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까지의 제정러시아

17세기까지의 제정러시아

모스크바대공국에서는 지난날의 독립 공국의 제공(諸公)과 대공 일족 및 여러 대를 이어온 모스크바 중신들이 대공의 권력을 견제하는 유력한 존재가 되고 있었지만, 마지막 비잔틴 황제의 조카딸을 왕비로 맞이한 이반 3세는 전제군주로서 처신하여 법령집과 관직을 정비하고 하급전사에게 토지를 나누어 줌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러시아 교회는 이 시대에 일어난 이단과 싸우는 한편 급격히 불어난 교회의 토지 ·재산을 확보해 나가기 위해 대공에게 협력하여 그 권력의 신적 기원(神的起源)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1547년 차르의 칭호를 얻은 이반 4세(재위 1533∼84) 때에는 군주권 절대성의 관념이 확립되었다. 이반 4세는 중앙정부의 강화, 지방자치제의 도입, 병역의무의 규제 등으로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대귀족의 특권과 정치력을 약화시켰으며, 특히 그의 만년에는 오프리치니나(특수 영지)라고 하는 독특한 공포정치체제로써 유력한 귀족들을 거의 거세해 버렸다. 이 정책은 이반 4세 치하에서 많은 토지를 차지하고 신분적으로도 향상된 일반 전사계층 즉 드보란스트보의 협력을 얻었던 것으로, 이반 4세가 거세한 카잔 ·아스트라한 두 한국(汗國)을 정복한 것도 그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두 한국의 정복으로 모스크바의 영토는 일거에 동방으로 확대됨으로써 16세기 말에 시작되는 시베리아 정복의 발판이 마련되었고, 볼가 수로의 완전한 장악은 동방 여러 나라와의 교역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이반 4세는 북극해를 이용하여 서유럽 여러 나라와 무역을 시작하여, 모스크바 국가의 경제적 발전과 여러 외국과의 외교적 ·문화적 교류를 촉진시졌다. 그러나 이반 4세가 북방수로에 만족하지 않고 발트해 연안으로 진출하기 위해 일으킨 리보니아 전쟁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장기간에 걸친 전쟁의 중압과 오프리치니나 체제로 인한 국토의 황폐화, 나아가 중소 영주(領主)의 농업 노동력 확보를 위해 그가 만년에 실시한 농민 이동의 엄중 제한 등은 국민의 불만을 고조시켜 17세기 초에 발생한 동란의 원인이 되었다. 농민과 도시빈민층 가운데는 관리와 영주의 수탈을 피해 모스크바 국가의 남쪽 경계를 넘어 돈강 유역의 카자크 집단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은 동란에서도 큰 몫을 하였다. 동란은 9세기 이래의 ‘루리크왕조의 단절’(1598)을 자신들의 세력회복에 이용하려는 일부 귀족들의 책동으로 시작되었는데, 동란의 후기에는 스웨덴폴란드가 이에 관여하여 한때 모스크바가 폴란드군에게 점령당하기도 하였다.

1613년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르에 선출되어 동란은 끝났으나, 이 동란을 수습하는 데 공적이 컸던 드보란스트보와 도시의 상인계충은 동란 후에도 젬스키 소보르(일종의 身分制議會) 등을 통해 국가 재건에 협력하였다. 질서의 회복, 중앙 ·지방 통치기관의 정비와 더불어 전국회의(全國會議)의 구실은 약화되었으나, 1648년 지나치게 무거운 세금에 항의하여 일어난 모스크바 시민 반란을 계기로 열린 전국회의는 다음해에 새 법전을 만들었다. 이 법전은 농민의 이동을 완전히 금지하고, 상공업 활동에서 도시민의 우위를 보증하는 등 드보랸스트보와 상인계층의 이익을 뒷받침하고, 교권에 앞서 차르의 절대권을 규정한 것이었다. 17세기에는 유럽의 사상 ·문학 ·미술 등의 영향이 우크라이나와 폴란드를 거쳐 러시아로 들어오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군사 ·산업 기술은 이미 유럽 여러 나라로부터 직접 들어오고 있었다. 러시아군의 근대화는 1632∼34년의 폴란드와의 전쟁에 실패한 후 급격히 진전되었다. 이 전쟁은 동란기에 잃은 서부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카자크 반란에 개입하고, 54∼67년 폴란드와 싸워 서부 영토 외에도 동우크라이나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은 국민생활을 압박하고, 62년 모스크바 반란의 재발 및 라진의 난(亂)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