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천주교

조선의 천주교

한국천주교발원지기념비

한국천주교발원지기념비

18세기 후반에 이익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한 일부 학자들은 서학(西學)에 대한 학문적 이해를 넓혔는데, 그 중의 일부는 신앙의 차원에서 천주교를 믿기 시작하였다. 이벽(李檗)·이가환(李家煥) ·이승훈(李承薰) 등은 천주교를 신봉한 대표적인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유교의 근본원리인 충효(忠孝)를 바탕으로 하여 천주교의 구세복음사상(救世福音思想)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윤리체계를 수립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중인(中人) ·상민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이리하여 천주교는 서양의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주체적으로 수용되어 신앙의 터전을 닦았으나, 신자가 늘어갈수록 유교적 전례문제와 기존 가치관과의 갈등을 보였다.

또한, 만민평등을 주장하여 양반 중심의 신분질서에도 위협을 주게 되어, 마침내 조정에서는 사교로 규정하여 금령을 내리고, 순조 때의 신유교난(辛酉敎難), 헌종 때의 기해교난(己亥敎難), 고종 때의 병인교난(丙寅敎難) 등 세 차례의 큰 박해를 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세는 갈수록 번성하여, 1831년에는 조선교구(朝鮮敎區)가 독립되었고, 1845년에는 한국 최초로 김대건(金大建)이 신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