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1세

알렉산드르 1세

[ Aleksandr I ]

요약 러시아의 황제(재위 1801∼1825). 대학의 신설과 근대적인 교육제도의 도입, 성제(省制)의 실시를 중심으로 한 행정개혁을 단행하였다. 파리에 입성하여 빈회의와 신성동맹의 결성에 큰 역할을 하였고 폴란드왕국의 국왕과 핀란드대공을 겸하였다.
알렉산드르 1세

알렉산드르 1세

출생-사망 1777.12.23 ~ 1825.12.1
국적/왕조 러시아
재위기간 1801년∼1825년
별칭 정식 명칭 Alexandr Pavlovich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정식 명칭 Alexandr Pavlovich.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수수께끼의 황제로 불리는 파벨 l세의 맏아들이다. 어렸을 때 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의 사랑 속에서 스위스인(人) 아르프에게 자유주의적인 교육을 받고 자랐다. 할머니의 모순된 궁정생활과 할머니와 아버지의 불화 및 극단적인 나폴레옹 숭배자인 아버지의 변덕스러운 전제정치의 환경 속에서 자라 “선의(善意)이면서 시기심 많고, 결단성이 없으나 빈틈이 없다”는 평의 모순된 성격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성격은 신하의 쿠데타를 스스로 묵인하여 아버지를 암살하게 하였고, “독재자이면서 자코뱅, 속인이면서 신비가(神秘家)”라고 불린 내외정책의 끊임없는 동요와 모순의 한 원인을 만들기도 하였다.

즉위하자 우선 아버지의 총신(寵臣)을 물리치고 악법을 폐지하여 대학의 신설과 근대적인 교육제도의 도입, 성제(省制)의 실시를 중심으로 한 행정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어서 M.M.스페란스키에게 입헌적인 개혁안을 만들게 하였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농노해방에도 관심을 보여 뒤에 독일계(系) 지주가 지배한 발트 3현(縣)에 실시하였으나, 일반적으로는 귀족의 자발적인 농노해방의 길을 여는 데 그쳤다. 외교에 있어서는 처음에 영국 ·프랑스와의 평화유지에 힘썼고, 이어 제3 ·4차의 대(對)프랑스대동맹에 가담하여 아우스터리츠(체코의 슬라브코프)와 프리들란트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패하였다. 1807년에 틸지트(소베츠크)에서 화약을 맺었으나, 대륙봉쇄의 실행 등으로 이해가 대립되었기 때문에 1812년에 나폴레옹 군대의 원정을 받게 되었다.

그뒤 나폴레옹의 뜻을 좇아 파리에 입성하였고, 빈회의와 신성동맹(神聖同盟)의 결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빈회의가 창설한 폴란드왕국의 국왕이 되었고, 1809년에는 스웨덴에서 탈환한 핀란드대공(大公)을 겸하여 두 나라에 헌법을 인정하였으며, 그 밖에 남쪽의 그루지야 ·베사라비아 ·아제르바이잔을 병합하였다. 불안정한 성격을 지닌 그는 전쟁 중에 경건주의적 신비주의(敬虔主義的神秘主義)에 사로잡혔고, 이것이 전후(戰後)에 내정 면에도 영향을 끼쳐 언론단속의 강화와 문교정책의 반동화를 초래하였다. 특히, 전쟁에 따른 재정궁핍의 대책으로 실시된 둔전병(屯田兵)제도가 국민의 원한의 표적이 되었다. 아들이 없어 동생(뒷날의 니콜라이 l세)에게 황제 계승권도 밝히지 못한 채, 여행지에서 갑자기 죽었다. 그 때문에 황제계승권을 둘러싼 혼란을 틈타 농노제 폐지를 외치는 청년장교 데카브리스트가 난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