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예진

고예진

[ 高禮鎭 ]

요약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의병에 투신했다. 최익현 의진에 들어가 항일투쟁을 벌였다. 대한독립의군부 서기관으로도 활약하였고, 선언장서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파리장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출생-사망 1875.11.24 ~ 1952.10.2
본관 장흥(長興)
계문(季文)
송천(松川)
국적 한국
활동분야 한말 의병, 독립운동
출생지 전북 고창
주요수상 건국포장(1977), 건국훈장 애국장(1990)
주요저서 《송천집》 10책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계문(季文), 호는 송천(松川)이다. 전라북도 고창 출신으로 1875년(고종 12) 11월 24일에 태어났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가 강제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고 외교권을 박탈하자, 이에 분개해 형 고석진(高石鎭)·고용진(高龍鎭), 조카 고제만(高濟萬)과 함께 최익현(崔益鉉) 의진(義陣)에 가담해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1906년 6월 4일, 최익현이 태인(泰仁)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講會)를 열고 유림(儒林) 인사들을 규합할 때 함께 의병을 일으킨 뒤, 형과 포수들을 이끌고 참가해 항일투쟁을 벌였다. 그러다 순창(淳昌) 구암사(龜巖寺)에서 크게 패하여 일본군에 붙잡혀 전주감옥에 투옥되었고, 다음 해 2월 9일 풀려났다. 1912년 말에는 임병찬(林炳瓚)이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결성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자 이에 가담, 서기관(書記官)으로 활약하였다가 고초를 겪은 바 있다.

1919년 3월 6일 고예진은 같은 유림 대표 6명 및 기독교 목사 5명과 함께 3·1운동의 불씨를 확산시키기 위해 종로에서 선언장서(宣言長書)를 써서 낭독하고 이를 총독에게 전달한 선언장서 투쟁에 참여했다가, 8개월의 체형언도(體刑言渡)를 받았다.

같은 해, 김창숙(金昌淑) 등이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선언서인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유림 대표 137인의 일원으로 서명하고 참여하는 등 항일 독립투쟁에 앞장섰다가 옥고를 치렀다. 이후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는 등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저서로 《송천집(松川集)》이 있고,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해마다 5월 5일 고창 도동사(道東祠)·방호정사(方壺精舍)에서 민관 합동 추모제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