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선

38선

[ 三八線 ]

요약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미·소 양국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나누어 점령한 군사분계선이다.
38선

38선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일제의 굴레에서 해방된 직후부터 1953년 7월 27일 6·25전쟁으로 인한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남한과 북한과의 정치적 경계선이 되었다. 이 경계선은 순전히 타의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책정된 것이며, 한국 민족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민족적 비극과 고통을 안겨 준 한많은 경계선이다.

[책정경위]
남북한간의 경계선인 38선은 애당초 순수한 군사적 목적에 따라 일시적 편의를 위하여 책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임박하였음을 미리 내다본 미국·영국·소련 등 연합국측 3개국 수뇌들은 1945년 2월 4∼11일 얄타 회담에서 전후 처리에 관한 협정을 맺었고, 소련은 대일참전(對日參戰)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이 협정에서는 한국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언급되었다.

① 적절한 시기에 자주독립국이 될 것을 협약한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하고, ② 어느 단일국가에 의한 한국의 군사점령은 강한 정치적 반응을 야기할 우려가 있으므로 한국을 구분된 지역이 아니라 단일체로 취급하여 중앙집권제행정원칙에 입각한 군정청(軍政廳)을 조직할 것 등의 내용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그후 연합군 참모장 공동회의에서 전후의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군이 분담하여 점령하기로 약정되었다.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비로소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무조건 항복할 뜻을 밝히자, 미국 국방성은 한반도는 38도선을 기준으로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주한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 문제를 담당할 것을 제의하여 미국 정부안으로 확정하였다.

그후 소련측과 합의하여 미·소 양군의 군사분계선으로서 38선을 책정하였다. 그것이 문서상으로 나타난 것은 1945년 9월 2일 연합국 최고사령부 지시 제1호였다. 여기서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국에 있는 일본군은 소비에트 극동군 최고사령관에게, 그리고 38도선 이남의 일본군은 미합중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에게 항복할 것을 명시하였다.

[영향]
단순히 군사작전상의 업무분담을 위해 일시적으로 분계선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세계 적화(赤化)를 노리는 소련의 정치적 야심 때문에 남북 분단의 정치적 경계선으로 바뀜으로써, 우리 민족에게는 더없는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서 수천 년 간 단일 생활권을 형성하였던 우리 민족은 일시에 두 개의 이질적인 생활영역으로 분할되어, 부모 형제간의 생이별은 물론 그밖에도 수많은 고통을 강요당하였다. 특히 우리 남한측은 그때까지 북한의 공업기반에 의존하였던 전력(電力)·비료·석탄·관개수리(灌漑水利) 등의 공급 단절로 결정적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남·북한이 각기 민주와 공산이라는 대립적 이데올로기와 체제로 맞서게 됨에 따라, 한반도는 격화되는 동서냉전의 최전선이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북한의 남침으로 동족상잔의 민족적 비극이 유발되었다. 또 휴전선이 현재와 같은 위치에 책정된 것은 군사적인 이유도 있겠으나, 그보다도 38선을 의식한 국제정치적 고려가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