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그리스도교

한국의 그리스도교

김대건신부 추모탑과 동상

김대건신부 추모탑과 동상

한국에는 18세기에 가톨릭이 처음 전래되고, 프로테스탄트가 19세기에 들어온 이래 꾸준히 교세가 확장되었다. 한국에서는 가톨릭을 천주교(天主敎), 프로테스탄트를 개신교(改新敎) 또는 일반적으로 기독교라고 부른다. 가톨릭은 처음에 서학(西學:서양 학문이란 뜻)이라 하여, 일종의 학문으로 한국에 소개되었는데, 그것은 조선 중기의 학자 이수광(李晬光)이 베이징[北京]에서 마테오 리치의 저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를 가지고 돌아와 소개한 데서 비롯된다. 그 후 천주교로 개칭하게 되었다. 천주교는 종교로서보다는 서양 학문으로서 한국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빠진 형식적인 주자학(朱子學)에 반대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는 실학운동(實學運動)의 발생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 후 학자들은 점차 가톨릭의 종교적 진리를 깨닫게 되어, 이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뚜렷하여졌다. 이 무렵 이승훈(李承薰)이 베이징에서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최초의 한국인 가톨릭 신자가 되었는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가톨릭 선교활동의 첫 열매이었다. 가톨릭이 한국에 전래된 것은 당시 정치 ·경제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약소민족으로서의 고난을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는 어지러웠고 사회는 극도로 불안하였다. 이러한 때였으니,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새 이념과 사상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역사의식이 강한 학자들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주자학을 배척하고 새 학문인 서학에 접근하게 되었던 것이다. 초기 한국 가톨릭교인 가운데 많은 지도자들이 실학자들이었음은 우연이 아니다.

1984년에 한국 천주교회는 200주년을 맞았는데, 이는 1784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은 것을 기점으로 한 것이다. 당시 조선천주교회는 선교사의 전도 없이 학자들에 의한 자발적인 연구로 성립되어, 세계 가톨릭 전교사상(傳敎史上) 커다란 특징을 이루었다. 당시 주자학에 지배되고 있던 조정(朝廷)과 충돌하게 되어 많은 박해사건을 초래하였다. 1791년(정조 15)의 신해사옥(辛亥邪獄), 1801년(순조 1)의 신유사옥(辛酉邪獄), 1839년(헌종 5)의 기해사옥(己亥邪獄) 등이 일어나 외국인 선교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인들이 순교하였다. 이러한 박해 가운데서도 교인들의 활동은 계속되어, 1845년(헌종 11)에는 김대건(金大建)이 한국 사람으로는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도 곧 순교하였고, 1866년(고종 3)에는 흥선대원군에 의한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 9명의 프랑스인 선교사를 비롯하여 많은 교인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1882년(고종 19) 미국과 수호조약을 맺게 되면서, 비로소 한국땅에서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 후 조선천주교회는 일제강점기에서도 꾸준히 발전하여, 오늘날에는 주요 종교의 하나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 프로테스탄트가 한국에 전래된 것은 1885년(고종 22) H.G.언더우드 목사와 H.G.아펜젤러 목사가 정식으로 선교사업을 시작한 데서 비롯된다. 그 무렵, 한국은 주변 열강국과 서유럽 열강국에 의해 압력을 받고 있었으며, 특히 일본의 침략이 점차 현실화되어 가고 있었다. 나라안으로는 부정과 부패정치에 의해 정부는 약체였고 국민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1860년대 이후 전국 각지에서는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혼란 속에서 프로테스탄트는 먼저 서민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프로테스탄트는 개혁의지를 담고 있었으므로, 우리 서민층에게 개혁의 에너지로서 수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는 교육사업 ·의료사업 ·사회사업 등을 통하여 사회개선에 큰 몫을 담당하였으며, 특히 일본에 의한 국권피탈 때는 우리 국민의 자주정신을 고취하고 직접 ·간접으로 독립운동에 지대한 협조를 하였다. 그 후 6 ·25전쟁 등을 겪으면서 세계 그리스도교 사상 유례없는 발전을 보였으나, 반면 많은 교파의 분열 등을 초래, 난립상을 드러내기도 하여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를 비롯하여 많은 교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