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침

도침

[ 道琛 ]

요약 백제 후기 전북 부안의 개암사를 창건한 묘련(妙蓮)의 수제자이다. 백제의 재건이라는 목표아래 복신과 함께 부흥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복신과의 사이에 반목이 커져 죽음을 당하였다.
출생-사망 ? ~ 661(문무왕 1)
별칭 영군장군(領軍將軍)
활동분야 승려, 부흥운동가

전북 부안의 개암사를 창건한 묘련(妙蓮)의 수제자이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자 백제의 왕족이던 복신(福信) 등과 함께 일본에 머물고 있던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왕으로 추대하여 독립된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도록 하였다. 그는 주류성(周留城, 지금의 한산)을 중심지로 하여 백제의 재건이라는 목표 아래 복신과 함께 부흥 운동을 펼쳐나갔다.

승려임에도 스스로를 영군장군(領軍將軍), 복신은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이름짓고 서북 각 부(部)의 유민들을 규합하여 대흥임존성(大興任存城, 지금의 예산)에 자리를 잡고 기세를 떨쳤다.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가 동이(東夷)를 평정하여 당나라의 연호를 해외에 펴려 한다며 그에게 사자를 파견하였으나, 도침은 굽히지 않고 오히려 사자를 옥에 가두는 등 담대하게 대처하였다. 또한, 유인궤에게 “당나라가 백제인들은 노소(老少)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인 뒤에 신라에 넘겨주기로 약속하였으니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겠는가?”라고 전할만큼 기세가 등등하였다.

백제부흥군은 한때 수도 사비성 함락을 눈앞에 둘 정도로 세력을 넓혔으며, 지라성(支羅城, 지금의 대전 부근), 사정성(沙井城), 옹산성(甕山城), 진현성(眞峴城) 등에 자리를 잡고 신라군이 금강을 통해서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과 사비(지금의 부여)로 식량을 운반하는 통로를 끊어 나당연합군을 궁지에 몰아넣기도 하였다. 백제부흥군의 투쟁으로 어려움에 처한 유인궤는 유인원(劉仁願)의 군대와 합세하여 공격하였지만 큰 타격을 입었고 결국 당나라 황제에게 요청하여 신라군의 지원을 받았으나 역시 크게 패하였다. 그러나 부흥 운동을 이끌어오던 복신과의 사이에 반목이 커져 죽임을 당하였다. 지금도 충남 부여군 은산면에서는 도침과 복신 등을 추모하는 은산 별신제를 이어오고 있다.

도침 본문 이미지 1
복신도침안승복신도침흑치상지검모잠고연무고구려의부흥운동백제의부흥운동

역참조항목

예산 임존성, , 각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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