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사의 난

안사의 난

[ 安史─亂 ]

요약 중국 당(唐)나라 중기에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 등이 일으킨 반란(755∼763).

755년에서 763년에 이르기까지 약 9년 동안 중국 당(唐)나라를 뒤흔든 난으로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 등이 주동이 되었다.

원인 및 배경

당왕조(618∼907)는 현종(玄宗:재위 712~756) 때 국력이 절정에 달하였고 전통문화도 집대성되어 외형적으로는 화려했으나, 내면적으로는 초기의 지배체제를 지탱해온 율령제(律令制)의 변질, 균전제(均田制) 및 조용조(租庸調) 세제의 이완(弛緩), 부병제(府兵制)의 붕괴 등으로 왕조의 기반이었던 자립 소농민층이 와해되기 시작하여, 이들은 토지를 상실하고 유민화하였다.

당왕조는 토지와 유리된 도호(逃戶)를 조사하고, 전지(田地)와 재산에 대한 과세(課稅), 모병(募兵)의 조직화 등을 통하여 지배체제의 존속을 꾀하려 하였으나 측천무후(則天武后) 시대에 억압되었던 귀족들이 현종대에 들어와 세력을 잡았고, 관료층 중에서도 구래(舊來)의 문벌귀족들은 농업생산력의 발전, 대토지 소유제의 전개, 상업자본의 이용 등으로 새로 진출한 교양인이나 지주·상인층 출신의 능리(能吏)와 대결하여 정치는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과정 중에 세력을 잡은 문벌·귀족 출신의 재상 이임보(李林甫) 등은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여념이 없었고, 세력유지를 위해 변방 절도사로 이민족이나 평민 등도 등용시켰다. 특히 징병제가 파탄된 후, 절도사들은 대량의 용병을 지휘하는 강력한 존재로 부상하였는데, 안녹산은 이러한 배경하에서 현종·이임보·양귀비 등에게 신임을 받아 유주(幽州)·평로(平盧)·하동(河東)의 절도사를 겸임할 정도로 세력이 막강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경제적 모순이 심화되고 있을 때, 이임보가 사망하자 중년을 넘기면서 정무(政務)에 지쳐 양귀비(楊貴妃)와의 애욕생활로 나날을 보내던 현종 밑에서 재정을 장악한 양귀비의 일족인 재상 양국충(楊國忠)은 동북 국경방비를 맡아 대병을 장악한 번장(蕃將) 안녹산과 대결하는 실력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사건의 경과

양국충은 현종에게 안녹산이 모반하려 하므로 소환하도록 요구하였다. 755년(天寶 14) 11월, 안녹산은 거란(契丹)·철륵(鐵勒) 등 이민족의 정예(精銳) 8,000여 기(騎)를 중심으로 한병(漢兵)·번병(蕃兵)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간신 양국충 토벌을 구실로 범양(范陽:北京)에서 거병하여 동도(東都) 뤄양[洛陽]으로 진격하였다.

당시 태평에 젖은 당나라 군·관(軍官)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전하여 다음달 뤄양이 안녹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에 당나라는 서북변 방위군을 동으로 이동시켜 퉁관[潼關]으로 보내자 반군(叛軍)은 당나라 20만 대군과 대결하게 되었다.

허베이[河北]에서는 토착지주와 협력하여 의병을 일으킨 평원태수(平原太守) 안진경(顔眞卿), 상산태수(常山太守) 안고경(顔杲卿) 등이 반군의 퇴로를 차단하였고, 당장(唐將) 곽자의(郭子儀)·이광필(李光弼) 등은 안녹산의 부장(部將) 사사명을 격퇴하였다.

한편 허난[河南]에서도 수양성(睢陽城)을 사수한 허원(許遠)과 장순(張巡) 등이 항전을 계속하였다. 이듬해 6월, 양국충은 퉁관 결전을 명령하였는데 작전 미숙으로 가서한(哥舒翰)이 이끈 방위군이 대패하여 퉁관이 함락되고, 반군은 수도 장안[長安]으로 쇄도하였다.

이에 현종은 서쪽으로 피신하였는데, 기아에 지친 병사들의 압력으로 산시성[陝西省] 마외역(馬嵬驛)에서 양국충은 살해되고, 양귀비는 액사(縊死)하였다. 당시 귀족들은 일족의 안일만을 도모하였으므로 민중들은 스스로 자위집단을 형성하였다.

민중은 지방관 안진경 등을 지지하였고, 장안 부근에서 유격전을 폈다. 당시 서북쪽으로 피신한 황태자 형(亨)은 두홍점(杜鴻漸) 등에게 추대되어 756년 간쑤성[甘肅省] 영무(靈武)에서 즉위하였는데 그가 곧 숙종(肅宗:재위756~762)이다.

한편 안녹산은 실명과 등창으로 건강이 악화된 데다 횡포해져 757년(至德 2) l월, 아들 경서(慶緖)에게 암살되고, 경서는 범양의 본거지를 사사명에게 지키도록 하였다.

숙종은 태자 광평왕(廣平王:훗날의 代宗)을 병마원수(兵馬元帥)로, 곽자의를 부원수(副元帥)에 임명하여 삭방군(朔方軍)과 위구르[回紇] 원군의 도움으로 장안과 뤄양 탈환에 성공하였다. 그후 일시 굴복한 사사명이 758년(肅宗 乾元 1) 다시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제위에 올라, 토벌군을 상주(相州)에서 대파한 안경서를 죽이고 뤄양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761년(上元 2) 2월, 사사명도 그 아들 조의(朝義)에게 살해되어 반란군은 그의 지휘하에 들어갔으나, 조의는 당나라를 도운 위구르군의 공격과 범양절도사 이회선(李懷仙)에 의하여 763년(廣德 1) l월 타도되고 9년 여에 걸친 대란은 종결되었다.

영향

이민족을 중심으로 한 반란군과, 위구르 원군에 의하여 뤄양, 장안 양경(兩京)은 황폐되고 영화를 자랑하던 도시 건축물과 문화재는 대부분 회신(灰燼)되어 구문화의 전통과, 문화담당자였던 귀족들은 괴멸적 타격을 입게 되었다. 난의 평정을 위해 지방에 파견된 절도사가 병권을 장악하자 종래의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는 무너져 군사적 지방분권화 현상이 강화되고, 특히 화북지방은 오랫동안 반독립적 상태가 지속되었다.

군비조달을 위해 백성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고, 염전매(鹽專賣)의 급증으로 당왕조 전기의 체제가 붕괴되어 균전제하의 조용조 세법은 양세법(兩稅法)으로 전환되었다. 중앙집권체제의 약화로 귀족세력은 타격을 받고 토호(土豪)와 상인들이 번진(藩鎭) 무력세력과 결합하여 정치·경제적 성장을 달성하게 되자 중국 고대의 율령지배 체제와 이에 수반되는 문화는 근본적으로 변질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안사의 난 본문 이미지 1

참조항목

, 모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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