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조신원운동

교조신원운동

[ 敎祖伸寃運動 ]

요약 1892∼1893년에 동학 교도들이 벌인 운동이다. 1864년에 처형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조정으로부터 포교의 자유를 인정받는 것을 내세웠으나, 서인주, 전봉준 등에 의해 ‘척왜양(斥倭洋)’의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864년 최제우(崔濟愚)가 ‘삿된 도로 세상을 어지럽힌(左道亂正)’ 죄로 사로잡혀 처형된 뒤 동학은 사교(邪敎)로 몰려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노력으로 동학은 경상·충청·전라의 삼남(三南) 지방을 중심으로 꾸준히 세력을 넓혔고, 교조(敎祖)인 최제우의 신원(伸寃, 억울함이나 원한을 품)과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1871년 이필제(李弼濟)가 교조신원(敎祖伸寃)을 내세워 동학 교도들을 모아 영해(寧海,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에서 민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뒤 동학은 정부에 더 가혹하게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1890년대에 들어서 호서,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동학의 세력은 더욱 확대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전봉준(全琫準), 서인주(徐仁周) 등 남접(南接)의 주요 지도자들은 대규모 집회를 열어 교조의 신원과 가렴주구(苛斂誅求)의 중단 등을 요구하고, 이를 ‘척왜양(斥倭洋)’의 정치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하였다. 1892∼1893년에 동학 조직을 중심으로 벌어진 이러한 사건을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이라고 하며, 일부 학자들은 ‘척왜양’을 내세운 정치운동을 따로 ‘척왜양운동(斥倭洋運動)’으로 구분해 나타내기도 한다. 이 운동은 삼남 지방에서 잇따라 대규모 집회를 열어 동학 조직을 중심으로 농민의 불만과 정치적 요구, 세력을 결집함으로써 1894년 농민전쟁이 일어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892년 동학 남접의 서인주, 서병학(徐丙鶴) 등은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에게 교조신원운동을 요청했으나, 최시형은 과거 이필제의 난에서 입은 피해 때문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서인주와 서병학은 독자적으로 10월에 공주에서 집회를 열어 충청도 관찰사인 조병식(趙秉式)에게 의송(議送)을 냈다. 그 내용은 동학은 사도(邪道)가 아니므로 억울하게 옥에 갇힌 교도를 풀어주고, 각 읍의 수령들이 교도들을 침학(侵虐)하고 재물을 빼앗는 일을 금지해 주며,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조정에 품의(稟議)해 달라는 것이었다. 조병식은 동학을 금하지 않는 것은 조정에서만 처분할 수 있는 것이므로 충청 감영의 소관이 아니라며 교조 신원의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동학을 금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폐단을 없애달라는 요구는 받아들였다. 그리고 집회에 대해 별다른 제재 조치는 하지 않았다.

이러한 관(官)의 미온적인 태도에 최시형의 동학 교단도 교조신원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해 11월에 전라도 삼례에서 다시 집회를 열었다. 삼례에 모인 군중은 두 차례에 걸쳐 전라도 관찰사인 이경직(李耕稙)에게 소장을 보냈다. 그 결과 전라 감영에서도 동학 교도에 대한 부당한 수탈을 금하겠다는 답변을 얻고 해산하였다. 이 때 전봉준 등 호남의 교도들은 ① 동학당을 사도(邪道)로 정하지 말 것 ② 외국의 선교사와 상인은 모두 나라 밖으로 쫓아낼 것 ③ 탐학하는 지방관리를 제거할 것 등 3개조의 요구조건을 제시하는 등 교조신원의 종교운동보다는 반봉건·반외세의 정치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당시 서인주, 전봉준 등의 남접 강경파는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인정에 초점을 두고 있던 북접의 교단 지도부와는 달리 농민의 사회 현실 개선을 위한 정치 개혁을 중시하는 모습을 나타냈다. 특히 이들은 복합상소를 통해 동학 교도를 한양으로 결집시켜 부패한 집권세력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교조신원운동 본문 이미지 1
교조신원운동보은집회삼례집회최제우최제우동학

12월에는 충청도 보은 장내리(帳內里)에서 다시 집회를 열었는데, 공주집회와 삼례집회의 영향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여기에서는 곧바로 한양으로 올라가 상소운동을 벌이자는 요구가 높았으나 북접의 동학 교단은 복합상소는 추진하되 시기와 인원 등은 따로 정한다고 무마하여 집회를 해산시켰다.

최시형은 1893년 1월 소수(疏首)를 박광호(朴光浩)로 하고, 청주 손천민(孫天民)의 집을 임시 본부로 하여 복합상소의 절차를 정하고, 서병학을 2월 1일에 한양으로 먼저 올려보내 준비를 마치게 하였다. 그리고 2월 8일 한양에 도착한 손병희(孫秉熙), 김연국(金演局), 손천민(孫天民), 박인호(朴寅浩) 등은 2월 11일부터 광화문 앞에 엎드려 상소하였다. 그러다 13일 “각자 집에 돌아가 하는 일에 힘쓰고 있으면 소원에 따라 시행하리라”는 고종의 전교(傳敎)를 받고 복합상소를 중단하였다. 그러나 서인주 등은 복합상소와는 별도로 한양에 ‘척왜양’의 괘서를 붙이는 한편, 미국인 학당과 교회당, 프랑스 공사관, 일본 영사관 등에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무장을 갖추어 3월 7일에 공격하겠다는 내용의 괘서를 붙였다. 부산 성문과 충청도 청산 등지에도 척왜양의 괘서가 붙었고, 전봉준 등은 세력을 모아 한양으로 진격하려고 준비하였다.

3월 7일의 거사는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지만, 동학 교도는 각 지방에 방문을 붙여 3월 10일을 전후하여 삼남 지방에서 동시에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충청도에서는 보은에서, 전라도에서는 원평에서, 경상도에서는 밀양에서 각각 집회가 열렸는데, 이 집회들은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내세워 교조신원을 요구하는 단순한 종교운동의 차원을 넘어서 반봉건·반외세의 성격이 뚜렷이 나타났다. 참석자들은 소매 없는 푸른 두루마기에다 소매 끝은 붉은색으로 장식하는 등 조직적인 면모를 나타냈고, 이곳에는 동학 교도만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를 염원하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곧 종교운동을 내세우며 출발했던 교조신원운동이 반봉건·반외세의 정치적 요구를 내세운 정치운동으로 전환하였으며, 이는 1894년 농민전쟁이 일어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보은에서는 삼문(三門) 밖에 관가에 보내는 통고문을 붙였는데 그 내용은 왜적과 양적은 같이 지낼 수 없는 원수라는 것이었다. 집회에 참여한 사람은 7∼8만 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은 성채를 쌓아 ‘척왜양창의’의 깃발을 내걸었고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어윤중(魚允中)이 조정에 보낸 장계(狀啓)에 따르면 보은집회에서는 “외국의 여러 나라에도 민회(民會)가 있어 조정의 명령이 민국(民國)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의논하여 정한다고 한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것이다. 어찌 비류(非類)로 취급하느냐”는 내용의 근대적 정치의식이 담긴 주장도 나타났다.

전라도 금구현 원평(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에서는 전봉준 등이 중심이 되어 집회가 열렸다. 집회에서는 한양으로 곧바로 올라갈 것을 결의하였고, 3월 21일에는 손화중(孫化中)이 1만여 명을 이끌고 보은집회에 참여했다. 경상도 밀양에서 열린 집회에도 전봉준의 상경 계획에 따라 수만의 군중이 모였다.

집회의 규모가 커지자 조정에서는 3월 17일 어윤중을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로 삼아 파견하였다. 어윤중은 3월 26일 보은에서 해산을 권유하는 왕의 칙유문(勅諭文)을 전하고, 그들의 뜻을 왕에게 전하겠다고 회유하였다. 그리고 4월 1일 청주영장, 보은군수를 대동하고 보은에 가서 왕의 윤음(綸音)을 전했다. 집회가 정치운동으로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한 최시형·손병희 등 북접의 교단 지도자들은 3일 안에 집회를 해산하겠다고 했고, 집회 참석자들이 이에 반발하자 4월 2일 밤에 몸을 피했다.

교단 지도부가 잠적해 버리고 관군이 해산을 압박하자 보은 집회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흩어졌다. 원평 집회도 어윤중이 원평에 도착하기 전에 스스로 해산하였으며, 밀양 집회도 보은 집회의 해산 소식이 전달되면서 흩어졌다. 보은·원평·밀양에서 동시에 열린 삼남 집회 이후 북접의 동학 교단 지도부는 전봉준을 위험 인물로 지목하였다. 그리고 교단 조직을 통제하기 위해 법소(法所)와 도소(都所)를 설치하여 교도들이 임의로 집단 행동에 나서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이처럼 1892년 10월 공주 집회에서 시작되어 1893년 4월 삼남 집회의 해산까지 진행된 교조신원운동은 겉으로는 ‘포교의 자유’라는 종교적 요구를 내세우며 시작되었지만, 삼례 집회와 괘서 투쟁, 삼남 집회 등을 거치며 반봉건·반외세의 투쟁 의지를 결집시키는 정치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종교의 이해에 초점을 두고 있는 온건한 북접의 교단 지도부와 구분되는 전봉준, 서인주, 손화중 등 남접의 강경파가 독자적인 세력으로 떠올랐다. 곧 1892∼1893년에 전개된 교조신원운동은 1894년 농민전쟁을 예비했던 사전 단계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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