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

홍경래

[ 洪景來 ]

요약 19세기 초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 이끈 최고 지도자이다.
출생-사망 1771 ~ 1812
본관 남양
활동분야 농민반란
출생지 평남 용강

평안도 용강군(龍岡郡) 출신이다. 아버지를 포함한 가계를 알 수 없으며, 아들만 네 형제인 집안의 셋째로 처 최소사(崔召史)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신분은 대개 몰락한 양반이라고 설명하여 왔으나, 평민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경제적으로는 전답이나 노비를 지니지 못한 빈궁한 처지에 있었다.

유교는 물론 풍수(風水)에 상당한 소양을 지니고 있었으며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한 지식인이었다. 평양 향시를 통과했고 한양으로 올라와 대과(大科)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고 전한다. 홍경래는 당시의 세도가들의 폭정과 민중탄압을 비판하고 민중의 소망을 반영하여 초인(超人)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정진인설(鄭眞人說)과 지금의 어려움은 조선에서 천명(天命)이 떠난 것이라는 유교 논리를 봉기의 중요한 이념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니고 있어 직접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기도 하였으며, 병법에도 밝아 다양한 전술로 관군과 대항하였다고 전한다. 이 밖에 성장과정과 과거응시 등에 대해서 19세기 후반 작자미상의 한문단편 《홍경래전》를 근거하고 있지만, 그 내용들은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1801년(순조 1)에 우군칙(禹君則)과 무장 반란을 논의한 뒤로 10년 동안 각지를 다니며 향촌의 유력자, 무술을 갖춘 장사(壯士), 그리고 부호를 끌어들여 봉기를 준비하였다.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의 직책을 띠고 1811년 12월 18일(양력 1812년 1월 31일) 가산 다복동의 봉기로부터 만 4개월 동안 계속된 반란(홍경래의 난)을 총지휘하였다.

1812년 4월 19일 관군에 의해 정주성이 함락될 때 전사하였으며, 정부로부터 '군대를 일으켜 반역한 우두머리[擧兵逆魁]'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민중들 사이에서는 저항과 변혁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죽지 않고 하늘을 날아서 성을 빠져나갔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면서 민중봉기를 선동하였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에는 그가 이끈 군사력과 봉기 이념에 명확한 한계가 있었지만, 당시의 지배체제가 아니라 피지배층사회에서 성장한 인물로서 대규모의 항쟁을 주도한 점에서 중세사회의 극복에 중요한 단계를 이룩하였다.

참조항목

세도정치,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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