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해방 후: 한국전쟁

대한민국 해방 후: 한국전쟁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대한 일본의 무조건적 항복과 더불어 한국은 해방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38선을 기준으로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기로 결정된다. 해방 직후 여운형이 중심이 된 건국준비위원회가 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고자 하였지만, 조선총독부는 9월 9일 미군에게 행정권을 이양한다. 이어서 국내의 독립운동 인사들과 국외 독립운동 인사들이 정당과 회합을 만들었는데, 건국준비위원회의 후신인 건국동맹뿐 아니라 국내의 보수적 인사들이 참여한 한국 민주당, 사회주의계 인사들이 참여한 조선공산당 등 다양한 정파들이 모임을 만들었다.

1945년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과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보도가 나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대한 찬반 여부를 두고 좌익과 우익이 나뉘어 반목하기 시작하였다. 좌익 측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제시된 결론을 지지하는 쪽이었고, 우익 측은 신탁통치를 식민통치의 연장선으로 해석하며 이에 반대하였다.

미군과 소련 군정은 신탁통치가 끝난 이후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 위하여 미소공동위원회를 1946년 3월에 만들었으나, 양자가 모두 자신들에게 가까운 정부를 구성하고자 하여 쉽게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5월에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한 후 여운형과 김규식 등의 중도파 지식인들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우익계열의 한민당과 좌익계열의 남조선노동당은 참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과 소련군정은 자신이 맡은 영역 내에서 각각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닌 정부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미군정은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시작으로 38선 이남에서 좌익세력의 입지를 좁히고자 노력하였고, 김규식과 여운형을 앞세워 좌우합작 정부를 만들고자 지원하였으나 1947년 초부터는 이를 포기하였으며, 1946년 10월 좌익세력의 주도로 대구지역에서 일어난 시위를 강력하게 탄압하였고, 1946년 12월에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만들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좌우합작운동은 점차 축소되고, 우익과 좌익으로부터의 테러에 시달리다가 급기야 지도자 여운형이 1947년 7월 사망하게 된다. 소련군정 역시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설립한 후 토지개혁을 비롯한 다양한 정책을 실행하도록 하여 북조선에 정부에 준하는 조직을 수립한다. 1947년 2월에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출범시킨다.

1947년 들어 더욱 분명해진 미국과 소련 간의 대결 구도와 냉전의 시작은 1947년 8월 미소공동위원회를 해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미군정은 신탁통치 후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당초의 방침을 포기하고 국제연합(UN)에 한반도 문제를 이양하였다. 1947년 11월 UN은 총선거를 통해 정부를 수립하려던 방침을 세웠으나, 소련 측이 이를 반대하자 1948년 2월 남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결의하였다. 1948년 분단을 막기 위한 남북연석회의는 실패로 돌아갔고, 1948년 5월 10일 남한 지역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으며, 7월 17일 헌법이 공포되었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한편 북한지역에서는 1947년 11월 임시헌법제정위원회가 만들어졌고, 1948년 8월 북조선최고인민위원회가 만들어졌으며, 9월 3일 헌법이 채택되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남한의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제주인들이 1948년 봄 경찰과 충돌한 후 유격대를 창설하자 이후 1년 6개월간 군, 경찰, 우익청년단이 이들에 대한 진압을 시작으로 이들과 가족과 마을 사람들까지 학살하는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 약 2만 5천에서 3만여 명의 사람들이 희생당하였다.

1948년 10월 제주에 투입될 예정이었던 14연대의 군인들이 이에 반대하고 지역의 좌익계 주민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강력하게 진압하였는데, 민간인까지 다수 희생시켜 최소 2,000명 이상의 인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한 지역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1949년 38선 근처에서 다양한 남·북한군 간의 무력 충돌이 있긴 하였으나, 6월 25일의 공격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소련군의 도움을 받아 준비한 전면전의 시작이었다. 이후 전쟁은 1953년 7월까지 지속되었다. 전쟁은 군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좌익인사들과 국민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 우익인사나 군경의 가족 등 다양한 민간인들이 군경에 의해 학살을 당하였고, 북한 지역과 일부 남한 지역에 가해진 공중폭격 역시 무고한 희생자를 다수 발생시켰다. 한국군의 군수 비리로 국민방위군 사건이 발생하여 제대로 군수품을 지급 받지 못하고 희생당한 이들 역시 수만 명에 이른다.

카테고리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