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2세

프리드리히 2세

[ Friedrich II ]

요약 프로이센의 국왕(재위 1740~1786). 강력한 대외정책을 추진하여 오스트리아의 제위상속(帝位相續)을 둘러싼 분쟁에 편승, 슐레지엔 전쟁을 일으켰다.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의 관계가 악화되자 영국 ·프랑스 간 식민지 전쟁에서 영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7년전쟁이 시작되었다. 국민의 행복 증진을 우선한 계몽전제군주로 평가된다.
출생-사망 1712.1.24 ~ 1786.8.17
국적/왕조 독일 프로이센
재위기간 1740년 ~ 1786년
별칭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sse)
활동분야 정치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sse)이라 불린다. 소년시절에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아 프랑스 문화에 심취하여 독일문화를 경멸하게 되었으며, 프랑스 문학과 플루트 연주에 골몰하였기 때문에 그를 엄격한 무인(武人)으로 키우려는 부왕(父王)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노여움을 샀으며, 18세 때 어머니의 친정인 영국 궁정으로 탈주하려고 하다가 잡혀 감금당하고,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형집행을 면한 일도 있었다.

아버지의 명으로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와 결혼하였으나, 이 왕비를 사랑하지 않아 평생토록 가정적으로는 불행하였다. 이 무렵에 라인스베르크별궁(別宮)에서 독서와 음악으로 울분을 달랬고, 프랑스의 볼테르와 서신 왕래를 하며, 그의 지도하에 《반(反)마키아벨리론(論)》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국왕으로 즉위한 후에는 준열한 현실 정치가, 엄격한 군인의 일면을 발휘하여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풍부한 국고와 방대한 군대를 활용하여 강력한 대외정책을 추진하였다. 우선, 오스트리아의 제위상속(帝位相續)을 둘러싼 분쟁에 편승하여 슐레지엔 전쟁(제1차, 제2차)을 일으켜서 경제적으로 요지인 슐레지엔을 병합하고 그 지역을 대대적으로 개발하였다.

그 무렵 베를린에 학사원(學士院)을 부흥시키고, 포츠담에 상수시 궁전을 조영하여 내외의 학자 ·문인들을 초청, 학문 ·예술을 토론하였다. 볼테르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대왕과 충돌하고 3년 후에 떠나가 버렸다. 오스트리아의 여제(女帝)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의 탈환을 꾀하여 숙적인 프랑스와 우호관계를 맺었고, 러시아 여제 엘리자베타도 대왕을 미워했기 때문에 프로이센은 고립상태에 빠졌다. 때마침 영국 ·프랑스 간에 식민지 전쟁이 일어나자 대왕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기선을 잡아 작센에 군대를 침공시킴으로써 7년전쟁(1756∼1763)이 일어났다.

대왕은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의 3대 강국을 상대로 잘 싸웠으나 군사력의 부족으로 전황이 불리해졌고, 영국의 원조마저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몹시 궁지에 몰렸으나, 1762년 러시아의 앨리자베타 여제가 죽고, 프리드리히 대왕을 숭배하는 표트르 3세가 즉위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자, 대왕은 오스트리아와 후베르투스부르크 화약(和約)을 맺었다. 그 후 폴란드분할(1772)에 참가하고, 바바리아 계승전쟁(1778)에 참전한 외에는 대외 평화정책을 지키면서 국력의 회복을 도모하였다. 대왕은 ‘군주는 국가 제1의 머슴’이라는 신조하에 국민의 행복 증진을 으뜸으로 삼았지만, 그 정치가 전제정치였음은 그 시대의 다른 군주들의 경우와 다름이 없었으며, 계몽전제군주의 한 전형(典型)이었다. 다만, 종교면에서는 관용을 베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