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물성

조물성

분류 문학 > 국가 > 후삼국

기본정보

후백제와 고려가 전쟁을 하였던 곳으로, 정확한 위치는 미상이다

일반정보

후백제와 고려가 전쟁을 하였던 곳으로, 정확한 위치는 미상이지만 선산(善山)의 금오산성이나 의성 금성산성 등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전문정보

조물성은 후백제와 고려가 전쟁을 하였던 곳으로, 정확한 위치는 미상이지만 선산(善山)의 금오산성이나 의성 금성산성 등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하여 『삼국유사』 권2 기이 후백제견훤(後百濟甄萱)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견훤은 우리 태조에게 겉으로는 화친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시기하였다. 그는 태조에게 총마(驄馬)를 바치더니, 동광(同光) 3년(925) 겨울 10월에는 기병(騎兵) 3,000을 거느리고 조물성(曹物城, 지금 未詳임)까지 오자 태조(太祖)도 역시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와서 싸웠으나, 견훤의 군사가 날래어 승부(勝負)를 결단할 수가 없었다. 이에 태조는 일시적으로 화친하여 견훤의 군사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려고 글을 보내서 화친할 것을 요구하고 종제(從弟) 왕신(王信)을 인질로 보내니, 견훤도 역시 그 사위 진호(眞虎)를 보내서 교환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견훤(甄萱)조에서는 조물성 전투의 시기에 대하여 1차(924년 7월)와 2차(925년 10월)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어,『삼국유사』에서는 2차 조물성 전투만을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삼국사기』 권50 열전10 견훤(甄萱)조의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광(同光) 2년(924) 가을 7월에 (견훤이) 아들 수미강(須彌强)을 보내 대야성(大耶城)과 문소성(聞韶城) 두 성의 군사를 일으켜 조물성(曹物城)을 공격하였으나, 성의 사람들이 태조를 위하여 굳게 지키며 싸웠으므로 수미강이 손해를 보고 돌아갔다. 8월에 태조에게 사신을 보내 총마(驄馬)를 바쳤다. 3년(925) 겨울 10월에 견훤이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이르니 태조도 또한 정병을 거느리고 와서 승패를 겨루었다. 그때 견훤의 군사가 대단히 날쌔었으나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태조는 우선 화친하여 그 군사를 지치게 하고자 하여 편지를 보내 화친을 청하면서 사촌동생 왕신(王信)을 인질로 보내었더니 견훤도 사위 진호(眞虎)를 인질로 교환하였다.(同光二年秋七月 遣子須彌强 發大耶聞韶二城卒 攻曹物城 城人爲太祖固守且戰 須彌强失利而歸 八月 遣使獻驄馬於太祖 三年冬十月 萱率三千騎 至曹物城 太祖亦以精兵來 與之确 時萱兵銳甚 未決勝否 太祖欲權和以老其師 移書乞和 以堂弟王信爲質 萱亦以外甥眞虎交質)”

1차 조물성 전투에 대해서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1 갑신 7년(924) 가을 7월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견훤이 아들 수미강(須彌康) 양검(良劒) 등을 보내 고려의 조물군(曹物郡)을 공격하므로, 왕이 장군 애선(哀宣) 왕충(王忠) 등에게 명령하여 이를 구원하게 하였다. 애선은 전사하였으나 고을 사람들이 굳게 지키니 수미강 등이 손해를 입고 돌아갔다.(甄萱遣子須彌康良劒等 來攻曹物郡 命將軍哀宣王忠救之 哀宣戰死郡人固守 須彌康等失利而歸)”

2차 조물성 전투에 대하여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1 을유 8년(925) 겨울 10월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을해일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조물군(曹物郡)에서 견훤과 교전하였는데 유금필이 자기 군사를 끌고 와서 응원하였다. 견훤이 겁이 나서 화친하기를 청하고 사위 진호(眞虎)를 인질로 보내왔으므로 왕도 자기의 사촌 동생인 원윤 왕신(王信)을 인질로 보냈다. 왕은 견훤의 나이가 자기보다 10년 맏이라 하여 그를 상보(尙父)라고 불렀다. 신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사절을 파견하여, 견훤은 이랬다 저랬다 거짓이 많아 화친할 사람이 못된다고 말하였다. 왕이 그렇다고 여겼다.(乙亥 王自將及甄萱戰于曹物郡 黔弼引兵來會萱懼乞和 以外甥眞虎爲質 王亦以堂弟元尹王信交質 以萱十年之長稱爲尙父 新羅王聞之遣使曰 萱反復多詐不可和親 王然之)”

1차 조물성 전투에서 대야성(大耶城)과 문소성(聞韶城)의 군사로 조물성(曹物城)을 공격하였다는 것은, 곧 합천(陜川)에서 의성(義城)으로 이어지는 연결로가 후백제에 확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를 보호하면서 신라에 대한 군사적 행동을 고려하지 않고 있던 고려와, 적극적으로 경상도 지역으로의 진출을 희망했던 후백제를 경상도 지역 주도권에 대한 우열이라는 측면에서 비교한다면, 후백제가 유리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922년에서 923년에 걸쳐 경상도 지역의 많은 호족들이 귀부하게 되는 상황 변화는 후백제의 대외적 여건이 불리해져 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불리해진 현실을 타개하고 경상도 지역에서의 전세를 만회하면서 고려의 반응을 보기 위한 선택이 924년 7월의 조물성 공격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924년 7월 후백제의 조물성에 대한 1차 공격은 고려의 구원병과 군인(郡人)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견훤은 조물성 공격이 실패한 직후, 구원병 파견이라는 고려의 적극적 대응 태도와 고려 장군 애선(哀宣)의 전사에 따른 고려와의 관계 경색이 가져다 줄 여파를 고려하여 절영도(絶影島) 총마(驄馬)를 왕건에게 선물하는 등 사후 수습에 나서게 되었다. 이후 1년여 동안 고려와 군사적 충돌이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이러한 수습책은 일시적으로 고려를 무마하는데 효과를 거두었다고 생각된다.(류영철, 2004)

이후 후백제는 925년 10월에 고려의 경상도 진출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그 교두보인 청주 지역과 예산 지역의 턱 밑에 위치한 연산진(燕山鎭)을 확보하여 장군 길환(吉奐)으로 하여금 직접 관리하게 하고, 또 임존군(任存郡, 충남 예산)마저 확보하였다.

이처럼 후백제의 호전적인 공세는 결국 고려로 하여금 대외정책의 변화를 야기시켰다고 보여지는데, 이는 유검필의 연산진 및 임존성 공격과 더불어 왕건 역시 조물군으로 출전하는 데서 확인된다. 이는 2차 조물성 전투라고 할 수 있다.

2차 조물성 전투에서 925년 10월에 견훤은 몸소 기병 3천명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이르렀고, 왕건도 직접 정예 병력을 이끌고 출정했다. 왕을 사령관으로 하는 양군이 격돌하게 된 것이다. 왕건이 건국 후 처음으로 직접 군사를 이끌고 조물군으로 간 것은 견훤의 후백제 병력이 이곳까지 진출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후백제군이 강성하여 고려군이 몰리는 형편이었다. 유검필이 응원군을 이끌고 왔지만, 전세를 반전시키지는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양국은 결국 화의를 맺고 인질을 교환하게 되었다.

그런데 화의를 요청한 주체에 대해서 『삼국사기』에서는 고려로, 『고려사』에서는 후백제로 달리 표현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고려사』의 기록을 신빙하는 입장과, 『삼국사기』의 기록을 신빙하는 입장이 있다.

『고려사』의 기록을 신빙하여 후백제가 화의를 요청했다고 보는 입장은, 후백제가 1차 조물성 공격 실패 후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군사를 일으켰고 왕건이 이를 징치하기 위한 대응에 나섰으나, 여전히 후백제를 포용하여 평화스런 관계를 유지하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이병도, 1961)

『삼국사기』의 기록을 신빙하여 고려가 화의를 요청했다고 보는 입장은, 화친 후 왕건이 견훤을 상보라 칭한 것은 곧 왕건의 열세를 의미한다고 보고 있으며(하현강, 1988), 후백제가 고려의 화의 요청을 받아들인 배경은 후백제의 궁극적 목적이 신라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신호철, 1993)

조물성의 위치 비정과 관련해서는 선산(善山)의 금오산성(金烏山城)설(池內宏, 1960), 안동(安東) 부근설(김상기, 1961), 김천(金泉) 조마면(助馬面)설(이병도, 1961), 안동(安東)과 상주(尙州) 사이설(이병도, 1977), 의성(義城) 금성(金城)설(문경현, 2000) 등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조물성의 위치 비정과 관련하여,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1 무자 11년(928) 8월조의 다음 기록이 참고 된다. “왕이 충주(忠州)로 갔다. 견훤이 장군 관흔(官昕)을 시켜 양산(陽山)에 성을 쌓았기 때문에 왕은 명지성(命旨城) 원보 왕충(王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쳐서 패주케 하였다. 관흔은 퇴각하여 대량성(大良城)을 확보하고 군사를 풀어서 대목군(大木郡) 벼를 베었다. 또 그 다음에는 오어곡(烏於谷)에 군사를 나누어 주둔하니 죽령(竹嶺) 길이 막히였다. 왕이 왕충(王忠) 등에게 명령하여 조물성(曹物城)에 가서 형세를 정찰하게 하였다.(幸忠州 甄萱使將軍官昕城陽山 王遣命旨城元甫王忠 率兵擊走之 官昕退保大良城 縱軍芟取大木郡禾稼 遂分屯烏於谷 竹嶺路塞 命王忠等往諜于曹物城)”

이에 의하면, 왕건은 태조 11년(928)에 왕충(王忠)을 시켜 조물성(曹物城)에 가서 정탐케 하였는데, 우선 부악(缶岳)에 비정되는 오어곡(烏於谷)을 정탐하려고 조물성에 간 것이기 때문에, 조물성은 오어곡 보다 북쪽 내지는 서쪽 방향에 있었을 것이다. 이 시기 고려의 주된 활동무대는 충청북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으며, 양산(陽山)의 축성을 제지하기 위해 파견된 왕충이 목적을 달성한 후 조물성으로 간 것이기 때문에, 왕충의 병력이 충청북도 양산 지역에서 경상북도로 진입하여 이를 수 있는 곳은 추풍령로(秋風嶺路)를 통한 경상북도의 서쪽 지역이다. 따라서 안동 및 상주 지역은 왕충이 이끄는 병력이 경상도에 진입한 후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에 문소성(聞韶城)을 지금의 의성 안계평야 부근에 설치된 아시촌(阿尸村) 소경(小京) 일대로 비정하면서, 조물성을 같은 의성에서 탑리 방면의 금성산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이도학, 1998) 그러나 의성 지역을 의미하는 문소성(聞韶城)의 군사로 조물군을 공격하였으므로, 의성 지역과 조물성은 서로 다른 지역이며, 조물성의 위치는 선산(善山)의 금오산성(金烏山城)으로 비정된다는 견해도 있다.(류영철, 2004)

참고문헌

池內宏, 1960, 『滿鮮史硏究』 中世 第2冊, 吉川弘文館.
김상기, 1961, 『高麗時代史』, 서울대학교출판부.
이병도, 1961, 『韓國史』中世篇, 을유문화사.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하현강, 1988, 『韓國中世史硏究』, 일조각.
신호철, 1993, 『後百濟 甄萱政權硏究』, 일조각.
이도학, 1998, 『진훤이라 불러다오』, 푸른역사.
문경현, 2000, 『高麗史硏究』, 경북대학교출판부.
류영철, 2004, 『高麗의 後三國 統一過程 硏究』, 경인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후백제 견훤)
… 貞明四年戊寅 鐵原京衆心忽變 推戴我太祖卽位 萱聞之遣使稱賀 遂獻孔雀扇地理山竹箭等 萱與我太祖陽和陰剋 獻驄馬於太祖 (同)(光)三年冬十月 萱率三千騎 至曹物城[今未詳] 太祖亦以精兵來與之角 萱兵銳 未決勝負 太祖欲權和以老其師 移書乞和 以堂弟王信爲質 萱亦以外甥眞虎交質 …
후백제 견훤
… 정명(貞明, 915-920) 4년 무인(918)에 철원경(鐵原京)의 민심이 홀연히 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했다. 견훤은 이 소식을 듣자 사자를 보내 경하하고,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地理山)의 대화살 등을 바쳤다. 견훤은 우리 태조와 표면상으로는 화친하는 체 했으나 속으로는 상극이 되었다. 그는 태조에게 총마(驄馬)를 바치더니, 동광(同光, 923-925) 3년(925) 겨울 10월에는 3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조물성(曹物城)[지금은 알 수 없다.]까지 이르렀다. 태조도 역시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웠으나, 견훤의 군사가 날래어 승부를 낼 수 없었다. 태조는 잠시 화친하여 견훤의 군사들이 지치기를 기다리기 위해 서신을 보내어 화친할 것을 청했다. 당제(堂弟) 왕신(王信)을 인질로 보내자 견훤도 역시 그의 외생질(外甥姪) 진호(眞虎)를 보내어 교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