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돌턴

존 돌턴

다른 표기 언어 John Dal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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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66. 9. 6, 잉글랜드 컴벌랜드 이글즈필드
사망 1844. 7. 27, 맨체스터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화학자·물리학자.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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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생애
  2. 기상학에 대한 관심
  3. 화학 연구

생애

근대 원자론(原子論)을 제시해 근대 물리과학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퀘이커교도였던 직공의 아들로 태어나 겨우 12세 때 컴벌랜드에 있는 한 퀘이커 학교의 관리를 떠맡았다. 2년 뒤 켄들에 있는 학교로 옮겨 그의 형과 함께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그곳에 12년 동안 있었다. 그는 퀘이커교를 굳게 믿으며 항상 욕구를 절제하고 규칙적으로 생활하며 단정한 옷차림과 경건한 몸가짐을 흩뜨리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돌턴은 켄들에 이어 맨체스터에 있는 뉴 칼리지에서 수학과 자연철학을 강의했다. 이 학교는 당시 케임브리지대학교와 옥스퍼드대학교가 영국국교도들에게만 입학을 허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국교파 목사를 길러낼 목적으로 장로교에서 세운 일급 교육기관이었다. 1800년 그 자리에서 물러나 맨체스터 문학과 철학학회 서기가 되었고, 수학과 화학을 가르치는 공립학교와 사립학교 교사로도 일했다. 그리고 1817년 명예직인 철학학회 회장이 되었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 이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돌턴이 남긴 많은 기록들에는 날짜가 정확하지 않은 것들도 많은데, 이것은 아마도 시대상 구술로 표현을 하던 때와 출판이 가능해진 시기 사이에 철학학회 서기로 일하면서 원고를 고쳤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이때의 수정 때문에 그가 했던 몇몇 연구, 특히 원자설을 생각하고 연구했던 정확한 시기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게다가 그의 자료들은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불에 타버렸다. 그는 왕립학회의 회원이었고 영국과학진흥협회의 공동설립자였으며, 1826년에는 왕립학회로부터 금메달을 받았다. 또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객원회원이기도 했다. 그가 죽자 4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맨체스터로 몰려와 그의 장례식을 지켜보았고, 그를 애도했다.

돌턴(John Dalton)
돌턴(John Dalton)

기상학에 대한 관심

교사로 일했던 초기에, 그는 유능한 기상학자이자 기구 제작자였던 부유한 한 퀘이커교도의 영향을 받아 수학과 기상학에 관심을 가졌다. 1787년부터 죽을 때까지 자신이 살았던 호수 주변지역의 기후변화를 기록하는 기상관측일지를 작성하면서 처음으로 과학적 연구를 시작했는데, 그가 늙어서도 줄곧 기록한 이 관측일지에는 약 20만 항목이 담겨 있다.

이것을 바탕으로 〈기상관측자료와 소론 Meteorological Observations and Essays〉(1793)을 출간했다. 그뒤 식물과 곤충 채집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1787년에는 오로라를 보고 이 현상을 관측하기 시작했다. 북극오로라(北極光, 북극광)에 대한 그의 글에는 다른 사람들의 결론에 크게 구애받지 않은 그의 독자적인 생각이 나타나 있다.

그는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의 결론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 나의 학문적 발전이 종종 오도되곤 했기 때문에, 나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증명한 것이 아니면 되도록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라고 썼다. 그리고 그는 오로라 빛과 지자기(地磁氣) 사이에 반드시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앞절의 결론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북극 오로라의 빛이 철분을 함유하는(철과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데, 왜냐하면 철만이 자기의 영향을 뚜렷이 받기 때문이며, 따라서 대기권 상층부에는 철 또는 다소 자석의 성질을 가진 탄성유체가 존재하며, 이 유체가 틀림없이 그것의 자기적 성질로 인해 원통 모양의 빛을 띠기 때문이다." 기상학을 연구하면서 그는 무역풍의 발생원인이 지구의 자전과 온도변화와 관련된다는 결론(이 이론은 이미 1735년 조지 해들리가 제시한 것이었는데 돌턴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음)에 이르렀다.

또 그가 철학학회에 들어가기 전에 썼던 글에는 이외에 습도계·온도계·기압계·강우, 구름의 형성, 증발과 분포, 이슬점 개념을 포함한 대기의 특성 등이 다루어져 있다. 또 그는 처음으로 비가 기압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온도의 하락으로 생긴다는 이론을 확증했다. 물을 연구해 5.83℃에서 물의 밀도가 가장 커진다고 생각했다(나중에 3.98℃로 밝혀짐).

돌턴은 그와 그의 형에게 유전된 색맹에도 관심을 가져 그 연구결과를 〈색각(色覺)에 관련된 놀라운 사실〉(1794)로 출간했다. 여기서 그는 색각 이상이 안구의 액체 매질이 탈색되기 때문에 생긴다고 주장했는데, 그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그의 체계적인 연구가 매우 방대하다는 것이 인정되면서 돌터니즘(Daltonism)은 색맹을 나타내는 용어가 되었다.

화학 연구

그는 지칠 줄 모르는 탐구자이면서도 동시에 많은 자료에서 이론을 정립해내는 비범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19세기초 무렵부터 시작한 그의 화학연구는 그의 정신력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6년 동안 뉴 칼리지에서 화학을 가르치긴 했어도 화학연구의 경험은 전혀 없었다.

다만 다른 연구들을 할 때 보여주었던 날카로운 직관과 독자적인 정신, 그리고 헌신적인 노력과 이용가능한 사실로부터 이론을 창조적으로 종합해내는 천재성으로 화학연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기체들을 연구해 돌턴의 법칙으로 알려진 기체분압법칙(혼합기체의 총압력은 그 혼합기체를 이루고 있는 각 기체들의 압력을 모두 합한 것과 같으며, 각 기체는 독립적으로 작용함)을 정립했다. 그리고 이것을 실험하면서 온도가 올라감에 따라 기체의 부피는 늘어난다는 이론을 세웠다. 이후 샤를의 법칙으로 설명된 이론이다.

또 이 연구들에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물에 대한 기체들의 용해도와 기체의 확산속도를 밝히는 실험들을 생각해냈을 뿐 아니라, 대기를 분석하여 4,572m까지 대기의 조성이 일정하다는 사실도 밝혔다. 화학기호 체계를 고안했으며, 각 원자들(물질 입자들)의 상대적인 무게를 확정해 1803년 표로 만들었다.

게다가 서로 다른 원소들의 화학결합이 단순한 산술적 무게비를 따라 일어난다는 이론을 제시해 일정성분비 및 배수비례의 법칙을 세우는 데에도 이바지했다. 또 부틸렌을 발견했고, 에테르의 화학조성과 화학식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론적 걸작, 즉 모든 원소는 같은 모양과 같은 무게를 가진 원자라는 매우 작고 더이상 쪼개지지 않는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원자가설을 세웠다. 〈화학원리의 새로운 체계 New System of Chemical Philosophy〉(1부 1808, 2부 1810)에 담겨 있는 많은 것들을 비롯해 돌턴의 연구물과 글들은 인류에게 빛을 던져주었다.

과학연구에 헌신했으며 독자적인 방법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른 과학 문헌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는 진정으로 사실들과 생각들을 종합하는 데 천재였다. 친구도 별로 없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고독하게 그는 오직 과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연구에만 전념했다. 비록 그가 직접 만든 기구들은 엉성하고 실험 결과 가운데에도 정확하지 않은 것들이 많지만, 모두 그가 주의 깊고 창조적인 정신으로 적합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데 충분한 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