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사회경제생활

신라의 사회경제생활

경주 첨성대

경주 첨성대

신라 사회는 골품제도를 근간으로 한 17등 관계(官階)를 두고 골품에 따른 정치적 ·사회적 지위를 고정시킨 귀족 중심의 사회였다. 삼국통일 후 식읍 ·사전(賜田) ·마거(馬阹:목마장) 등을 받아 경제적 부를 누린 귀족들과 많은 노비와 가축 ·사병(私兵)을 거느린 귀족도 나타났다. 수도인 경주는 17만 8936호, 1,360방, 55리, 35금입택(金入宅), 4절유택(四節遊宅) 등이 있는 호화로운 도시로서 통일 후 약 100여 년 간 번영을 누렸다. 오늘날 경주에 남아 있는 안압지 ·임해전 ·포석정 등은 당시의 호화로운 생활상을 반증해준다.

통일 후 인구 증가와 생활이 향상됨에 따라 개간사업이 광범위하게 추진되었다. 790년(원성왕 6) 벽골제(碧骨堤)가 개수 이용되었으며, 828년(흥덕왕 3) 김대렴이 당에서 차(茶)의 종자를 수입하여 재배하기도 하였다. 상업 활동은 이미 509년(지증왕 10) 동시전(東市典)이 설치되었고 695년(효소왕 4)에는 서시전과 남시전이 설치되어 문화의 유통이 활발하였다.

특히 신문왕 때는 공장부까지 설치되어 수공업이 발달하여 어아주(魚牙紬) ·조하주(朝霞紬) 등의 명주와 금은 세공품 ·나전칠기 ·죽기 등이 생산되어 일본과 당나라에 수출되는 등 공사무역(公私貿易)이 성행하였다. 당과의 수출품은 대개 금 ·은 ·인삼 ·어아주 ·조하주 등이며, 수입품은 각종 비단 ·의복 ·문방구 ·서적 등이었다. 이와 같은 경제적 발전은 귀족 중심이었다.

한편 농민의 생활은 일본 쇼소인[正倉院] 에서 발견된 서원경지방의 장적을 통하여 농민의 실태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촌(村)은 10호 정도의 혈연집단이 거주하는 자연부락을 기준으로 3∼4개의 촌을 관장하는 촌주(村主)가 중앙의 통치를 대행하였다. 장적의 내용을 보면 촌의 전답결수, 호구수, 인구수, 과목(果木)의 주수, 우마(牛馬)의 필수 등이 기록되었는데 이 장적은 3년마다 재작성하였다. 호(戶)의 등급은 9등급으로 나누고 연령의 등급은 6등급(小子女 ·追子女 ·助子女 ·丁男女 ·除公母 ·老公母)으로 나누었다.

이와 같은 통계는 농민들로부터의 정확한 조세징수와 노력동원의 편리를 위하여 조사 작성된 것이다. 당시의 자영농민은 귀족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여건이 향상되었으나 예민화(隸民化)되는 실정이었다. 당시 귀족들은 농민과 천민의 희생 위에 그들의 삶을 영위하였으므로 신라 말의 정치적 ·사회적 파탄은 더욱 격심해졌다.

이와 같이 신라사회가 파탄을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은 골품제도에 의한 사회적 신분의 지위를 17등 관계로 고정화시킨 모순을 해소시키지 못했기 때문이고, 골품제도의 모순에 대한 시정책은 6두품의 정치적 이념에서도 반영되었다. 그러나 위정자들은 혼란한 사회질서를 권력을 통한 신분적 차별로 사회기강을 바로잡으려 했기 때문에 사회안정을 기할 수 없었고 도리어 반사회적 신분집단을 결속시키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구심점을 잃은 신라사회는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