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융
[ 扶餘隆 ]
- 요약
백제의 왕족. 백제의 유민 복신·도침 등이 부흥운동을 일으키자 이들을 무찌르고 웅진 도독이 되어 백제의 옛 땅을 다스렸다. 그 후 신라의 항당 정책으로 압박을 받다 당나라에 돌아가 죽었다.
![의자왕과 부여융의 가묘](https://dbscthumb-phinf.pstatic.net/2765_000_39/20181007211605367_5PCW87PH0.jpg/278615.jpg?type=m250&wm=N)
의자왕과 부여융의 가묘
출생-사망 | 615 ~ 6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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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의 아들. 644년(의자왕 4)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왕성이 함락될 때 의자왕과 함께 웅진성(熊津城)으로 피신하였다가 신라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해 9월 당(唐)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따라 의자왕과 함께 당의 수도 뤄양[洛陽]으로 끌려갔다. 이듬해 백제의 유민 복신(福信) ·도침(道琛) 등이 부여 풍(扶餘豊)을 옹립, 주류성(周留城)을 근거로 부흥운동을 일으키자 당나라 장군 유인궤(劉仁軌) 등과 수군(水軍)을 이끌고 들어와 백마강에서 이들을 무찔렀다.
665년(문무왕 5) 웅진도독(熊津都督)이 되어 백제의 옛 땅을 다스렸다. 그 후 신라의 항당(抗唐) 정책으로 압박을 받다가 676년 당나라에 돌아가 광록대부태상원외경(光祿大夫太常員外卿) 겸 웅진도독 대방군왕(帶方郡王)에 봉해지고 뤄양[洛陽]에서 죽었다. 죽은 뒤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을 추증받았다. 묘지는 허난성 뤄양의 북망산(北芒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