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호

진호

분류 문학 > 국가 > 후백제

기본정보

견훤의 외생(外甥)

생몰연대 : ?-926

일반정보

견훤의 외생(外甥)으로, 후백제와 고려 사이의 조물성 전투 후 화친의 의미로 후백제에서 고려에 인질로 보내졌다가 죽은 인물이다.

전문정보

진호는 견훤의 외생(外甥)으로, 후백제와 고려 사이의 조물성 전투 후 화친의 의미로 후백제에서 고려에 인질로 보내졌다가 죽은 인물이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 권2 기이 후백제견훤(後百濟甄萱)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견훤은 우리 태조에게 겉으로는 화친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시기하였다. 그는 태조에게 총마(驄馬)를 바치더니, 동광(同光) 3년(925) 겨울 10월에는 기병(騎兵) 3,000을 거느리고 조물성(曹物城)까지 오자 태조(太祖)도 역시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와서 싸웠으나, 견훤의 군사가 날래어 승부(勝負)를 결단할 수가 없었다. 이에 태조는 일시적으로 화친하여 견훤의 군사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려고 글을 보내서 화친할 것을 요구하고 종제(從弟) 왕신(王信)을 인질로 보내니, 견훤도 역시 그 사위 진호(眞虎)를 보내서 교환했다. 4년(926)에 진호가 갑자기 죽자 견훤은 일부러 죽인 것이라고 의심해서 즉시 왕신을 가두었고, 사람을 보내서 전년에 보낸 총마를 돌려보내라고 하니 태조는 웃고 그 말을 돌려보냈다.”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견훤(甄萱)조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삼국유사』와『삼국사기』에 의하면, 조물성 전투 후 고려 태조가 먼저 화의를 요청하면서 왕신을 인질로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1 을유 8년(925) 겨울 10월조에서는 조물성 전투 후 후백제의 견훤이 먼저 화의를 요청하면서 진호를 보내자, 고려 태조가 왕신을 인질로 보낸 것으로 달리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그 기록 내용이다. “을해일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조물군(曹物郡)에서 견훤과 교전하였는데 유금필이 자기 군사를 끌고 와서 응원하였다. 견훤이 겁이 나서 화친하기를 청하고 사위 진호(眞虎)를 인질로 보내왔으므로 왕도 자기의 사촌 동생인 원윤 왕신(王信)을 인질로 보냈다. 왕은 견훤의 나이가 자기보다 10년 맏이라 하여 그를 상보(尙父)라고 불렀다. 신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사절을 파견하여, 견훤은 이랬다 저랬다 거짓이 많아 화친할 사람이 못된다고 말하였다. 왕이 그렇다고 여겼다.(乙亥 王自將及甄萱戰于曹物郡黔弼引兵來會萱懼乞和以外甥眞虎爲質 王亦以堂弟元尹王信交質以萱十年 之長稱爲尙父 新羅王聞之遣使曰 萱反復多詐不可和親 王然之)”

925년 10월에 견훤은 몸소 기병 3천명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이르렀고, 왕건도 직접 정예 병력을 이끌고 출정했다. 왕건이 건국 후 처음으로 직접 군사를 이끌고 조물군으로 간 것은 견훤의 후백제 병력이 이곳까지 진출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후백제군이 강성하여 고려군이 몰리는 형편이었다. 유검필이 응원군을 이끌고 왔지만, 전세를 반전시키지는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양국은 결국 화의를 맺고 인질을 교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화의를 요청한 주체에 대하여 『삼국유사』․『삼국사기』에서는 고려로, 『고려사』에서는 후백제로 달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고려사』의 기록을 신빙하는 입장과,『삼국사기』의 기록을 신빙하는 입장이 있다.

『고려사』의 기록을 신빙하여 후백제가 화의를 요청했다고 보는 입장은, 후백제가 1차 조물성 공격 실패 후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군사를 일으켰고 왕건이 이를 징치하기 위한 대응에 나섰으나, 여전히 후백제를 포용하여 평화스런 관계를 유지하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이병도, 1961)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을 신빙하여 고려가 화의를 요청했다고 보는 입장은, 화친 후 왕건이 견훤을 상보(尙父)라 칭한 것은 곧 왕건의 열세를 의미한다고 보고 있으며(하현강, 1988), 후백제가 고려의 화의 요청을 받아들인 배경은 후백제의 궁극적 목적이 신라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신호철, 1993)

왕건은 견훤을 상보(尙父)라는 존호(尊號)로 부르면서 자신의 사촌동생(堂弟)인 원윤(元尹) 왕신(王信)을 볼모로 보냈다. 이에 견훤도 화친을 수용하는 표시로 외생(外甥)인 진호(眞虎)를 볼모로 보냈던 것이다.

진호(眞虎)의 출자와 관련하여, 그는 견훤의 외생(外甥)이라 하였는데, 외생(外甥)은 처남이나 누이의 아들인 생질을 가리킨다. 여기서 진호(眞虎)와 견훤이 어떤 관계인지는 명확히 알기 어렵다. 이에 대하여 진호는 견훤의 처남으로 성(姓)은 진씨(眞氏)였으며, 광주(光州)에 토착해 있던 구백제(舊百濟) 귀족집안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신호철, 1993)

또한 『이제가기』에 의하면, 견훤의 형제는 5남 1녀라고 하는데, 여기서 견훤의 누이 이름을 대주도금이라고 특별히 기록하고 있는 점에 유의하여, 진호는 견훤 누이의 아들이라는 견해도 있다.(이도학, 1998)

그런데 고려에 볼모로 가 있던 진호가 926년 4월에 병사(病死)하고, 이에 후백제에 있던 왕신도 하옥되거나 죽음을 당한다. 진호와 왕신의 죽음에 대하여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1 병술 9년(926) 여름 4월 경진(庚辰)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견훤이 보낸 인질 진호가 병으로 죽었다. 왕이 시랑 익훤(弋萱)을 시켜 그 시체를 보내 주었더니 견훤은 우리가 그를 죽인 것으로 생각하여 우리가 보낸 인질 왕신(王信)을 죽이고 웅진(熊津) 방면으로 진격하여 왔다.(甄萱質子眞虎病死 遣侍郞弋萱送其喪 甄萱謂我殺之 殺王信 進軍熊津)”

이에 의하면, 진호가 죽자 고려의 시랑 익훤이 그 상(喪)을 후백제로 호송했다. 이는 고려가 진호의 죽음에 상당히 예우했음을 뜻한다. 그러나 견훤은 고려측에서 진호를 죽인 것으로 단정하면서 격노하였으니,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려측 볼모인 왕신을 하옥시키고 출병을 단행하였으며,『고려사』에 의하면 왕신을 죽이고 전쟁을 개시하였다.

참고문헌

이병도, 1961, 『韓國史』中世篇, 을유문화사.
하현강, 1988, 『韓國中世史硏究』, 일조각.
신호철, 1993, 『後百濟 甄萱政權硏究』, 일조각.
이도학, 1998, 『진훤이라 불러다오』, 푸른역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후백제 견훤)
… 貞明四年戊寅 鐵原京衆心忽變 推戴我太祖卽位 萱聞之遣使稱賀 遂獻孔雀扇地理山竹箭等 萱與我太祖陽和陰剋 獻驄馬於太祖 (同)(光)三年冬十月 萱率三千騎 至曹物城[今未詳] 太祖亦以精兵來與之角 萱兵銳 未決勝負 太祖欲權和以老其師 移書乞和 以堂弟王信爲質 萱亦以外甥眞虎交質 …
후백제 견훤
… 정명(貞明, 915-920) 4년 무인(918)에 철원경(鐵原京)의 민심이 홀연히 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했다. 견훤은 이 소식을 듣자 사자를 보내 경하하고,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地理山)의 대화살 등을 바쳤다. 견훤은 우리 태조와 표면상으로는 화친하는 체 했으나 속으로는 상극이 되었다. 그는 태조에게 총마(驄馬)를 바치더니, 동광(同光, 923-925) 3년(925) 겨울 10월에는 3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조물성(曹物城)[지금은 알 수 없다.]까지 이르렀다. 태조도 역시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웠으나, 견훤의 군사가 날래어 승부를 낼 수 없었다. 태조는 잠시 화친하여 견훤의 군사들이 지치기를 기다리기 위해 서신을 보내어 화친할 것을 청했다. 당제(堂弟) 왕신(王信)을 인질로 보내자 견훤도 역시 그의 외생질(外甥姪) 진호(眞虎)를 보내어 교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