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엽까지의 제정러시아

19세기 중엽까지의 제정러시아

18세기 초 표트르 1세 치하에서 러시아는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1667년의 전승으로 몇 세기를 끌어오던 폴란드와의 항쟁에 일단 매듭을 지었고, 그 후 폴란드와 제휴하여 아조프 원정(1696) 등 튀르크와 대결하게 되었다. 표트르 1세는 폴란드왕 등과 결탁하고 발트해로의 진출을 결심, 1700년에 북방 전쟁에 돌입하여 1709년의 폴타바전(戰)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결국 염원하던 발트해 연안 지역을 수중에 넣었다. 그는 12년 수도를 모스크바로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겼으며, 전후 임페라토르(황제)의 칭호를 얻었다. 표트르는 원칙적으로 전쟁 수행의 필요에 따라 중앙·지방의 행정을 개혁하고 식산진홍정책 및 교육·문화정책을 펴 나갔는데, 실시과정에서 과단성 있게 서유럽의 제도·기술·풍속을 도입하였기 때문에 러시아는 급속도로 서유럽풍의 절대주의국가가 되어 갔다.

표트르 1세 이후 62년 예카테리나 2세가 즉위하기까지 황제가 자주 바뀌자 귀족들은 표트르 1세가 규정해 놓은 엄격한 종신근무제에서 차차 근무의 자유를 획득하여 갔다. 반면 표트르 1세가 도입한 인두세제(人頭稅制)로 인하여 영주에게 인신적 예속이 강화된 농노(農奴)는 그 뒤에도 법적·사회적 지위가 저하되어, 18세기 후반에는 일체의 법적 보호를 박탈당하고 노예에 가까운 취급을 받게 되었다. 즉위 때부터 계몽군주로 알려져 있던 예카테리나 2세도 농노제와 귀족의 특권에는 손을 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푸가초프의 반란 이후에는 오히려 귀족에게 집회권·청원권(請願權) 및 지방의 행정·사법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함으로써 신분제와 관료제를 주축으로 하는 통치 방향을 뚜렷이 하였다. 한편 예카테리나는 2차에 걸친 튀르크와의 전쟁에서 흑해 연안과 크림 반도를 병합하는 한편, 폴란드 분할을 강행하여 제국의 영토를 서쪽으로 크게 넓혔다.

계몽군주 예카테리나 황제 치하에서 러시아 문화의 유럽화는 더욱 진전되어 자유사상도 대두되었으나,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여제(女帝)는 반동으로 돌아, 최초로 농노제를 비판한 서적을 낸 알렉산드르 라디셰프를 유형(流刑)에 처하는 등 강경책을 취하였다. 혁명에 대한 공포는 파벨 1세(재위 1796∼1801) 시대에는 병적으로까지 발전하였고, 뒤를 이은 알렉산드르 1세는 즉위 당초에는 자유주의적인 개혁이 기대되기도 하였으나, 곧 나폴레옹의 대륙봉쇄에 가담함으로써 국민경제에 어려움을 초래하자, 여론도 개혁을 위험시하게 되어 실무적인 정부기구개혁과 교육개혁 등이 실시되는 데 그쳤다. 대륙봉쇄의 파탄에서 비롯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실패하고, 러시아군이 프랑스까지 진출하게 됨으로써 알렉산드르 1세는 빈회의에서 크게 발언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전후에 황제가 중용하였던 우직한 규율가 알렉세이 아라크체예프 장군에 의해 가혹한 관료정치가 행해졌는데, 그것이 1825년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유발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데카브리스트의 난 중에 즉위한 니콜라이 1세(재위 1825∼55)는 문화·교육·언론 활동을 엄격하게 통제하였으나, 나폴레옹 전쟁 이래의 국민적 자각과 유럽으로부터 낭만주의·사회주의사상의 유입 등으로 사상계는 유례없는 활기를 띠었다. 같은 시기에 18세기 말 이래 문제시되어온 자본주의 발전과 농노제경제의 모순이 심각해져 정부도 자본주의 육성책을 취하는 한편 사유지 농민과 국유지 농민에 대해 각각 약간의 개선책을 취하였으나, 누적된 모순에서 연유하는 농민폭동의 증대와 중소영주의 빈궁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대외적으로는 정통주의자로 알려졌던 니콜라이는 1830∼31년에 폴란드왕국(러시아령 폴란드)의 독립운동을 진압하고, 1849년에는 헝가리의 독립운동을 뿌리뽑았으나 그리스의 독립운동은 자국의 남하정책을 위해 이용하였다. 또 그 뒤 이집트의 반란으로 고심하는 튀르크에 원군을 보내어 튀르크 내정에 간섭하는 한편, 러시아 군함의 보스포루스·다르다넬스 양 해협 독점 통항권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열강의 반대로 1840년 독점권은 부정되었고, 독점권을 주장하는 러시아의 억지 외교가 드디어 크림 전쟁(1853∼56)을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