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군의 연혁

영동군의 연혁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으며, 삼국시대에는 신라백제의 국경지대를 이루어 두 나라의 각축장이 되었다. 지금의 양산면에 해당하는 대왕산성은 신라의 영토였고, 비봉산의 조천성은 백제에 속하였다. 신라의 영토가 된 뒤 길동군(吉同郡)이라 불리다가 경덕왕 때 지금의 영동군으로 개칭되었고, 황간과 양산을 영현으로 두었다. 영동(永同)이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영동읍에서 주곡천과 양정천의 두 하천[二水]이 합류하여 영동천을 이루는 데서 '이수(二水)'를 한 글자로 표기하여 '영(永)동'이 되었다고 하고, 길동의 '길(吉)'을 '길다[長]'로 훈차(訓借)하여 '길 영(永)'을 써서 '영동'이 되었다고도 한다.

고려가 개국한 뒤, 995년(성종 14) 10도제가 실시되면서 영동은 영남도(嶺南道)에 속한 계주(稽州)로 승격되어 자사(刺史)를 두었으며, 영산(永山)이라는 별호가 하사되었다. 1018년(현종 9) 지방관제가 5도 양계 8목 15부로 개편되어 계주는 보은·옥천 지역과 함께 경상도 상주목(尙州牧)에 속하였고, 황간과 양산 지역은  경산부(京山府)에 소속되었다. 1105년(목종 8) 지방관제를 12절도사 4도호부 체제로 재정비할 때 계주자사가 폐지되었고, 1172년(명종 2) 영동 지역에 처음으로 감무(監務)를 두었다. 이후 1176년(명종 6) 현으로 승격시켜 현령(縣令)을 두었다가 다시 감무를 두었으며, 뒤에 폐지하였다.

조선이 개국한 뒤,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가 개편되면서 영동현은 지금의 용화면 지역을 합병하고 보은현·청산현·옥천현·황간현과 함께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이관하였으며, 영동과 황간에 각각 현감을 두었다. 이듬해에 황간은 청산과 병합되어 황청현(黃靑縣)이 되었다가 1416년에 다시 분리되어 현감을 두었다.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황간현은 현감 박몽열(朴夢說) 등이 진주성 전투에서 패하고 한 사람도 살아오지 못하여 현이 폐지되고 청산현에 부속되었다가 1621년(광해군 13)에 다시 분리되었다. 1895년(고종 32)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 행정구역이 23부(府)로 재편되면서 황간과 함께 공주부(公州府)에 속한 군으로 승격되어 군내면·군동면·남일면·남이면·서일면·서이면·북일면·북이면·양내면·양남일소면·양남이소면·용화면 등 12개 면을 관할하였다. 이듬해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시행되면서 영동군과 황간군이 충청북도로 이관되었다. 1906년(광무 10) 옥천군의 양내면(지금의 양산면)과 양남면(지금의 양강면)이 영동군에 편입되고 황간군의 남면은 경상북도 김산군에 이속되었으며, 금산군의 황금소면(지금의 추풍령면)이 황간군에 편입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부·군·면 통폐합에 따라 황간군·옥천군과 경상도 상주군의 일부를 병합하여 영동면·용산면·황간면·황금면(종전의 황금소면)·매곡면·상촌면·양강면·용화면·학산면·양산면·심천면 등 11개 면 131개 리를 관할하였으며, 1940년 영동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지금의 1읍 10면 체제가 갖추어졌다.

8·15광복 후인 1947년 황간면 백자전리가 용산면에, 용화면의 도덕리·범화리·봉림리가 학산면에 편입되었고, 1968년 용산면의 백자전리가 백자전리와 덕진리로 분리되고 매곡면의 어촌리는 어촌리와 용촌리로 분리되었다.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어 군내의 용산면·황간면·매곡면·황금면을 통과하여 교통이 편리해졌으며, 1973년 영동읍의 고자리와 매곡면의 돈대리가 상촌면으로 편입되었다. 1985년 영동읍의 계산동·중앙동·영산동을 각각 1동·2동으로 분동하고 화산리를 1구·2구로 분리하였으며, 용산면에 용산리를 설치하였다. 1989년에는 매곡면 광평리가 황간면으로 편입되었고, 1991년 황금면이 추풍령면으로 개칭되었다.

2018년을 기준하여 행정구역은 1읍(영동읍) 10면 (용산면·황간면·추풍령면·매곡면·상촌면·양강면·용화면·학산면·양산면·심천면) 231행정리 131법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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