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시

아가시

다른 표기 언어 (Jean) Louis (Rodolphe) Agassiz
요약 테이블
출생 1807. 5. 28, 스위스 모티에
사망 1873. 12. 14, 미국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
국적 스위스/미국

요약 스위스 태생 미국의 박물학자·지질학자·교육자.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미국에서의 활동
  4. 아가시와 다윈

개요

빙하의 활동과 멸종된 어류에 관한 획기적인 연구로 자연과학연구에 큰 공헌을 했다.

독창적인 교수방법으로 지속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그가 제시한 교수법은 미국 자연과학교육의 성격을 크게 변화시켰다.

초기생애

스위스 모라트 호수를 끼고 있는 모티에에서 프로테스탄트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소년기에는 비엔에 있는 김나지움에서 공부했으며, 그후에는 로잔에서 교육을 받았다.

취리히대학교·하이델베르크대학교·뮌헨대학교에 입학한 아가시는 에를랑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뮌헨에서는 약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스위스 서부 지방의 작은 하천에서 어떻게 고기를 잡는지에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어류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은, 1819~20년 2명의 유명한 자연과학자들에 의해 아마존 강에서 채집된 브라질의 어류 표본들을 뮌헨에서 연구하면서부터였다.

1826년 채집된 종들의 분류작업은 채집자 중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가 죽자 아가시가 그 표본들의 분류를 맡게 되었다. 분류작업은 1829년에 끝났으며 〈선별된 어류의 속과 종 Selecta Genera et Species Piscium〉이라는 책으로 묶어 발간했다(분류학). 이후부터 어류의 형태에 관한 연구는 아가시의 주요연구분야가 되었다.

1830년 〈중부 유럽 담수어류의 역사 History of the Fresh Water Fishes of Central Europe〉에 대한 출판 취지서를 작성한 아가시는, 1839~42년 이 책의 각 부분들을 출판했다.

1832년은 아가시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해가 되었다. 그는 당시 과학연구의 중심지였던 파리에 처음 가게 되었으며, 그후에는 스위스의 뇌샤텔에서 오래 머물며 많은 연구업적을 쌓았다. 라틴 구역에서 가난한 학생으로 빈곤한 생활을 한 그는 혼자 돈을 벌어 생활했지만, 때때로 독일의 자연과학자였던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당시 가장 뛰어난 어류학자였던 퀴비에 남작 등과 같은 친구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특히 훔볼트는 그가 뇌샤텔에서 강의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아가시는 당시 정확한 연구들이 거의 진행되지 않고 있던 유럽의 멸종 어류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스위스의 글라루스와 베로나 근처 몬테볼카의 멸종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29년부터 아가시는 멸종된 어류들의 화석에 대해서 방대하고 정확한 연구를 계획하기 시작했으며, 많은 시간을 자료를 모으는 데 투자했다(고생물학). 그가 직접 시대를 구분해 놓은 〈물고기 화석에 관한 연구 Recherches sur les poissons fossiles〉는 1833~43년에 부분적으로 발간되었다.

이 책에 실린 화석의 수는 1,700종이 넘으며, 화석의 서식지를 기술하면서 과거에 바다였던 지역들이 언급되기도 했다. 이러한 기초적인 연구의 가장 중요한 점은 멸종된 종들에 대한 연구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류들과 함께 발견된 다른 멸종 동물에 관심을 돌린 아가시는 1838~42년 스위스의 극피동물 화석에 관한 2권의 책을 집필했고, 1841~42년 〈연체동물 화석에 관한 비평적 연구 Études critiques sur les mollusques fossiles〉를 출판했다.

1832~46년 아가시는 뇌샤텔대학교에서 자연사교수로 재직했다.

뇌샤텔에서 한동안 직접 출판을 하기도 했는데, 당시에 그의 집은 그를 따르는 수많은 젊은 학자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동물학 용어 Nomenclator Zoologicus〉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동물 속(屬)의 모든 이름이 언급되어 있는 목록으로, 1758년 1월 1일에 정해진 과학적인 동물명명법에 따라 씌어진 것이었다. 1836년 아가시는 새로운 분야, 즉 스위스에서의 빙하 이동과 그 영향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많은 학자들은 과거 빙하들은 훨씬 발달했으며, 유럽 전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미아석(迷兒石)들과 쥐라 산맥의 정상부에 놓여 있는 미아석들은 빙하에 의해 이동된 것이라는 의견들을 제시했었다. 아가시와 동료 연구자들은 아르 빙하 위에 '뇌샤텔 저택'이라고 명명한 임시관측소를 세우고, 빙하의 구조와 움직임을 연구했다.

1840년 그는 중요한 저서 중의 하나인 〈빙하에 관한 연구 Études sur les glaciers〉를 출판했다. 이 책에서 아가시는, 스위스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질학적으로 1개의 거대한 빙하로 덮여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마지막 결론은 "현재 층분화가 되지 않은 사력층이 나타나는 지역들은 한때 현재 그린란드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거대한 얼음층으로 덮여 있었던 곳이다"라는 것이었다.

미국에서의 활동

1846년 아가시는 자연사와 지질학을 연구하려는 목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가 간 보다 중요한 목적은 보스턴 로얼 학회에서 강연하는 것이었다. 그후에는 찰스턴에서 강연을 했으며, 많은 도시에서 인기있고 전문적인 내용의 강연을 계속했다. 1847년 하버드대학교에서 동물학 교수직을 맡게 되었고, 1850년 그의 첫 아내가 죽은 후 보스턴의 엘리자베스 캐벗 캐리와 재혼했다. 그녀는 여성교육운동가이며 당시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미국에서의 그의 주요한 연구업적으로는 〈슈피리어 호 Lake Superior〉(1850)와 거북의 발생학적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미국의 자연사에 관한 투고 Contributions to the Natural History of the United States〉(4권, 1857~62)를 들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동물학이 창조의 이론에서 진화의 이론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기는 하지만, 〈분류에 관하여 Essay on Classification〉(1859)라는 뛰어난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방대한 저작 이외에도 그의 글 중에는 자연사와 특히 미국의 어류에 관한 짧은 글이 많다. 1865년 브라질, 1871년에는 캘리포니아를 탐험했으며, 캘리포니아 탐험 기간에는 남아메리카의 양안을 모두 여행했다. 아내와 함께 집필한 〈브라질 기행 Journey in Brazil〉(1868)은 캘리포니아산(産) 망상어류 무리를 다룬 것이었다.

아가시는 하버드대학교에 종합적인 동물학연구박물관을 만들려는 계획에 몰두했다.

1859년 설립된 후 지금의 비교동물학박물관으로 발전한 박물관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과학적인 연구 이외에도 2가지의 다른 일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19세기 미국의 가장 능력있는 과학교수·행정가·과학진흥자·기금모금자였다. 동시에 그는 공동연구자였던 제자들에게도 많은 애정을 가졌다.

아가시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보다는 자연과 직접 접촉하는 기회를 갖도록 제자들을 교육시켰는데, 세부적인 연구를 제외하고는 책에 의존하는 것을 반대했다.

하버드대학교에서의 강연은 미국 자연사 연구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온 것이었다. 그는 자연연구의 목적은 다른 것에서 일련의 사실들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세계와 직접 접촉을 통해 필요한 사실들을 얻어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유명한 자연사 교육자들은 대부분 아가시 또는 아가시의 제자들에 의해 양성된 사람들이었다(교육학). 1873년 여름에 그는 보다 나은 교육을 직접 실천하기 위해 버저드스 만의 한 섬인 페니키스에 앤더슨 자연사학교를 설립했다.

미국의 과학교육에 많은 기여를 한 이 학교는 아가시 한 사람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그가 죽은 뒤 폐쇄되었다.

아가시와 다윈

아가시는 생존시에 가장 능력있고 현명하며,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진 생물학자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1859년에 발간된 다윈의 〈종의 기원 Origin of Species〉에 대해 냉담하고 비동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윈설). 그것은 그의 평생을 통해 얻은 자연에 대한 시각이 새로운 진화의 이론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아가시는 다윈이 진화론 정립하는 데 중요한 근거로 사용했던 환경변화, 다양성, 유전형질의 변화 등에 관한 실제적인 증거들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유기체의 세계는 초월자가 직접 개입한 결과라는 생각을 고수했다. 다윈이 믿었던 기후·지질 변화, 빙하와 같은 자연현상의 변화는 새로운 종의 발달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종들이 멸종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했다.

층서적 증거에서는 퇴적암의 하층에서 볼 수 있는 고대의 동물과 식물은 매우 단순한 형태를 가지지만, 점차 상층으로 감에 따라 보다 발전된 형태의 동식물이 나타난다는 사실에는 그도 동의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다윈이 설명한 것과 같은 개체들과 외부환경의 변화 사이의 상관관계에 의해 나타난 결과라는 주장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유기체들은 독립적이고 특별한 변이로 구성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유기체들간에 유전적인 유사성은 없다는 점을 계속 주장했다. 식물과 동물의 종은 '신(神)의 사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상동관계나 해부학적인 유사성은 '신이 만들어낸 상상의 조합'으로 간주했다.

아가시의 자연에 관한 시각은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세계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욱 진실에 가깝다는 플라톤의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환경의 특정한 변화가 유기체의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온다고 보는 다윈의 자연관을 수용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