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틴 제국 멸망 이후의 그리스

비잔틴 제국 멸망 이후의 그리스

1453년 비잔틴 제국의 멸망 후 동방정교회의 중심이었던 그리스는 투르크(오스만투르크제국)의 지배를 받게되었다. 오랜 기간에 걸친 투르크 제국의 그리스 지배는 그리스의 민족성을 변질시킬 정도로 혹독한 것이었다. 유능한 그리스인은 살해되거나, 망명 또는 개종하였고 여성이나 어린이들은 노예로 팔렸으며 농민은 토지를 투르크인 영주에게 빼앗기고 그 농노가 되었다. 그리스도교도에게는 인두세가 부과되어 국고의 중요한 재원이 되었고, 그리스 정교회는 세금을 내는 대신 존속이 겨우 허락되었다. 다만 투르크인이 능숙하지 못했던 상업 분야에서만은 그리스인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그리스 상인들은 18세기 이후 쇠퇴한 베네치아를 대신해 흑해 및 지중해 무역을 독점했다. 그들은 강력한 무역선단을 꾸려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고 그리스 독립전쟁의 재원 마련에 기여하였다.

투르크는 17세기 후반에 들어와 군사력이 쇠퇴하면서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 때 그리스인들은 한 투르크는 열강과의 외교교섭이 필요하게 되자, 그리스인을 통역관으로 등용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리스인이 점차 외교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나아가 인접국 발라키아 및 몰다비아 등의 통치에도 참여하였다. 그 과정에서 ‘파나리옷(Fanariot)’이라는 전문가 집단이 그리스인 특권계급층으로 성장했다. 한편 이러한 그리스인 성장을 틈타 산악지대에서 투르크 지배에 반대하는 ‘클레프트(Kleft)’라는 이름의 결사대가 조직되었으며, ‘아르마톨(Armatol)’이라는 그리스인 경찰대도 각지에서 조직되었다. 클레프트는 후에 그리스 독립운동의 주요 지원 세력이 되었다.

18∼19세기에 일어난 러시아-투르크전쟁, 프랑스혁명, 알리파샤 술탄의 반란 등은 그리스 독립운동을 자극하였다. 이에 1770년 독립을 위한 몇 차례 반란이 일어났다. 비록 반란은 실패했지만 1821년 남부 러시아의 오데사에서 비밀결사 조직을 탄생시켰다. ‘필리키 에타레이아(Philiki Etareia)’라고 불리는 이 비밀결사 조직은 지도자인 입셀란테스의 지휘로 루마니아의 베사라비아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하지만 파트라스의 대주교 게르마노스의 지도로 '클레프트'와 '아르마톨'이 합세하여 일으킨 펠로폰네소스 반란이 성공을 거두면서 그리스의 독립전쟁(1821∼1832)으로 발전했다. 독립군은 입셀란테스의 지휘로 여러 곳에서 투르크군에 승리하였다.

1822년 1월 드디어 그리스 독립이 선언되고, 파나리옷의 마브로코르다토스((Alexandros Mavrokordatos))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클레프트파와의 내분이 일어났다. 투르크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키오스섬,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기타 지역에서 그리스인을 대량 학살하였다. 그리스인 학살을 계기로 유럽의 여론은 압도적으로 그리스 편으로 돌아섰다. 시인 바이런을 비롯해서 다수가 사재를 털어 의용군에 참가하려고 줄을 이었으나, 유럽의 여러 군주들은 이탈리아 메테르니히의 압력으로 그리스의 독립운동을 묵살하려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다만 영국만이 외상 캐닝이 중심이 되어 그리스에 1823년 군사·경제 원조를 제공하였다.

한편 투르크는 이집트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1824년 튀르키예 정예군이 펠로폰네소스에 상륙해 미소롱기를 점령하고 아테네를 포위했다. 이에 영국은 러시아 및 프랑스를 동원하여 1827년 7월 런던조약을 체결하여 3국의 함대를 파견하여 투르크-이집트 함대를 격파하였다. 이어 1828년 4월 러시아가 투르크에 선전포고하고 프랑스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파병하였다.

결국 1829년 아드리아노플 화약과 1830년 런던회의에서 그리스의 독립이 보장되었다. 그 동안에 그리스의 내분도 진정되고, 전 러시아 외상 카포디스트리아스가 대통령이 되었으나 암살되었고, 바이에른 출신의 오토 1세(재위 1832∼1862)가 국왕으로 옹립되었다.

그리스는 천연자원이 빈약하고 독립전쟁에 의한 피해가 심했기 때문에 하루 빨리 정치체제를 확립하고 경제를 강화하는 것이 오토 1세의 과업이었다. 그는 수도를 아테네로 옮긴 후 경제를 안정시키고 국토확장에 진력했다. 국토확장의 최종목표는 1453년 투르크에게 복속당하기 이전의 비잔틴 제국을 재건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대그리스주의’라고 한다.

독립 후의 그리스는 밖으로는 국토확장에 어려움을 겪고, 안으로는 왕당파와 공화파의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국토확장과 내부 분쟁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져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영토 확장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19세기 후반 이후 영토 확장 운동에 힘입어 독립 당시 4만 9,000㎢였던 국토면적이 1907년에는 6만 4,000㎢으로 확대되었다.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일어난 자유주의 운동은 그리스에도 영향을 주어 1861년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나 오토 1세가 추방되고, 대신 덴마크 왕자 게오르그 1세(재위 1863∼1913)가 옹립되었다. 영국은 이때 오랫동안 점령하고 있었던 이오니아제도를 그리스에게 넘겨주었다. 1877∼1878년의 러시아-투르크 전쟁 이후에는 베를린회의에서 그리스의 국경이 개정되었다. 1909년에는 청년사관들의 ‘군인동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베니젤로스가 총리가 되어 그리스의 근대화와 대그리스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발칸동맹을 결성했다. 1912년과 1913년 2회에 걸친 발칸전쟁 때에는 세르비아 및 불가리아 등과 함께 투르크와 싸워 더욱 영토를 확대할 수 있었다. 마케도니아 남반부와 테살로니케 등을 획득하였고, 에피로스 지방의 남쪽, 크레타섬, 트라케 서부 등지를 수복하였다. 1913년에는 게오르그 1세가 테살로니케에서 암살되어 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그리스는 어느 편에 서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콘스탄티노스 왕은 빌헬름 2세의 사촌이었기 때문에 중립을 희망했으나, 베니젤로스 총리는 삼국협상 편에 서야 된다고 주장하여 서로 반목하기에 이르렀다. 영국과 프랑스는 압력을 가하여 왕을 퇴위시키고,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왕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그리스는 삼국협상 측에 서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전승국이 된 그리스는 영국의 지지를 얻어 1919년 5월 소아시아의 이즈미르(스미르나)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된 투르크는 극도의 혼란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대그리스주의가 실현될 듯이 보였다. 그러나 케말 아타튀르크(케말파샤)가 출현하여 ‘튀르키예’를 재건하여 그리스군은 다시 소아시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한편 1920년 11월의 선거에서 베니젤로스가 패배하여 총리직을 사임하였고, 콘스탄티노스 왕이 다시 왕위에 올랐다. 대그리스주의를 성취할 수 없게 된 그리스는 그 후 튀르키예와의 분쟁을 피하기 위해 이즈미르와 트라케 동부 등을 포기하고 튀르키예와 주민 교환을 도모했다. 그 결과 120만 명 이상의 그리스인이 튀르키예로부터 돌아오게 되었고, 반대로 45만 명의 튀르키예인이 튀르키예로 귀환하였다. 그밖에 10만 명 가까운 불가리아인이 그리스를 떠났다.

1924년 3월에는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여전히 왕당파와 공화파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1935년에는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부활되어 콘스탄티노스의 장남 게오르기오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 후 좌익 공화파가 우세하게 되었으나 1938년 총리가 된 메타사스는 국회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공포했다. 때마침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이탈리아는 그리스에 선전포고했다. 하지만 그리스군은 알바니아 전선에서 이탈리아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1941년 1월 메타사스 총리가 갑자기 사망하는 등 국내정세가 혼란해지기 시작해 그리스는 독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국왕은 런던으로 망명하고 이집트의 카이로에는 망명 항전조직이 결성되었다. 국내에서도 레지스탕스 등이 조직되어 게릴라전이 각지에서 빈발했다. 1944년 11월 독일이 패망하여 그리스는 해방되었다. 한때 좌우 양파가 협조한 연립정부가 구성되었으나 곧 붕괴되고, 1946년 9월 국민투표의 결과 게오르기오스 2세가 귀국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