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볼트

훔볼트

다른 표기 언어 Alexander von Humboldt 동의어 알렉산더 폰 훔볼트, Friedrich Wilhelm Heinrich Alexander von Humboldt
요약 테이블
출생 1769. 9. 14, 독일 베를린
사망 1859. 5. 6, 베를린
국적 독일

요약 현재의 지구과학·생태학에 속하는 과학분야인 자연지리학과 생물지리학 분야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우주 Kosmos〉라는 책을 저술해서 과학의 대중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남아메리카 서해안의 훔볼트 해류(지금의 페루 해류)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789~90년 괴팅겐대학교에서 보내면서 광물학과 지질학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과학탐사가 인생의 진정한 목표라는 생각이 들자 1797년 광산부 일을 그만두고 측지학·기상학과 지구자기장 측정법을 자세히 공부한 후 남아메리카 탐험에 나섰다. 그는 탐험과 책을 출판하는 데 재산을 거의 다 썼기 때문에 남은 생애 동안 종종 재정적으로 곤란을 겪었다. 죽기 전 25년 동안 〈우주〉를 집필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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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남아메리카 탐험
  4. 파리에서의 삶
  5. 말년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

개요

그는 현재의 지구과학·생태학에 속하는 과학분야인 자연지리학과 생물지리학 분야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우주 Kosmos〉라는 책을 저술해서 과학의 대중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남아메리카 서해안의 훔볼트 해류(지금의 페루 해류)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초기생애

그의 아버지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대에서 장교를 지냈고, 그의 어머니는 1685년 루이 14세의 프로테스탄트 금지령 이후 종교의 자유를 찾아 프랑스를 떠난 위그노(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가문 출신이었다.

1779년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그와 형 빌헬름은 엄격한 칼뱅주의자인 어머니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그들이 높은 사회적 지위에 알맞는 자격을 갖추도록 정치사·경제학·고전문학·언어학·수학 등을 배우도록 했다. 1789~90년 괴팅겐대학교에서 보내면서 광물학과 지질학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작센 주의 프라이베르크에 있는 광산학교에서 이 분야를 철저히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이 학교는 1766년에 설립되어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아침에는 광산에서 보내고 오후 5, 6시간 수업을 받은 후 저녁에는 식물을 찾아 돌아다녔다. 1792년 프라이베르크에서 2년 동안 집중적으로 공부한 뒤 학위수여를 받지 않고 이곳을 떠났다. 1개월 후 그는 프로이센 정부의 광산부에서 일하게 되었고, 후작의 영지(領地)인 안스바히바이로이트에 있는 피흐텔 산맥을 향해 출발했다. 그는 쉬지 않고 광산에서 광산으로 돌아다녔으며, 버려진 갱(坑)들을 재정비했는데 이 갱들에서는 주로 금과 구리가 생산되었다.

그는 모든 광산 활동들을 감독했고, 안전 램프를 발명했다. 그리고 자신의 돈으로 젊은 광부들을 위한 기술학교를 설립했다.

남아메리카 탐험

그는 과학탐사가 인생의 진정한 목표라는 생각이 들자 1797년 광산부 일을 그만두고 측지학·기상학과 지구자기장 측정법을 자세히 공부했다.

나폴레옹 전쟁에 의해 야기된 정치적 격변으로 훔볼트가 참여할 수 있었던 몇몇 과학탐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각고의 노력으로 스페인 당국의 허락을 얻어 라틴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를 방문할 수 있었다. 이들 식민지는 그 당시에는 스페인 관리들과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만이 방문할 수 있었다.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되어 있던 그곳은 과학탐험가들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였다.

1799년 여름 그는 프랑스의 식물학자인 에메 봉플랑과 함께 마르세유에서 출항했다. 봉플랑은 당시 유럽 과학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만난 인물이었다. 어머니가 죽은 뒤 상속받은 재산으로 그는 이 탐사의 비용 일체를 댔다. 1799~1804년 동안 그들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도보로 또는 말과 카누를 이용하여 9,650㎢의 지대를 탐험했다. 이 탐험에서 그들은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고 궁핍한 생활을 했다.

카라카스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초원지대와 관목지대를 지나 오리노코 강의 지류인 아푸레 강의 둔덕까지 간 뒤 카누를 이용해서 오리노코 강까지 갔다.

아푸레 강과 카시키아레 강을 따라 내려오는 동안 그들은 카시키아레 강이 아마존 강오리노코 강의 수계 사이에서 이 둘을 연결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3개월 동안 그들은 모기 떼에 시달리고 고온다습한 기후를 견디면서 열대우림을 헤쳐나왔다.

그들은 식량이 곤충과 비 때문에 못 먹게 되자 야생 카카오 열매와 강물로 연명해야만 했다. 두 사람은 새롭고 놀라운 경관에 흥분되어 건강하고 활기찬 상태였으나 심한 열병을 일으켜 돌아와야만 했다. 쿠바에서 잠시 머문 뒤 이들 두 사람은 안데스 산지를 탐사하기 위해 남아메리카로 돌아왔다. 보고타에서 페루의 트루히요까지 안데스 고산지대를 두루 돌아다녔다. 지금은 이곳에 팬아메리칸 고속도로가 개통되었으나 그당시에는 가파르고 울퉁불퉁한 바위와 매우 좁은 길이 연속적으로 있었다. 그들은 에콰도르의 키토 주위에 있는 모든 화산들을 포함해 많은 봉우리를 등반했다.

훔볼트는 침보라소 산(6,265m)을 5,784m 높이까지 등반해 그후 30여 년 간 세계 최고의 등반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로프·아이젠·산소통 등의 현대적 등산장비 없이 이런 모든 등반을 이루어냈다. 훔볼트와 봉플랑은 고산병을 심하게 앓았는데, 훔볼트는 고산병이 공기가 희박한 고산지대의 산소 부족 때문이라는 것을 최초로 밝혀냈다.

그는 또한 지금은 페루 해류라고 불리는, 원래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남아메리카 서해안의 해류를 연구했다. 이들 두 사람은 키토에 도착하여 총독과 스페인의 사회지도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1803년 봄에 두 사람은 과야킬을 출항하여 멕시코의 아카풀코까지 항해했는데, 스페인 식민지 중 가장 발달되었고 문명화된 아카풀코에서 그들 탐험의 마지막 1년을 지내면서 이 지역을 탐사했다. 미국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제퍼슨 대통령의 환대를 받은 뒤 프랑스를 향해 출항했다.

훔볼트와 봉플랑은 많은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여기에는 막대한 양의 새로운 식물 표본, 위도·경도의 확정, 지구자기장 분야 구성요소들의 측정법, 기온·기압의 일일측정, 멕시코의 사회적·경제적 상황에 대한 통계자료 등이 포함되었다. 훔볼트는 미국의 상업 중심지에 머물 때마다 기록들과 그의 수집품들의 복제품을 저명한 문헌학자인 형 빌헬름과 프랑스 과학자들에게 보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영국 함대에 의해 대륙이 봉쇄되어 그의 우편물들 대부분이 도착하지 못했다.

파리에서의 삶

1804~27년 훔볼트는 남아메리카 탐험에서 모은 자료들을 간행하는 데 주력했다.

베를린을 잠시 방문한 것 외에는 파리에서 그의 생애의 가장 중요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그 시대의 가장 뛰어난 프랑스 과학자들의 협조를 얻었고, 그의 지도와 삽화들을 새길 조판공들 및 출판업자들을 만나 탐험의 과학적 성과들을 담은 30권의 책을 발간했다. 등온선(평균기온이 같은 지점들을 연결한 선)과 등압선(주어진 시간이나 시기에 동일한 기압을 가진 지점들을 연결한 선)이 표시된 훔볼트의 기후도와 밤과 낮의 평균기온을 비롯한 기상자료는 매우 중요하며 비교기후학의 기초가 되었다.

지리와 식물상·동물상 간의 관계에 대한 그의 실험적인 연구는 더욱 중요하다. 그리고 변형에 의해 형성된 안데스 산맥의 역할 및 지각의 계속적인 발달 연구도 매우 중요하다. 그의 이런 주장으로 지표가 액체상태에서 퇴적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한 수성론(水成論)의 가설들은 전면 부정되었다. 그의 저서인 〈뉴에바에스파냐 왕국에 대한 정치 수필 Political Essay on the Kingdom of New Spain〉에는 멕시코의 지리·지질에 대한 풍부한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멕시코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상황, 광범위한 인구통계 등이 기술되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노예제도의 비인도성에 대해 심하게 반대했으나 경청되지 않았다. 그러나 멕시코의 은광에 관해 그가 기술한 것은 영국 자본 및 광산 전문가들이 광산에 투자하는 계기가 되었다(화산활동).

파리에 있는 동안 훔볼트는 저명한 물리학자이며 천문학자인 프랑수아 아라고 같은 유명한 과학자들과 깊은 우정을 오래 지속했고, 일반인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사교적이었던 훔볼트는 파리의 사교계에 정기적으로 나타났고, 그곳에서 그는 대화를 주도했다. 그는 오래된 집이 많은 라틴 지구의 꼭대기에 있는 검소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는 탐험과 책을 출판하는 데 재산을 거의 다 썼기 때문에 남은 생애 동안 종종 재정적으로 곤란을 겪었다. 그외에도 그는 일을 시작하는 젊은 과학자들을 기꺼이 도와주었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은 그의 도움을 받아 용기를 얻었고 또한 과학계로도 입문할 수 있었다. 그의 도움으로 학업을 계속하고 연구기관에서 일할 수 있게 된 사람으로는 독일의 화학자인 유스투스 폰 리비히와 스위스 태생의 동물학자인 루이 아가시 등이 있다. 그의 폭넓은 관심과 다정한 성품은 그가 쓴 많은 편지에서 잘 나타난다.

현재 8,000여 통의 편지가 남아 있다.

말년

1827년 그의 재산은 거의 바닥이 났고 재정적인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파리에서의 행복한 생활을 마치고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죽기 전 몇 해 동안 훔볼트는 황태자의 교사, 추밀원의 일원, 궁정대신으로 재직했다. 그는 그의 지위를 이용하여 어린 왕자와 황실 가족들에게 과학적 방법들과 그당시의 과학적 사고들을 주입시켰다. 과학을 대중화하려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베를린대학교의 교수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연지리를 강의했다. 그는 1,000명 이상의 관객들이 모인 공공강연에서 자연지리를 계속 강연했다.

1828년 베를린에서 최초의 국제적인 과학 회담을 조직했다.

1829년 훔볼트는 러시아와 시베리아를 방문할 기회가 있어 마차를 타고 알타이 산맥과 중국 국경까지 여행했고, 그때 그들이 관찰한 지리학적·지질학적·기상학적 사실들, 특히 중앙 아시아 지역의 자료들은 그 지역이 그 당시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곳이기 때문에 서양 세계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훔볼트는 그의 삶의 마지막 30년을 베를린에서 보냈다.

1년에 1번은 파리를 여행하며 프랑스의 과학자들과 친분을 새롭게 했고 친구인 아라고와의 대화를 즐겼다. 러시아를 여행하기 전 그는 남아메리카에 관심을 가지게 했던 '자기폭풍'이라고 하는 지구 자기장의 갑작스러운 변동을 조사했다(자기장). 조수들의 도움을 받아 그는 베를린의 한 조용한 정원 정자에서 자력계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러나 이들 자기폭풍이 지구 내의 원인 때문인지 지구 밖의 원인으로 생기는 것인지를 밝혀내기 위해 범세계적인 자기 관찰망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독일의 수학자인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는 독일·영국·스웨덴의 몇몇 연구소들에서 자기 분야를 동시에 측정해내기 시작했다. 1836년 여전히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훔볼트는 영국의 해외 영토에 이 문제를 연구할 부설연구소를 세워야 한다고 런던에 있는 왕립협회에 요청했다. 결국 영국정부는 캐나다·남아프리카·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등지에 영구 관측소를 세우기 위한 자금을 제공했고, 남극탐험을 위한 장비를 갖추었다.

이같은 분야에 대한 국제적인 과학 협조체제에 의해 산출된 많은 자료의 도움으로 영국의 지구물리학자인 에드워드 새빈 경은 지구 대기에 있는 자기폭풍이 태양 흑점의 주기적인 활동변화와 관련이 있다는 것과 폭풍의 지구 외적 원인을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죽기 전 25년 동안 〈우주〉를 집필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생존시에 4권으로 출간된 〈우주〉는 문학적인 문체로 씌어졌으며, 당시 알려진 우주의 구조에 관해 쉽게 설명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발견에 관한 흥분과 심미안적인 즐거움도 서술되어 있다. 훔볼트는 종종 그의 책에서 보여지는 산만한 경향을 정리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 책이 성공을 거두면서 이런 노력들에 대한 보답을 받았고, 몇 년 안에 이 책은 거의 모든 유럽어로 번역되었다.

〈우주〉의 제5권을 집필하는 동안 여전히 왕성한 열정과 기억력을 보이다가 1859년 90세의 나이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