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우

최제우

[ 崔濟愚 ]

요약 조선 말기의 종교사상가로 민족 고유의 경천(敬天) 사상을 바탕으로 유(儒)ㆍ불(佛)ㆍ선(仙)과 도참사상, 후천개벽사상 등의 민중 사상을 융합하여 동학(東學)을 창시하였다.
최제우 영정

최제우 영정

출생-사망 1824 ~ 1864
수운(水雲)
국적 한국
활동분야 종교
주요저서 , 등
시대 조선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字)는 성묵(性默)이다. 아명은 복술(福述), 관명(冠名)은 제선(濟宣), 호(號)는 수운(水雲)이다. '제우(濟愚)'는 35세 되던 해에 어리석은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으로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1824년 12월 18일 경주 가정리(稼亭里,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생7대조인 최진립(崔震立)이 의병을 일으켜 순국하여 병조판서로 추서되었으나, 후손들은 중앙의 관직을 얻지 못해 쇠락하였다. 그의 아버지인 최옥(崔鋈)도 영남 지방에서 비교적 이름이 알려진 문사(文士)였지만 과거에 낙방해 관직에는 오르지 못했다. 게다가 최제우는 최옥이 63세 때에 곡산(谷山) 한씨(韓氏)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재가녀(再嫁女)의 자식이라는 사회적 차별을 받아야 했다.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익혔고, 13세에 울산 출신의 박씨(朴氏)와 결혼했다. 그러나 10세에 어머니를 잃고, 17세에 아버지마저 죽자 3년상을 마친 뒤 1844년부터 1854년까지 각지를 유랑하였다. 이 때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당시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를 이해하고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1854년 고향으로 돌아와 처가가 있는 울산 유곡(裕谷)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1855년 한 승려에게 <을묘천서(乙卯天書)>라는 비서(秘書)를 얻는 신비 체험을 하였다. 1856년 성산(千聖山, 경상남도 양산) 내원암(內院庵)에서 입산 기도를 시작했으나 숙부의 죽음으로 중단하였고, 이듬해 천성산 적멸굴(寂滅窟)에서 다시 49일간 기도하며 도를 닦았다. 1859년 다시 경주로 돌아와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도(修道)를 하였다. 그러다 1860년 음력 4월 5일 득도(得道)를 하여 동학(東學)을 창시하였다.

최제우 본문 이미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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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을 얻은 뒤에 ‘용담가(龍潭歌)’, ‘안심가(安心歌)’ 등의 한글 가사를 지어 포교 활동을 시작했으나, 1861년 지역의 유생들에게 서학(西學)으로 몰려 경주를 떠났다. 울산, 부산을 거쳐 남원 은적암(隱寂庵)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 무렵 ‘포덕문(布德文)’, ‘논학문(論學文)’ 등을 저술하며 교리와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다시 경주로 돌아와 포교를 하다가 관아에 잡혀 들어가기도 했으나 풀려나와 포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교인의 수가 늘어나자 경주·영덕·대구·청도·울산 등지에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접주(接主)를 두어 교도(敎徒)를 관장하게 했는데, 1863년에는 접소가 14곳, 교도의 수는 3,000여 명에 이르렀다. 동학의 교세가 빠르게 성장해 조정의 주목을 받게 되자 1863년 8월에 최시형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해 도통(道統)을 잇게 했다. 자신은 포교 활동을 계속하다가 1864년 1월 18일 ‘삿된 도로 세상을 어지럽힌 죄(左道亂正之律)’로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그리고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다가, 4월 15일에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41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경주 가정리 구미산(龜尾山)에 묘가 있으며, 1907년에 사면(赦免)되었다.

그는 포교를 위해 ‘용담가(龍潭歌)’, ‘안심가(安心歌)’, ‘교훈가(敎訓歌)’,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 ‘도수사(道修詞)’, ‘권학가(勸學歌)’, ‘도덕가(道德歌)’, ‘흥비가(興比歌)’, ‘검결(劍訣)’ 등의 한글 가사(歌詞)를 지었고, ‘포덕문(布德文)’, ‘논학문(論學文)’, ‘수덕문(修德文)’, ‘불연기연(不然其然)’ 등 한문으로 된 글들을 남겼다. 그의 한문 저술들은 1880년  최시형에 의해 <동경대전(東經大全)>으로 편찬되었으며, 한글 가사들은 이듬해 <용담유사(龍潭遺詞)>로 묶여 간행되었다.

최제우의 사상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한 1860년대에 조선 사회는 심각한 혼란과 위기에 놓여 있었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고, 오랜 기간 외척(外戚)의 세도정치가 지속되면서 정치 기강이 문란해져 지방관과 토호의 횡포와 착취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자연재해와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농민들의 삶은 매우 피폐해졌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각지에서 농민 봉기를 일으키면서 사회 불안은 더욱 확산되었고, 서양 열강의 중국 침략 등으로 외세에 대한 위기감과 서학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성리학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을 필요로 하였는데, 19세기에는 <정감록(鄭鑑錄)>의 도참사상이나 <주역(周易)>이나 미륵사상에 기초한 후천개벽사상 등이 민중사회에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최제우는 오랜 방랑으로 농민의 현실을 자세히 알고 있었기에 사회 현실과 민중의 요구에 기초한 새로운 사상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는 한국 전통의 경천(敬天) 사상을 기초로 유(儒)·불(佛)·선(仙)과 도참사상, 후천개벽사상 등의 민중 사상을 융합하여 동학을 창시하였다.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서학(西學)에 대립된 것으로서, 그는 “나 또한 동쪽에서 태어나 동도(東道)를 받았으니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이나, 학(學)은 동학(東學)이다”(논학문)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지기금지(至氣今至) 원위대강(願爲大降)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지(萬事知)’의 21자로 나타냈다. 이는 “지극한 기운이 오늘에 이르러 크게 내리도록 빕니다. 천주(天主)를 모셔 조화가 정해지는 것을 영세토록 잊지 않으면 온갖 일을 알게 됩니다”라는 뜻이다.

‘지기금지(至氣今至)’라는 말에서 나타나듯이 최제우는 기일원론(氣一元論) 사상에 기초해 있다. 우주 만물은 모두 지극한 지기(至氣)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신의 정성으로 그 지극한 기(氣)를 몸과 마음에 모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천주(侍天主) 사상이다. 곧 기일원론(氣一元論)의 관점에 따라 하늘과 사람이 일체화될 수 있다는 것으로, 최제우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은 인간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 그의 사상에서 천주(天主)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다. 천주를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 인간은 신분이나 빈부(貧富), 적서(嫡庶), 남녀(男女) 등의 구분에 관계없이 모두 평등하고, 수행을 하면 모두 군자가 될 수 있다. 그는 시천주(侍天主)의 방법으로는 마음을 잃지 않고 기를 바르게 하는 ‘수심정기(守心正氣)’를 강조하였다.

또한 최제우는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을 제시하였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크게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으로 구분했으며, 혼란에 가득 찬 선천의 종말기를 자기의 사사로운 마음만을 위하는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시대라고 하였다. 그는 5만년에 걸친 선천의 시대가 지나고 후천의 시대가 개벽하였다며 변화에 대한 민중의 갈망을 고취하였다. 또한 그는 서학과 서양 세력이 이기주의에 기초한 각자위심(各自爲心)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며, 동학에 의해 모두가 다른 마음을 이겨내고 한 몸이 되는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새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그는 무위이화(無爲而化)에 따른 조화를 강조하였다. 자연과 인간 세계의 조화는 정해져 있다. 곧 음(陰)과 양(陽)이 조화 속에서 사계절의 변화가 나타나듯이, 인간 사회의 질서도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끊임없이 변화해간다. 이로써 최제우는 사회 질서의 개혁에 대한 민중의 희망을 고취하였다.

이처럼 최제우는 시천주 상에 기초하여 민중의 평등의식을 반영하고 고취하였다. 그리고 여러 민중 사상을 흡수하여 지배층의 성리학에 대항하여 사회 변화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뒷받침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그의 사상은 2대 교주인 최시형에 이르러 ‘사람이 하늘이니(人是天)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事人如天)’는 것으로 발전했으며, 3대 교주인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체계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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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 최제우 생가 경북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에 있는 수운 최제우의 생가터. 출처: doo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