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숙종

[ 肅宗 ]

요약 중국 당(唐)의 제10대 황제로 756년 안사의 난으로 현종(玄宗)과 함께 쓰촨[四川]으로 피난하던 도중에 마외역(馬嵬驛)에서 금군(禁軍)의 일부를 이끌고 북상(北上)하여 영무(靈武)에서 스스로 황위에 올랐다. 그 뒤 당군을 정비하고 곽자의(郭子儀), 이광필(李光弼) 등을 앞세워 장안과 뤄양을 되찾았다.
출생-사망 711 ~ 762
본명 이형(李亨)
국적 중국 당(唐)
활동분야 정치

중국 당(唐)의 황제로서 이름은 이형(李亨)이다. 재위기로는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의 무주(武周, 690~705)를 제외하면 당의 제10대 황제가 되지만, 중종(中宗)의 아들인 이중무(李重茂, 695~714, 殤帝라고도 함)가 현종(玄宗, 재위 712~756) 이융기(李隆基, 685~762)의 정변으로 17일 만에 폐위되어 사후에 묘호(廟號)나 시호(諡號)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제외하면 제9대 황제가 된다. 그리고 4대 황제인 중종(中宗, 재위 683~684, 705~710)과 5대 황제인 예종(睿宗, 재위 684~690, 710~712)이 측천무후(則天武后)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복위되었기 때문에 두 차례에 걸친 이들의 재위기를 독립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7대 황제로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711년(景雲 2년) 당시 황태자였던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모친은 양씨(楊氏)이다. 원래의 이름[諱]은 사승(嗣升)으로 섬왕(陝王)으로 봉해졌지만, 뒤에 충왕(忠王)으로 봉해지면서 이름을 준(俊)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여(璵)로 개명(改名)하였다. 그리고 황태자가 된 뒤인 744년(天寶 3년)에 이름을 형(享)으로 바꾸었다.

현종은 황제가 된 뒤에 맏아들인 이종(李琮, ?~752)이 아니라 조려비(趙麗妃, ?~726)의 소생인 둘째 아들 이영(李瑛, ?~737)을 황태자로 삼았다. 하지만 715년(開元 3년)에 황태자가 되었던 이영은 737년(開元 25년)에 현종의 총애를 받던 무혜비(武恵妃, 699~737)와 재상(宰相) 이임보(李林甫, ?~752) 등의 모략으로 폐서인(廢庶人)된 뒤 살해되었다. 무혜비는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갑작스럽게 죽어 실패하였고, 738년에 현종의 셋째아들인 이형(李亨)이 황태자가 되었다.

755년(天寶 14년), 안녹산(安祿山, 703~757)이 반란을 일으켜 뤄양[洛陽]을 점령하고, 756년에는 퉁관[潼關]에서 당(唐)의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수도 장안(長安, 지금의 西安)으로 진격해 왔다. 이형은 현종과 조정 대신들과 함께 반군을 피해 쓰촨[四川]의 청두[成都]로 피신하였는데, 현종의 행렬이 마외역(馬嵬驛, 지금의 陝西省 興平)에 이르렀을 때 병사들이 양국충(楊國忠, ?~756)과 양귀비(楊貴妃, 719~756)를 죽일 것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현종은 양국충과 양귀비를 죽이고 쓰촨으로 피신하였고, 황태자 이형은 환관(宦官)인 이보국(李輔國, 704~762)의 건의를 받아들여 쓰촨으로 가지 않고 금군(禁軍)의 일부를 이끌고 북상(北上)하여 당의 군대를 정비하였다. 이형은 토벌군(討伐軍)을 이끌고 봉천(奉天, 지금의 陝西省 乾縣)을 거쳐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의 주둔지인 영무(靈武, 지금의 寧夏回族自治區 靈武市)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스스로 황위(皇位)에 오르고 연호를 지덕(至徳, 756~758)이라 하였다. 숙종(肅宗)이 황위에 오른 것은 현종의 양위(讓位)를 받아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며, 현종은 나중에서야 숙종의 즉위를 인정하였다.  

영무에서 숙종은 삭방절도사 곽자의(郭子儀, 697~781)와 거란(契丹)의 부족장이던 이광필(李光弼, 708~764)의 군대를 중심으로 하북(河北)의 당군(唐軍)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위구르[回紇]의 원병(援兵)을 받아 봉상(鳳翔, 지금의 陝西省 鳳翔縣)으로 친정(親征)하며 반군에 대규모 반격을 가하였다. 757년(至徳 2년) 1월 안녹산(安禄山)이 자신의 둘째아들인 안경서(安慶緒, ?~759)에게 살해되었고, 그 해 10월에 곽자의는 위구르의 기병과 연합하여 장안(長安)과 뤄양을 탈환했다. 장안으로 돌아온 숙종은 758년(乾元 원년), 소금의 전매제를 도입해 국가 재정의 안정화를 도모하는 한편, 각지의 군대를 동원하여 상주(相州)에 주둔하고 있던 안경서를 포위·공격하였다. 하지만 투항해왔던 사사명(史思明, 703~761)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토벌에 실패하였다.


한편 당시 조정에서는 환관 이보국과 장황후(張皇后, ?~762) 사이에 실권을 둘러싸고 정쟁(政爭)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숙종의 둘째아들인 건녕왕(建寧王) 이담(李倓, ?~762)이 이보국과 장황후의 전횡과 죄상을 숙종에게 여러 차례 간언하자, 이보국과 장황후는 이담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며 모함하여 죽였다. 그 뒤 숙종은 병상에 눕는 일이 잦아졌는데, 762년(寶應 원년)에는 중병에 걸려 매우 위독하였다. 장황후는 환관 단항준(段恒俊) 등과 공모하여 황태자인 이예(李豫, 726~779)와 이보국을 죽이고 숙종의 셋째 아들인 월왕(越王) 이계(李係)를 황제로 삼으려 하였다. 이보국은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정원진(程元振, ?~764) 등과 함께 금군(禁軍)을 동원하여 장황후와 월왕(越王) 이계(李係) 등을 사로잡아 유폐(幽閉)시키고 숙종에게 양위를 받아 이예를 대종(代宗, 재위 762~779)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태극궁(太極宮) 감로전(甘露殿)에 유폐(幽閉)되어 있던 현종이 죽은 지 13일 뒤에 숙종도 죽자, 장황후와 월왕 이계를 살해하였다. 숙종은 죽은 뒤 '문명무덕대성대선효황제(文明武德大聖大宣孝皇帝)'라는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건릉(建陵)에 매장되었다.

숙종 본문 이미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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