 하나의 원자처럼 반응하듯이 완전한 화합물 라디칼처럼 작용한다고 했다.

이밖에도 동식물의 본질을 분석하고 온도의 변화에 따른 염(鹽)의 용해성을 연구했으며, 기체의 부피분석에 크게 이바지했다.

1832년 물리학 교수직을 내놓고 파리에 있는 국립자연사박물관(Muséum National d'Histoire Naturelle)의 화학분야 책임자로 갔다. 또 여러 곳에서 고문 역할을 하면서 자신의 지식을 활용하여 산업화학공정의 개선책을 제안하기도 했다. 1831, 1834, 1837년 3차례에 걸쳐 프랑스 하원의원으로 뽑혔으며 샤를 10세 때 그가 거절했던 귀족 작위를 1839년 루이 필리프 왕으로부터 받았다.

법칙

1808년 12월 31일, 오늘날 그의 이름을 따서 게이 뤼삭 법칙이라고 불리는 법칙을 발표했다. 그때 이미 그는 프랑스 학술원의 일원이었고 파리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동료 화학자인 루이 자크 테나르와 공동연구를 하면서 화학 반응물이 결합할 때의 비율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의 연구와 이미 발표된 다른 화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종합해서 "기체는 아주 간단한 비율로 결합하며, 이때 생기는 부피의 감소는 기체들의 부피나 적어도 어느 한 기체의 부피와 간단한 정수비가 성립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관계를 배수비례의 법칙 또는 게이 뤼삭 법칙이라 한다. 그가 예로 든 간단한 정수비로는 염화수소와 암모니아의 1:1 부피비와 일산화탄소와 산소의 2:1 부피비 등이 있다.

그는 자신의 법칙이 가진 규칙성은 가장 단순하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움직이는 기체에만 적용된다고 지적했다. 한편 같은 시기에 영국 화학자 존 돌턴이 화합물에서는 부피가 아니라 무게의 결합정수비가 성립한다는 법칙을 발표했다.

돌턴의 법칙은 게이 뤼삭과 접근방법에서 기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두 과학자는 상대방의 연구결과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결국 서로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후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아메데오 아보가드로가 이 두 사람의 연구결과를 조화시키는 방법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