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응

보응

[ 寳應 ]

요약 중국 당나라 숙종과 대종 때의 연호(762~763년).

중국 당나라의 제10대 황제인 숙종(肅宗) 이형(李亨, 재위 756~762) 때의 네 번째 연호이자 제11대 황제인 대종(代宗) 이예(李豫, 재위 762〜779) 때의 첫 번째 연호이다. 762년 음력 4월부터 763년 음력 7월까지 2년 동안 사용되었다.

숙종은 761년 음력 9월 호화로운 예법을 간소하게 한다는 취지로 존호도 ‘황제(皇帝)’로 간략히 하고, ‘(上元)’ 연호도 없앴다. 그러나 762년 음력 4월, 병이 위독해진 숙종은 황태자 이예를 감국(監國)으로 삼아 국정을 대신하게 하면서 그 해를 원년으로 연호를 ‘보응(寳應)’으로 바꾸었다. 숙종이 5월 16일(음력 4월 18일)에 죽자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대종은 ‘보응’ 연호를 그대로 사용했다.

보응 연간에는 대종의 즉위에 공을 세운 환관 (李輔國), 정원진(程元振) 등이 ‘보응공신(寶應功臣)’이라고 불리며 잇달아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숙종이 위독해졌을 때 황후 장씨(張氏)는 황태자이던 대종을 폐위시키고 월왕(越王) 이계(李係)를 옹립하려 했으나 이보국 등의 도움으로 대종은 황후 장씨의 세력을 제거하고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 대종이 즉위한 뒤에 이보국은 중서령(中書令)의 지위에 올랐으나 762년(보응 1) 음력 10월에 죽임을 당했고, 그 뒤에는 빈국공(邠國公)으로 봉해진 정원진이 조정의 실권을 쥐었다.

762년 음력 10월, (史思明)의 뒤를 이어 대연(大燕) 황제라고 칭하던 사조의(史朝義)가 뤄양[洛陽]에서 패하고 기주(冀州)로 달아났고, 얼마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뒤 이듬해 초까지 이회선(李懷仙), 전승사(田承嗣) 등이 잇달아 투항해오면서 (安祿山)과 사사명이 일으킨 안사(安史)의 난은 진압되었다.

763년(보응 2) 음력 7월에 대종은 ‘보응원성문무황제(寶應元聖文武皇帝)’의 존호를 사용하기 시작하며 대사면을 행했다. 그리고 연호를 ‘(廣德)’으로 바꾸고, 그 해를 원년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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