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발언

정읍 발언

[ 井邑 發言 ]

요약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이 전라북도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한 발언이다.

1945년 12월 28일 발표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에 의한 한반도 문제의 해결이 결의되었다. 한반도 문제는 미국·소련·영국·중국 4개국에 의한 최고 5년간의 신탁통치를 거쳐야 했고, 국내에서는 신탁통치를 두고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미군정의 지원 속에서 좌우 합작 운동이 진행되었지만, 좌익과 우익 모두의 만족을 이끌어내지는 못하였다. 또한 미소공동위원회의 교섭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는 상황과 맞물려 단일 정부 수립이 아닌 남한 단일 정부 수립이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남한 단독 정부 수립론(이하 '남한단정론')은 1946년 4월 6일 언론을 통해 제기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지연되자 미군정이 이승만(李承晩)을 주석으로 하는 남한 단독 정부를 본국에 제의했다는 것이다. 이에 4월 7일 미국 국무부가 남한단정론을 부인하는 성명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여 일단은 수그러들었으나, 남한단정론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은 계속되었다.

그런 가운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교섭이 결렬되자 남한단정론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1946년 5월 12일에 열린 독립전취국민대회에서 김규식(金奎植)이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통일 정부를 수립하지 못하면 우리 손으로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발언이 그것이다. '우리 손으로 세운다는 정부'가 어떤 정부냐를 놓고 관심이 집중되자, 김규식은 통일 정부로 해명하였고, 이승만 역시 단독 정부 수립은 불가능하다고 일축하였다. 우익 지도부에 의해 남한단정론이 부인된 것이다.

한편 이승만은 1946년 4월 15일부터 지방을 순회하고 있었는데, 지방 순회를 통해 신탁통치의 반대를 역설하고 자신의 기반을 확대하려 한 것이다. 그러던 중 이승만은 6월 3일 전라북도 정읍을 방문한 자리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이 보이지 않고, 통일 정부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를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을 몰아내도록 세계에 호소해야 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발언을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6월 5일 전라북도 이리(지금의 익산), 6월 25일 경기도 개성 방문에서도 이어졌다. 앞선 5월 남한단정론을 부인하던 입장에서 선회하여 남한단정론을 주장한 것이다. 또한 6월 4일 전주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남조선만의 정부란 남조선 단독 정부 수립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에 '자신의 생각이며, 일반 민중이 희망한다'는 요지의 답변을 하였다.

정읍 발언을 대표로 하는 이승만의 남한단정론에 대해 좌익, 김구(金九)를 중심으로 한 우익, 중도파 모두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한국민주당의 일부가 지지하였다. 당시 미군정은 이승만과 김구를 배제하고 좌우합작을 통한 정책을 수립한 상황이었으므로 이승만의 남한단정론에 반대하였다. 이처럼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통한 남한단정론은 각계의 거센 비판에 직면하였으나, 이승만은 1946년 11월부터 1947년 3월까지 직접 미국으로 가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벌이는 등 점차 정부 수립 방안의 하나로 자리잡아 나갔다. 이와 같은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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