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아악

대성아악

[ 大晟雅樂 ]

요약 중국 송나라의 휘종(徽宗)이 1105년(휘종 4) 대성부(大晟府)에 일러 새로이 만든 아악.
편종

편종

대성악·대성신악(大晟新樂)이라고도 한다. 대성아악은 송나라 궁중에서 사용하던 제례음악을 태조 때부터 휘종에 이르기까지 여섯 번이나 고쳐 새로 만들었다. 이전의 아악을 구악(舊樂)이라 하여 일체 쓰지 않기로 하고 이를 1105년부터 대성부에서 관장하게 하였다.

이 대성아악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1116년(예종 11)으로, 전에 송 휘종이 신악기(新樂器)와 곡보(曲譜) 및 지결도(指決圖)를 보내준 데 대해 하례사(賀禮使)로 파견된 왕자지(王字之)와 문공미(文公美) 등에 의해서였다.

당시 보내온 대성아악의 악기는 편종(編鍾)·편경(編磬)·금(琴)·슬(瑟)·지(篪)·적(篴)·소(簫)·소생(巢笙)·화생(和笙)·훈(壎) 등의 아악기(雅樂器)였으며, 이에 수반되는 문무(文舞)와 무무(武舞) 등 일무(佾舞)에 쓰이는 약·적(翟)·간(干)·과(戈) 등 36벌과, 이러한 의식에 쓰이는 의관(衣冠)·무의(舞衣)·약복(樂服)·의물(儀物) 등 아악연주에 필요한 것을 모두 갖추어 보내왔다.

이렇게 들어온 대성아악은 원구(圜丘)·사직(社稷)·태묘(太廟) 등 나라의 각종 제사와 연향(宴享:국빈을 대접하는 잔치)에 쓰였으나 고려 말에 이르러 아악에 쓰이는 악기가 부족해지고 또 고려 유신들에 의해 멋대로 고쳐짐으로써 대성악 본래의 모습은 대악서(大樂署)나 관현방(管絃房)의 악공(樂工)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였다.

일무와 악장 부르는 법에서도 옛 제도에 어그러짐이 많아 불완전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1391년(공양왕 3) 아악서(雅樂署)를 설치하였지만 이듬해 고려의 멸망으로 무위에 그치고,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서야 이에 손을 쓰게 되었다.

박연(朴堧) 등 여러 신하들은 중국의 옛 문헌들을 참고하여 원제(原制)인 중국 주대(周代)의 아악에 가깝도록 재현시켰으며,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것인데 대부분의 제사가 폐지됨에 따라 그 음악도 사라졌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공자묘 제사음악인 문묘악 하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