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카

분카

[ 文化(문화) ]

요약 일본 에도시대의 왕 고카쿠가 사용한 연호(1804~1818년).
원어명 ぶんか

일본 에도 시대[江戸時代]의 왕 고카쿠[光格, 재위 1780~1817] 때의 네 번째 연호이다. 일왕 닌코[仁孝, 재위 1817~1846]가 즉위한 뒤에도 이어서 사용되어, 1804년 음력 2월부터 1818년 음력 4월까지 15년 동안 쓰였다. 이 시기에 에도막부[江戸幕府]의 쇼군[將軍]은 도쿠가와 이에나리[徳川家齊, 재임 1787~1837]였다.

일왕 고카쿠는 갑자년(甲子年)인 1804년(교와 4) 3월 22일(음력 2월 11일)에 그 해를 원년으로 연호를 ‘교와[享和]’에서 ‘분카[文化]’로 바꾸었다.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이후 도참설의 영향으로 신유년(辛酉年)과 갑자년을 천명(天命)이 바뀌는 해로 여겨서, 정치적 변동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연호를 바꾸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카 연간인 1804년(분카 1) 음력 9월 러시아의 사신인 니콜라이 레자노프(Nikolai Petrovich Rezanov)가 나가사키[長崎]의 데지마[出島]로 와서 막부에 통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막부가 이를 거절하자 이듬해 음력 4월에 나가사키를 떠났다. 그는 막부를 압박하기 위해 병사들을 동원해 1806년(분카 3)과 1807년(분카 4)에 일본의 북방 거점을 잇달아 공격했는데, 이 사건을 ‘분카 노구[文化露寇]’라고 한다.

1808년(분카 5) 음력 8월에는 영국의 해군 함정인 페이튼호(Phaeton)가 국적을 속이고 나가사키로 입항해 네덜란드 선박과 상관원들을 공격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나가사키 봉행[長崎奉行]이던 마쓰다이라 야스히데[松平康英]가 목숨을 끊었으며, 나가사키의 입항 절차도 강화되었다. 아울러 막부는 에도만[江戸灣] 연안에 포대를 설치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1811년(분카 8)에는 쿠릴 열도 일대를 측량하던 러시아 군함 디아나호(Diana)를 마쓰마에번[松前藩]이 나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함장인 골로브닌(Vasilii Mikhailovich Golovnin)을 비롯한 8명의 러시아 선원들은 1813년(분카 10)까지 일본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났다. 골로브닌은 1816년에 일본에 억류되었던 자신의 경험을 《일본유수기(日本幽囚記, Memoirs of a Captivity in Japan during the Years 1811, 1812 and 1813 with observations on the country and the people)》라는 책으로 펴냈다.

한편, 1804년(분카 1) 7월 10일(음력 6월 4일)에 혼슈 북부 데와국[出羽國]의 동해 연안 지역에서 진도 7 이상의 강한 지진이 발생해 기사카타[象潟] 일대가 융기되었다. 1806년(분카 3) 4월 22일(음력 3월 4일)에는 에도[江戸]의 3대 화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분카의 큰 불[大火]’이 발생해서 12만호 이상의 집이 불에 타고, 12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일왕 고카쿠는 1817년(분카 14) 5월 7일(음력 3월 22일)에 아들인 아야히토 친왕[恵仁親王]에게 양위를 하고 왕위에서 물러났다. 새로 즉위한 일왕 닌코는 1818년(분카 15) 5월 26일(음력 4월 22일)에 그 해를 원년으로 연호를 ‘분세이[文政]’로 바꾸었다.

참조항목

연호,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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