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

궁예

분류 문학 > 국가 > 후삼국

기본정보

후고려의 왕
생몰년: ?-918
재위기간: 901-918

일반정보

궁예는 901년 후고려를 세운 왕이다. 궁예는 국호를 고려(高麗)․마진(摩震)․태봉(泰封)이라 하였으며, 철원(鐵原)․송악(松岳)을 도읍으로 삼았다. 918년 왕건(王建)이 추대되자 도망갔으나 평강(平康)에서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전문정보

궁예는 901년 후고려를 세운 왕이다. 궁예의 출생이나 가계 및 성장과정의 대략은 『삼국사기』신라본기 진성왕 5년조부터 경명왕 2년조까지의 기사와 『삼국사기』권50 열전10 궁예조에 전하고 있다. 궁예의 출신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왕위계승전에서 희생된 왕자로 보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궁예가 헌안왕의 아들(정청주, 1986) 또는 경문왕의 아들(신호철, 1982)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밖에 몰락한 진골 귀족의 후예(조인성, 1989)라는 견해도 있다.

궁예가 왕자라는 사실은 당시에는 물론이고, 고려시대에도,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삼국사기』찬자들이 궁예가 헌안왕과 경문왕 중 누구의 아들인지 확정하지 못했던 것이나, 『삼국사기』본기에 궁예의 출생에 관한 기사가 전혀 나오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근거로 궁예왕자설이 부정되기도 하였다. 즉, 궁예의 반신라적 행위를 합리화하고, 반신라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궁예에게 정통성과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궁예와 그 측근들이 조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궁예를 왕자라고 조작했던 이유 중 하나로 『삼국사기』권50 열전10 궁예조의 “중오일생(重五日生:5월5일)”에 주목하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중오일생이 부모를 해치는 것으로 믿는 풍습과, 그를 기피하여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궁예가 중오일생이라고 한 점은 궁예의 반란을 예언한 것이며, 결국 궁예의 반신라적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한다.(조인성, 2007)

그러나 고려의 건국을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궁예가 폄하(貶下)되었다는 점을 고려하고, 그것이 조작되었다면 고려시대에 이미 비판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신라 왕실과 관련된 그의 출생설을 조작된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따라서 궁예는 왕위계승과 관련된 모반사건으로 희생된 왕자 출신임이 확실하다고 본다.(정선용, 1997)

『삼국사기』권50 열전10 궁예조에 따르면 궁예는 열 살 즈음에 영월 세달사에 출가하여 장년에 이르기까지 승려였으며, 미륵불을 자청하고 20여권의 경전을 저술하고 강설하였다. 장성한 후 신라 말 전국에서 도적들이 봉기하자, 죽주(竹州)의 기훤(箕萱)의 휘하에 들어갔으나 기훤이 홀대하자 북원(北原:원주)의 양길(梁吉)세력에 의지해서 자체기반을 길러 나갔다. 이후 894년 명주(溟州:강릉)에서 장군이라 칭하고, 895년에는 강원도와 패서(浿西)지역의 세력이 합세하자 임금을 칭할 만하다고 하고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896년에는 철원에 도읍하였고 송악(松岳)의 해상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쌓은 왕건일가 세력과의 결합은 궁예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확대시켰다. 898년에는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고, 901년에는 국호를 고려(高麗)라고 칭하고 자신을 왕으로 부르게 하였다. 이어 904년에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연호를 처음으로 제정하여 무태(武泰)라고 하였다. 905년에는 도읍을 다시 철원으로 옮기고 연호를 성책(聖冊)이라 고쳤으며, 911년에는 다시 연호를 고쳐 수덕만세(水德萬歲)라고 하고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변경하였다.

궁예는 미륵불을 자칭하고 자신 및 아들까지 신격화시키기도 하였다. 전륜성왕이자 미륵불로서 정교일치(政敎一致)적 전제주의를 추구하였다.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이라는 비법을 강조하여 계율을 중시함으로써 율령에 의한 지배와 종교적 계율의 엄수를 강조하는 신정적(神政的) 전제주의 통치방법을 부각시켰다.(홍승기, 1992)

그러나 궁예는 전제군주로서 횡포가 심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미륵신앙을 이용하여 자신은 미륵불(彌勒佛), 두 아들은 보살(菩薩:청광보살靑光菩薩·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고 하였다. 915년에는 부인 강(康)씨에게 간통죄를 씌워 죽이고, 두 아들까지 죽였다. 이와 함께 반대세력에 대한 정치적 숙청이 이루어졌으며, 백성을 괴롭히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궁예의 횡포로 인해 마침내 신하들이 왕건을 추대하자 왕위에서 축출되어 918년 변복차림으로 도망하다가 부양(斧壤:평강)에서 백성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참고문헌

신호철, 1982, 「弓裔의 政治的 性格-특히 佛敎와의 關係를 中心으로」『韓國學報』29.
정청주, 1986, 「弓裔와 豪族勢力」『全北史學』10,
최규성, 1987, 「弓裔政權의 性格과 國號의 變更」『상명여자대학논문집』19.
홍승기, 1992, 「궁예왕의 전제적 왕권의 추구」『擇窩許善道先生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일조각.
정선용, 1997, 「弓裔의 勢力形成 過程과 都邑 選定」『韓國史硏究』97.
조인성, 2007, 『태봉의 궁예정권』, 푸른역사.

관련원문 및 해석

後高麗 弓裔 [大順庚戌 始投北原賊良吉屯 丙辰都鐵圓城[今東州也] 丁巳移都松岳郡 辛酉稱高麗 甲子改國號摩震 置元<武>泰 甲戌還鐵原]
후고려 궁예 [대순 경술에 처음엔 북원의 적 양길의 진영에 투항하였다. 병진에 철원성[지금의 동주이다]에 도읍하였다. 정사에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겼다. 신유에 고려라고 일컬었다. 갑자에 국호를 고쳐 마진이라고 하고 연호를 두어 무태라고 하였다. 갑술에 철원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